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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를 사랑한 천재 화가들 - 폴 세잔느

폴 세잔느(Paul Cezanne),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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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와는 달리 이미 생전에 화가로서의 명성과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그는 여전히 방황했고 예술적 해법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그럴 때면 생트 빅트와르 산에 올랐다.

폴 세잔느(Paul Cezanne),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

중세시대 때 프로방스의 수도 역할을 하며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던 엑상프로방스에서는 그 유명한 ‘미라보(Mirabeau)’ 거리를 거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시내 한가운데, 라 로통드(la Rotonde)에 위치한 여행자 안내 사무실에 들르면 바글바글 대는 관광객들 입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질문. 바로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 화가이자 입체파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폴 세잔느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른바 ‘세잔느의 고향’에 왔는데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시간은 촉박하고 마음이 급한 관광객들에게는 일단 풀고 가야 할 숙제와도 같은 것이다.

이미 다 예상했다는 듯 안내 직원들은 말도 끝나기 전에 ‘엑상프로방스, 세잔느의 고향’ ‘세잔느 유적지 찾아가기’ 등의 제목을 단 안내책자를 들이민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 학교에 다니고 후에 파리에서 돌아와 마지막 숨이 멎는 순간까지 고향과 함께한 세잔느. 이쯤 되면 이곳 사람들이 세잔느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프로방스의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 속에서 엑상프로방스가 탁월한 차별화를 누리는 데 성공한 이유도 다 세잔느의 인기 덕분이다.

세잔느의 어릴 적 집

세잔느의 여동생 마리 세잔느가 살던 집

아무런 정보 없이 쳐다본다면 그 옆집이나 앞집이나 별반 다를 게 없지만 손에 들린 세잔느 유적지들의 번호를 확인해가며 눈앞의 건물을 올려본다면 그 감동은 다르게 다가온다. 똑같은 창틀과 비슷한 담벼락의 고딕식 건물이라 해도 ‘백여 년 전, 저 집 안에서 유년기의 세잔느가 울고 웃고 장난치며 지냈겠구나!’라고 상상하는 순간, 그 집은 마술처럼 그럴싸하게 변한다.

세잔느의 생가

세잔느가 다녔던 학교인 미네 컬리지(Mignet College)

팸플릿에 적힌 ‘세잔느 유적지 걸어서 따라가기’에는 자그마치 서른네 가지의 목록이 적혀 있다. 태어난 집, 부모가 살던 집, 동생이 살던 집, 새로 이사 간 집, 세잔느가 다닌 학교, 세잔느가 다닌 교회와 즐겨가던 카페, 세잔느 아버지가 근무한 은행, 그리고 세잔느가 묻힌 무덤까지 치밀하고 구체적으로 관광 대상들을 끄집어내 관리하고 있다. 아무리 손바닥만 한 동네라 할지라도 미로처럼 뻗어 있는 골목들을 헤집고 다니며 서른네 곳을 다 돌아본다는 건 그리 만만치 않다.

그러나 말년의 세잔느에게 안식과 영감을 주었던 마지막 작업실만큼은 꼭 들러볼 필요가 있다. 그의 나이 예순 살이 되었을 때, 오랫동안 유지해온 부모의 집을 팔고 새로운 둥지를 찾던 세잔느가 선택한 작업실 공간. 멀리 생트 빅트와르(Sainte-Victoire) 산이 보이고 언덕 위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던 고즈넉한 집. 일명 ‘세잔느의 아틀리에(L'atelier Cezanne)’로 불리며 시(市) 관할의 박물관이 된 이곳은 엑상프로방스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약 50분가량 걸어가면 한적한 길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길옆의 가로수를 벗 삼아 완만한 언덕을 쭉 올라가는 시간, 초로(初老)의 나이에 접어든 세잔느의 느린 발걸음이 느껴진다면 그 길 또한 지루할 수만은 없다.

세잔느의 아틀리에

세잔느의 아틀리에 입구

이십 대, 고향과 가족을 떠나 파리행 기차에 탄 세잔느는 인상주의라는 혁신적 화풍과 만나 급속도로 빠져들지만 수줍고 어두운, 그리고 본의 아니게 무례해 보이기도 한 그의 비사교적 성향으로 인해 파리에서의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그 당시 세잔느의 그림은 침울하고 고독했다. 이런 생활에 점점 염증을 느낀 그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프로방스로 돌아온다. 고향의 품에 안기자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느낌과 영감을 자유롭게 펼쳐갈 수 있었다. 엑상프로방스가 안겨준 평화의 선물은 그 어떤 화가도 이뤄내지 못한 풍경화의 새로운 해석이었다. E.H 곰브리치(E.H. Gombrich)가 펴낸 『서양미술사』에서는 세잔느의 실험적 작업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세잔느는 그가 알고 있었거나 배운 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느낌 인상에 따르고 그가 본대로 형태와 색채를 그리고자 했다. (…) ‘자연을 본 따서’ 그림을 그리고, 인상주의 거장들이 발견한 점들을 활용하고, 푸생(17세기 프랑스 고전 미술의 대표화가)의 미술을 돋보이게 한 질서와 필연의 감각을 되찾는 것이었다. (…) 절망에 가까운 고심을 했고 화폭에 매달려 고되게 일했으며 실험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등 놀라울 것이 없다. 진정 놀라운 것은 그가 성공을 거두었으며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작품 속에서 이룩해냈다는 사실이다.

세잔느의 아틀리에

줄 서서 입장할 정도의 유명세를 갖는 아틀리에는 각 층이 열 평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2층짜리 집이다. 베이지색 벽에 핑크색과 파란색 창틀로 장식된 간결하고 소박한 돌집. 좁고 낡은 계단을 올라가면 사방이 훤한 창문으로 뚫려 나무와 산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방 한 칸이 나온다. 그곳이 바로 근대 미술사를 흔든 세잔느의 작업실이다. 그가 입던 코트와 재킷, 물감이 그대로 달라붙은 화통과 붓들, 먼지를 뒤집어쓴 물 잔과 와인병, 쾨쾨한 벽난로와 병풍, 부서질 듯 낡은 사다리와 구겨진 종이들. 카메라를 꺼내는 시늉조차 할 수 없는 엄격한 통제 아래 관광객들은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이 비좁은 공간에서 조금이라도 더 화가의 ‘과거’를 느끼기 위해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세잔느의 아틀리에

이런 현상은 실내를 벗어나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건물 앞과 옆쪽에 펼쳐진 아담한 오솔길은 그저 키 작은 나무들과 흔한 흙바닥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마당에 불과하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몇 걸음 걸어 보고 나무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해가 좋은 날이라면 더없이 행복한 경험이다. 그러나 아틀리에를 릵아보고 나면 그 다음 욕심이 생긴다. 그의 생애 최대의 역작 속 주인공이자, 1880년대 중반부터 그의 마지막 시간까지 곁에서 머물며 정신적 예술적 안식처가 되어준 생트 빅트와르(Sainte-Victoire) 산. 그림으로만 보아온 대상을 실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생트 빅트와르 산

18킬로미터에 걸쳐 프로방스 남부를 넓고 높게 드리우고 있는 생트 빅트와르 산은 전형적인 석회암 산이다. 그를 중심으로 띄엄띄엄 자리 잡은 작은 마을들 사이에는 구불구불한 좁은 길이 나 있는데 어떤 방향으로 틀어도 회색빛 돌산의 웅장한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거대한 병풍과도 같다. 해의 강도에 따라, 구름 모양에 따라, 하늘의 색과 나무의 밀집 정도에 따라 이 산이 보여주는 모습은 수백 수천 가지다. 그리고 세잔느는 그 속에서 자연의 깊이와 굳건하고 강직한 삶의 섭리를 발견했을 것이다.

“자연은 겉으로 드러난 표면에 있지 않다. 자연은 저 깊은 곳 어딘가에 있다. 색깔은 표면 위에 드러난 깊이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뿌리로부터 시작된다.” - 폴 세잔느

50대로 접어들며 당뇨병에 걸린 세잔느는 다시 사람 기피증에 시달렸고, 성격은 더욱 우울해졌으며 그림 작업에도 문제가 생겼다. 그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실상 은둔자의 생활로 들어간 것이다. 반 고흐와는 달리 이미 생전에 화가로서의 명성과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그는 여전히 방황했고 예술적 해법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그럴 때면 생트 빅트와르 산에 올랐다. 깊은 산속의 오두막집 하나를 빌려 그곳에 거주하기 시작한 세잔느는 자신의 감성과 눈을 빌려 이 거대한 산을 그려댔다. 빛을 표현하고 색을 입히고 거리감을 주고 입체감을 살리며 수많은 그림들을 완성해냈다. 세잔느의 그 어떤 정물화보다, 또 자화상과 인물화보다, 말년에 완성한 풍경화들 속에서 그의 따뜻한 면모와 화가로서의 실험 정신은 더욱 깊게 다가온다. 자연에 한 발짝 더 가까이 갈수록 인간은 조금씩 더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 오르고 내리는 산길에서 어느 순간 생트 빅트와르 산이 훤한 모습으로 눈앞에 등장했을 때 가슴 어딘가가 고요하게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는 것과 같을 것이다. 백여 년 전의 세잔느가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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