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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만화가 고우영

『고우영 이야기』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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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딱 한 달만 이 나라에 부정부패가 정지한다는 상상이 실현된다면 그 당장 대한민국의 국력은 어느 정도로 막강해질까? 상상을 해본다.” 고우영 선생의 약간 ‘엉뚱한’ 상상이다.

최근 출간되거나 다시 나온 관련서 두 권이 이 글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만화가 고우영(高羽榮, 1938-2005) 선생의 광대무변한 작품세계를 두루 살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관련서를 앞세운 이 글은 변죽을 울리는 셈이다.

씨네21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이 함께 펴낸 『고우영 이야기』(고우영 외 지음, 2008)는 얼핏 자료집을 떠올린다. “이 책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고우영 만화: 네버 엔딩 스토리> 전시를 계기로, 아르코미술관과 씨네이십일(주)의 공동기획으로 제작되었”다.

1장 ‘해석 | 고우영을 읽다’는 만화평론가와 전직 기자들의 작가론과 작품론을 싣고 있다. 2장은 전시회의 전시 작품 내용과 고우영 선생에 대한 전시회 참여 작가들의 글을 담았다. 3장 ‘연대기 | 고우영 이야기’는 전시와 관련해 진행한 고우영 선생의 가족과 지인들의 인터뷰를 발췌했다.

그는 한마디로 천재였다. 먼저 그의 부인 박인희 여사의 ‘증언’이다. “주변에서 천재라고 이야기들 하는데 정말 천재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할까.” 그는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노력형이 아니다, 천재성이 95%이고 나머지 5%의 노력만 한다.” 전문가의 시각이라고 이와 다를 리는 만무하다. “참 놀라운 천재적인 작가다.”(만화가 박재동)

하지만 우리는 고우영의 천재성을 겨우, 가까스로 알아보게 된다. 그의 재능이 만개한 1970년대는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엄혹한 시절이었다. 특히 하급 불량 매체로 낙인찍힌 만화는 만 가지 악의 근원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만화에 대한 검열의 서슬 또한 시퍼렇기 짝이 없었다. 만화가 이상무는 가혹한 검열이 있었던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그때 아동만화의 사전검열은 도서잡지윤리위원회에서 담당했는데, 심지어 고려시대 때 관창이 벽화에 활을 쏴서 사슴을 잡는다 했을 때 동물 사체에 화살이 박힌 장면을 표현 못 하게 했었다. 그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대가족 제도라서 한 방에 어머니, 아버지 같이 자게 되지 않나. 내가 『비둘기 합창』이라는 만화를 그렸는데, 남녀칠세부동석이라며 한 이불에 큰누나하고 남동생을 같이 못 자게 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권투 장면은 심할 경우, 두 장면 이상 못 그리게 했다고 한다. 그런 제약을 가한 이유가 걸작이다. “너무 잔인한 장면이 오래간다는 이유로. 사실은 복싱은 TV에 방영하면 피가 튀고 했는데 만화에서 검은 먹물 조금 뿌려 피가 튀기면 잔인하다고 했다. 표지의 경우 총을 정면으로 들이대도 안 되고, 하여간 그 정도로 검열이 까다로웠다.”

고우영 선생은 스포츠신문 만화 연재를 통해 극화만화로는 최초로 사후검열의 혜택을 누린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만화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만화연구가 김낙호는 “인간사와 그것의 진득함 그리고 해학”을 고우영 만화의 열쇠말로 압축한다.

“고우영은 오랜 활동과 많은 작품을 통해서, 매력적인 캐릭터로 진득한 인간사를 해학적으로 풀어나가며 한국 만화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또 김낙호는 다음과 같은 장담을 서슴지 않는다. “그가 남긴 것들의 매력은 지난 30여 년 동안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았음이 이미 증명되었다.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그럴 것이다.”

《한겨레》 기자를 지낸 이상수는 “고우영이 한국 만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만화의 극한은 어디에 있는지를 탐구하는 이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라고 진단한다. 잡문가 이명석이 보기에 “그가 지내온 시대의 무게를 되돌아보면 분명 고우영은 가궺운 사람이었다. 혼자서 무척 재미있게 놀았다.”

하지만 “그 시대가 아무에게도 주지 못한 것들을 날름 받아먹은 뒤, 열 배 스무 배의 즐거움으로 뻥튀기해서 사방에 뿌려댔다. 가벼웠기 때문에 자유로웠고, 자유로웠기 때문에 열심이었다. 좀 더 자유로워진 이 시대가 오히려 깨닫지 못하는 일탈과 잡기의 즐거움이 그가 남긴 수많은 글과 그림에 오롯이 남아 있다.”

만화평론가 박인하는 “고우영 만화로 이후 한국 대중문화에 서사의 힘이 각인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의미 부여가 못 미덥다면, 1970년대 국내외 만화나 영화와의 비교검토를 권한다. “실증적이고 체험적인 비교는 고우영 만화의 위대함에 기꺼이 동의하게 할 것이다.”

연대기에 사진으로 수록된 문헌자료 두 개는 “출처 불분명” 표시가 돼 있다. ‘우리는 닮은 꼴-아빠가 최고’의 전거는 출처가 불분명한 매체의 사진 설명글로 미뤄 볼 때 「팔비당」을 연재한 《소년생활》이 아닌가 싶다. “아빠가 「팔비당」 연재를 중단하고 미국에 가 계신 6개월 동안이 나에겐 그렇게 지루하고 속상할 수가 없었어요.”

‘한국 만화가들의 감동적인 인생 이야기’를 부제목으로 하는 장상용의 『나는 펜이고 펜이 곧 나다』(크림슨, 2008)는 두 권이었던 『한국 대표 만화가 18명의 감동적인 이야기』(2004)를 한데 묶어 다시 펴낸 것이다. 우리 만화작가론 개정판의 제목이 바로 고우영 편이다. 장상용은 우선 고우영의 천재성에 주목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재형 만화가라고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전문적인 미술 공부를 한 적도 없고, 미술대학을 다니지도 않았고, 스승을 두고 도제 생활을 한 적도 없는 데다가 술고래에다 늦잠꾸러기이다. 이런 그를 천재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아이디어와 그림 실력으로 한순간에 해치우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고우영 이야기』에 나온다. “고형은 그 당시 신문사에서 짤막한 만화나 삽화도 그리고 했는데, 신문사 직원이 원고를 찾으러 시내에서 출발했다는 연락이 오면 어디쯤 왔는지 체크를 하는데, 이 사람은 중간에 오고 있는데 그림은 아직 시작도 안 하고 있다가 신사동쯤 거의 다 왔다 싶으면 책상에 앉아 삽화를 그렸다.”

고우영, 신문수, 윤승운이 서울 강남 역삼동에서 한 3년 정도 같은 작업실을 썼다. 신문수의 회고가 이어진다. “얼마나 빨리 착착착 그리는지 옆에서 보고 있으면 저 양반이 저것을 급하게 그리지 않고 책상에 앉아 차분히 그리면 얼마나 더 잘 그릴까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고화백의 필치나 이런 것이 그렇게 빨리 그릴 때 더 순발력이 있고 좋았다.”

장상용은 고우영 선생이 “나도 한때는 왕처럼 살았수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일제 말기 만주에서 태어난 고우영 선생의 집은 매우 풍족했다. 경찰 출신인 그의 부친은 양복점을 열어 떼돈을 번다. 그러나 해방을 맞고, 또 고국으로 귀환하면서 그 많던 재산을 잃는다. 집안을 추스를 기회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 가족이 남쪽으로 와보니 일제 시절, 경찰 쪽에 몸담고 있던 아버지의 동료 상당수가 대한민국의 내무부 간부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옛 정을 생각했던지 아버지를 반기며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해왔지만, 심한 죄책감을 느낀 아버지는 한사코 마다했다. 한때 조국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이 무슨 낯으로 나라를 위해 일을 하겠느냐며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서취향이 다르듯이 책을 읽는 스타일 또한 사람마다 다 다르다. 나는 재독, 삼독을 하지 않는다. 어떤 책이라도 그저 한번 읽고 만다. 지금까지 두 번 읽은 책은 꽤 드물다. 세 번 넘게 읽은 책은 거의 없다. 그런데 고우영 선생의 『대야망(전5권)』(어문각)을 적어도 네 번은 독파했다.

그러니까 이번에 『대야망(전6권)』(학산문화사, 2000)을 읽은 게 최소한 다섯 번째는 된다. 나는 『대야망』을 읽었다고 했다. 고우영 선생의 작품은 단순한 만화가 아니다. 글자가 많은 학습만화와도 구별된다. 그의 작품은 잘 빚은 한 편의 문학작품이 부럽지 않다.

2000년판 『대야망』의 완성도가 다소 아쉽다. 시정잡배들이 휘두르는 칼끝을 지운 건 과한 배려 같다. 일부는 흉기 전체를 그대로 놔뒀으니 말이다. 한두 군데 불일치한 대목도 있다. “그는 자기 친구 일곱 명을 데리고 오더니”(4권 117쪽)에서 대장간 꼬마가 데려온 친구는 여섯 명이다. 2000년판 『대야망』은 절판되었다. 완성도 높은 새판을 기대한다.

나는 『삼국지』를 고우영판으로 읽어도 된다는 쪽이다. 아직 읽어야 한다고까지는 못한다. 그러고 싶지만. 이런 얘기 필설로는 처음 한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우영의 작품을 잘된 문학 못잖은 예술로 대접하는 데 주저했다. 왜 그랬을까? 확신을 하기 어렵고 혹여 ‘쪽팔리진’ 않을까 걱정해서겠지. 그러나 이젠 아니다. 앞으론 떳떳하게 말하련다.

『대야망』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몇 권 안 되는 책 중 하나다. 뒤늦은 나의 고백은 만화가 홍승우의 도움이 컸다. 그런데 홍승우의 「<대야망>, 소년에게 불을 지피다」에는 사소한 실수가 보인다. 『대야망』이 “단행본으로 묶여 계몽사의 클로버문고 시리즈로 발간되었”다고 했는데, 클로버문고를 펴낸 곳은 어문각이다.

어문각은 어린이잡지 《새소년》의 발행처였던 까닭에 클로버문고 목록은 《새소년》에 연재된 만화가 적지 않았다. 그런 예로 『대야망』과 김삼의 『사랑방 이야기』와 이원복의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을 꼽을 수 있다.

『대야망』 외에 여기서 거론하는 고우영의 두 작품은 공교롭게도 작가 스스로 인정하는 실패작이다.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주인공을 보좌하는 ‘파스파르트’의 모습을 나 닮게 했던 것이 생각난다. 작품의 흐름이 아동적이고 무엇보다도 구미를 비롯한 타국에 나가 있는 독자들을 실망시킨 것이 패인일 것이다.”

이상무의 지적처럼 만화의 주인공은 만화가를 닮게 마련이지만 “고 선생님은 한마디로 자기 캐릭터, 만화 속의 캐릭터가 바로 자신이다.” 『삼국지』의 유비가 그렇고, 『수호지』의 무대가 그렇다. 무대는 고우영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파스파르트는 좀 많이 나간 듯싶다. 그래도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나쁘지 않다. 어린이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손오공 이야기는 좀 더 잘 만들 수 있었지만 그때 나는 오장원에 쓰러졌던 제갈양처럼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토하고 뻗어버렸던 시절이라 하루하루의 원고를 보내기에도 필사의 노력을 경주했어야만 했다. 펜대를 들어올릴 기력조차 쇠잔해서 대략 30커트쯤 되는 그림을 아침부터 시작해 쉬엄쉬엄 오후 너댓 시가 되어야만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서유기』 역시 나름대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사오정의 어벙한 캐릭터와 SF적 요소를 가미한 게 인상적이었다. 고우영 각색의 중국고전 판타지랄까. 『고우영 이야기』에 실려 있는 근거가 빈약한 비난에 맞서는 선생의 논리적이고 차부한 반박문은 아주 멋지다. 하지만 그는 예의 언제 그랬냐는 듯 “낄낄” 하며 글을 맺는다.

아무개 씨, “우리 다같이 한국의 만화 붐을 일으키고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에 도우며 삽시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를 재출간한 자전 에세이 『구름 속의 아이』(자음과모음, 2007) 또한 읽을 만하다. 반박문에 나타난 “극화만화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만화형식을 통한 소설’”이라는 그의 지론을 실감하게 한다.

박재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을지문덕』을 고우영 선생의 최고작으로 꼽는다. 내게도 나만의 고우영 만화가 있다. 어린이잡지 만화별책부록 크기와 분량의 해태유업 홍보책자에는 고우영 선생의 단편만화가 실려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내 또래의 아마추어 어린이 마라토너는 달리며 이런 말을 되뇐다.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내 가슴에 팍 와 닿았다.

“더도 말고 딱 한 달만 이 나라에 부정부패가 정지한다는 상상이 실현된다면 그 당장 대한민국의 국력은 어느 정도로 막강해질까? 상상을 해본다.” 고우영 선생의 약간 ‘엉뚱한’ 상상이다. 나라의 국력이 강해지는 것을 떠나서 단 하루만이라도 이 나라에 부정부패가 없다면 얼마나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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