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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영화처럼 보는 고전 명장면>을 시작하며

고전에 대해 여러 세계적인 작가들이 정의를 내렸으니까 감히 한마디 덧붙이는 무모한 일을 꿈에라도 하고 싶지는 않고 그저 이 한마디만은 고전에게 바치고 싶다 “위대한 생각이 위대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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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나는 집안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덜떨어진 애 취급을 받았다. 별명은 까마귀였는데 피부색이 까맣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을 듣는 순간 즉각 잊어버리는 신기한 재주 때문에 그런 별명을 갖게 되었다. 임신 중에 오골계를 지나치게 먹어서 피부가 까만 딸을 낳은 게 틀림없다고 한탄하던 우리 엄마는 늦게나마 딸이 백옥 같은 피부를 갖도록 수제비, 칼국수, 라면을 주로 먹였고 또 다른 한편 아이의 의심스러운 지능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종합병원에 가서 아이큐 검사를 받게 했다. 내가 종합병원에서 받았다는 아이큐 검사란 게 뭔지 통 아리송한 게 그 검사를 치를 당시 나는 한글도 숫자도 몰랐기 때문에 무슨 시험을 어떻게 치를 수 있었는지 신만이 아실 거다. 게다가 더욱 미스테리어스한 것은 그 결과 나는 놀라운 지능의 소유자로 밝혀져 그때부터 대기만성이란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듣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나는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일 학년 첫 받아쓰기 시험 때 내 이름 석자를 쓰지 못해서 짝꿍의 이름을 컨닝해서 냈다가 선생님께 야단을 맞고는 어른들의 세계란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깨닫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정말로 모르는 게 없구나, 내가 은밀히 행한 컨닝을 눈길 한번 안 주고도 알아채다니. 그 이야기를 오빠한테 고백했더니 오빠가 깊은 한숨을 쉬면서 이름 말고 또 다른 건 뭘 베꼈냐고 묻던 기억이 난다. 부모의 이름도 베낀 것 같다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학년이 되었더니 내가 일등을 했다고 선생님이 무등을 태워줬다. 무등을 태우고 우리 집에까지 왔던 것 같다. 우리 집에선 역시 대기만성이 맞구나, 옛 성현들의 지혜는 그른 게 없다고 좋아했다. 정작 나는 심각했다. 컨닝도 안했는데 어떻게 내가 일등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부터 고독은 시작되었다. 말 못 하는 고민 때문에 나는 집안을 빠져나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나는 거의 매일 두 코스를 달렸다. 하나는 학교 운동장, 하나는 겨울이면 미끄러지지 말라고 늘 연탄재를 뿌려두던 지독히 가파른 언덕. 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동안 서서히 해가 지고 완전히 어둠이 내리면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없는 뭉클한 기운이 밀려오고 심장이 뛰었다. 아직 어린 여자 아이의 조그만 입으로도 아름답다 조아리며 멈춰 서서 지켜볼 때 이미 아름다움은 육체적 감각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나는 달리는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언덕을 달리는 것은 좀 더 힘들었지만 오랜 연습 끝에 꽤 긴 언덕을 단숨에 뛰어오를 수 있게 되었다. 언덕 정상엔 거대한 보름달 대신 그보다 유혹적인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렇게 뛰고 난 다음 구멍가게의 온갖 식품들, 우유, 보름달 빵, 두부, 빗자루, 쓰레받이, 고무장갑, 세탁비누 같은 것을 천천히 구경하다 보면 이제 집에 갈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어서 집에 돌아갔다. 그때 구멍가게의 물건들이 언덕 밑 나의 집으로 끌어주는 나만의 중력이었다.

“중력의 힘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게 아니다. 중력은 오히려 행성들이 자기 옆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려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의 이 명언이 나는 시라고 생각한다.

달리고 나서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갈 때, 이런저런 간판을 보는 것과 열린 대문 안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 집 안에서 들려오는 악다구니와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 피아노 소리를 듣는 것. 개 짖는 소리와 전봇대, 모퉁이 그리고 맨 끝 나의 집 대문을 밀고 들어가기까지 모든 감각이 하나로 합쳐져 만족감이 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100미터 달리기 실력이 13.4초를 주파하고 나서 무협의 세계엔 ‘하산’이란 전문용어가 있단 말을 듣고 달리기를 그만뒀다. 그러고 났더니 시간이 남아 돌았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나의 지배적인 이미지. 아직도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미지. 높은 마루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며 빨래줄 너머로 무슨 일인가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이미지는 그때 만들어졌던 것 같다. 나는 텔레비전, 대중스타, 성적에 무관심했다. 공부에 관한 한 나의 철학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가 아니라 ‘공부가 가장 빨랐어요.’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기왕 해야 할 공부라면 수업 시간에 다 해치우자, 수업 시간 외에 공부하는 일은 없도록 조심하자.’라고 결심을 하고 나자 나는 전교에서 가장 모범적인 학생으로 소문나게 되었다. 엄마가 항상 질풍노도의 시기, 반항의 사춘기를 열정적으로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 나라도 꾹 참고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결심해서 남는 시간은 주로 집에서 보냈다. 한가하게 다리를 흔들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기억할 게 없을 것 같은 그 시기, 내 인생에 유일한 총천연색 미감을 부여한 게 있었다면 그건 분명 책일 것 같다. 달리기 때문에 고독에 대한 내 관념은 남들과 달랐다. 고독은 발을 흔들 수 있는 시간이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길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었고 상쾌한 쾌감이었다. 13초대의 달리기 실력, 허공에서 크게 한번 날갯짓하는 우아한 새 같은 넓이뛰기 실력으로 나는 체육에 관한 한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파였는데도 이상하게도 발야구나 족구 같은 단체 운동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나는 원시와 야성, 고독을 테크닉과 조직보다 사랑한다고 말하고는 모든 종류의 단체 운동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체육 시간 전날이면 서점에 가서 얇은 문고판 책 한 권을 사고 엄마의 커다란 팬티를 한 장 빼돌렸다. 체육 시간엔 체육 선생의 작고 예리한 눈을 피해 엉덩이와 헐렁한 엄마 팬티 사이에 문고판 책을 끼워 넣고 그 위에 체육복을 입고는 운동장에 나갔다.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친구들이 편을 가르고 공놀이를 시작할 때 나는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엉덩이의 책을 꺼내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기 전에 항상 운동화로 나무 그루터기 밑 흙을 몇 번 파헤쳤다. 동물들만 영역 표시를 하는 건 아니니까. 그 당시 나는 충분히 미개했지만 그래도 겨울날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눈이 햇볕에 반짝이는 찰나 읽었던 문장들, 단풍이 소리 없이 책장위로 떨어질 때 읽고 상상했던 장면들이 언젠가는 나를 인간의 세계로 이끌어줄 거란 예감을 갖게 되었다. 백 미터 달리기 직전, 몸을 구부린 스타트 준비 동작, 그것이 그즈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동작이었다.

아직 이효리가 유고 걸이 아니었던 시절, 그렇게 나는 ‘엉걸’이 되었고 아직도 엉덩이의 힘을 믿는다. 세상의 어떤 자리에 앉더라도 결국은 자신의 엉덩이로 앉아야 하는 거니까.

그렇게 읽은 책이 대개 고전이었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책이 엉덩이에 숨기기에 좋았냐? 즉, 사이즈의 문제가 나의 독서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 시절 대략 5년 정도 걸쳐 읽었던 고전을 나는 옛날 영화들처럼 기억한다. 배경이 되었던 역사적 사건이나 주제 의식은 잊어버렸더라도 몇몇 장면들만은 또렷이 기억한다(우리가 영화를 기억할 때 흔히 그러듯이). 그 부분들을 책에서 잘라낸다면 내 어떤 날들이 피를 흘릴지도 모르겠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기억나는 장면 중 대부분의 것들을 당시의 나는 겪지 않았었는데 지금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그 일들 많은 것을 어느 틈에 겪어냈다는 것이다. 고전에 대해 여러 세계적인 작가들이 정의를 내렸으니까 감히 한마디 덧붙이는 무모한 일을 꿈에라도 하고 싶지는 않고 그저 이 한마디만은 고전에게 바치고 싶다 “위대한 생각이 위대한 사건이다.” 나에게 있어서 고전은 사건이 위대한 책이 아니라 그 사건을 마주친 인간들의 반응이 위대한 책이다.

앞으로 연재할 글의 제목은 <옛날 영화처럼 보는 고전 명장면>인데 연재에 앞서 고전을 (포함한 책을) 왜 읽어야하는가? 짤막하게 이야기해보고 싶다.

언젠가 지나치게 명민한 내 후배의 옆얼굴을 눈동자로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던 일이 있다. “너는 마치 두 번째 인생을 사는 애 같구나.”

그때 내 마음속의 완벽한 문구는 이것이었다.

그래서 세계는 두 번 진행된다.
한 번은 우리가 그것을 보이는 그대로 보는 순간.
두 번째는 그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전설로 새겨지는 순간.


나는 언제나 세계는 두 번 진행된다는 말이 나의 방법론이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두 번째야말로 우리의 어떤 욕구를 설명한다. 더 배우려는 욕구, 읽으려는 욕구, 쓰려는 욕구, 골똘히 생각해보려는 욕구. 규명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욕구. 그러고 보면 읽고 쓰고 배우는 것이야말로 한 번뿐인 인생의 쓸쓸한 일회성, 혹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내려는 ‘의지’와 관련된 문제 같다. 언제나 몹시 강하고 매혹적인 말 ‘전설’은 이렇게 바꿔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정신이 꿈꾸기를 계속한다면 잃어버릴 것은 없다. 두 번째 세계, 전설, 꿈꾸기. 이 단어들은 모두 같은 생각으로 나를 이끈다. 매순간 우리는 미래의 자신이라는 생각이다. 만약 우리에게 세계가 한 번만 진행된다면 (우리가 보이는 그대로만 보는 데서 멈춘다면) 우리는 매순간 과거의 자신이다. 확실히 우리는 한 몸 안에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갖고 있다. 한순간에도 과거와 미래를 산다.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기를 원한다면, 내가 좀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미래는 좀 다르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뭔가 읽고 써야 할 춰이고 그 과정에서 빼놓지 않고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이 고전인데, 어떤 고전이 지금의 우리에게 적합한 대화 상대인가는 너무나 상대적인 것 같다. 이번에 강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였던 『사토장이의 딸』의 지은이 조이스 캐롤 오츠는 고전과 현대문학을 골고루 섞어 읽는 게 가장 좋은 독서법이라 했는데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청춘의 정체성 문제를 예를 들더라도 『데미안』이나 『토니오 크뢰거』 같은 책을 한 축으로, 『영화처럼』이나 『나는 공부를 못해』 같은 책을 한축으로 함께 읽은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쨌든 정말 좋아하는 책을 만나는 것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살갗을 부비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똑같은 쾌감을 줄 테니 놓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린 모두 지독한 쾌락주의자로 사는 시기를 겪을 테니까.

이 글을 쓰다 보니 며칠 전 내가 꾼 꿈 하나가 생각이 나는데 여러분에게 꼭 물어보고 싶다.

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꿈을 꾸었다. 꿈속의 나는 어떤 낯선 도시의 영상 자료 보관실의 어둠 속에 혼자 앉아 있었다. 가느다랗고 희미한 불빛 한 줄기가 먼지와 엉켜 떠돌고 화면엔 내가 읽다 버려둔 책들의 읽지 못한 마지막 장면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했던 마지막 문장들이 마치 오래된 영화의 장면들처럼 지지직거리는 거친 음향을 내며 흑백 필름 속에 흘러가는 장면은 꿈속의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꿈속에서 마지막 문장들은 끝이 없었다.

여러분도 갑자기 마지막 문장이 궁금했던 적이 있는가요? 마지막 문장 때문에 첫 문장을 다시 읽은 적이 있는가요?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끝난 그대로 긍정하고 싶은 게 있는가요? 혹은 끝난 데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적은요? 거대한 긍정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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