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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김제]향수와 우수, 군산에의 기억 - 고은

내가 군산에 가는 것은 부모의 무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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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모르는 그곳 사람들의 언어 속에 남은 고향의 운율을 귀 기울여 듣는 일 때문이다. 이제 고향은 향토가 아니라 도시의 구조물로 바뀌었다. 다시 한번 도시는 나의 외국이고 타자이다.

내 고향 군산도 여기에 해당했던가.

도시는 ‘외국’이었다. 도시는 전근대의 삶을 파괴하거나 흡수하는 낯선 ‘외국’의 힘이었다. 전체 인구 구 할 이상이 왕이 살고 있는 도읍 밖의 농촌 자연부락에서 몇천 년을 살아온 백성의 삶에 갑작스러운 타자가 나타난 것이 근대이고 도시였다.

고대 성읍(城邑)국가의 성읍이란 얼마나 소박한 것이던가. 그 이래의 목(牧)이나 군현(郡縣)의 홍살문 안의 건물이나 향교 따위를 제외하면 명문가의 고대광실도 결코 오랜 농촌취락 안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이런 전통 농경사회가 만난 도시의 얼굴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문명의 공룡인가를 실감하게 될 줄은 미처 알아차릴 수 없게 신기한 대상이었다. 오스카 와일드가 시골에서는 누구나 착해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비단 서구의 전원 풍경 속에 그려지는 시골 사람의 순박만을 나타내지 않고 한국의 도시 밖의 농촌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하지만 한국의 도시들은 서구의 도시들이 고대 도시국가나 중세 교권(敎權)도시의 전통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한국의 도시는 바로 근대 자체의 발단이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근대화는 곧 도시화로 작동된 것이다. 이런 충격은 우선 시골의 농촌사회가 도시의 우월성에 고개를 숙이는 일과 피폐한 농경시대의 나락을 벗어날지 모른다는 삶의 환상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시가 주요 건물과 도로를 만들어놓으면 거기에 눌어붙는 부도심 또는 변두리와 교외 취락지대가 에워싸게 된다. 도시는 인류의 시궁창이라고 외치거나 도시는 콘크리트 정글이다라고 외치거나 아니 도시는 인간동물원일 수밖에 없다고 외치거나 해도 그럴수록 그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집산을 막을 수 없다.

나날이 도시는 대도시의 욕망을 실현해왔다. 육백 년 도읍의 한양-한성-경성-서울의 초상을 돌아보면 사대문 안의 그 도성이 오늘날 한강의 남과 북으로 자신의 영역을 쉴 새 없이 확장함으로써 이른바 수도권 전체를 아우르고 한반도(남한) 전역에 대한 중앙집권주의를 달성하는 것으로도 그 커다란 욕망은 아직 식지 않고 있다. 그래서 수도 이전 공작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내 고향 군산항은 차라리 식민지시대의 활력을 추억하는 정체된 도시로 상당한 시기를 지탱했다. 인구 증가가 멈춘 경험도 무릅썼다. 아직껏 일본식 절 건물이 남아 있고 일본식 주택과 세관, 병원 창고 따위의 건물 잔재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문화적 의의에 앞서 그 시대를 온전히 넘어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낼지 모른다.

하지만 군산 역시 이전의 군산이 아니다. 내 스무 살 무렵까지의 고향인 군산의 정서적 흔적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군산 교외가 새로운 번화가가 되고 새로운 주거지가 되어버렸다. 또한 군산항도 내항이라는 퇴락한 어선 계류지 말고 바다를 메운 광대한 외항이 따로 군림하고 있다. 실지로 내 어린 시절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노래섬 따위는 이제 그것이 어디쯤인지 알 길이 없다.


군산이라는 이름은 많은 구릉들이 이어져 있거나 흩어져 있는 상태를 그대로 표현한 이름이다. 이것은 육지만이 아니라 바다 위의 여러 섬들도 그렇게 ‘군산’으로서 널려 있는 것을 포함한다. 그런 섬들의 하나로 무인도 노래섬이 있었다. 겨울 서북풍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그 섬의 소나무나 바위나 벼랑들이 마치 통곡하거나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 소리가 유난히 마음 깊쳀 박힘으로써 그 섬 일대의 어부들이 노래섬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서북풍의 풍랑으로 많은 난바다와 연해 어선들이 전복되면서 그 어부의 원혼들이 겨울바람 속에서 노래하는 것으로 여긴 나머지 그것을 섬의 이름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노래섬이 내 고향에 있다는 것 때문에 내가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여긴 적이 있다. 그래서 내 시 「노래섬」을 해외에 초청되는 낭독회에서 자주 읽기도 한다.

바로 이 노래섬뿐 아니라 1950년대 초 1?4후퇴 당시 내가 아버?를 따라 부산을 목적지로 하고 피난하던 중에 기착한 비응도도 지금은 육지가 되었으며 거기서 더 나아가 머물렀던 고군산 선유도 역시 언제 육지로 될지 모르도록 고향의 자연 변화는 놀랍기 짝이 없다.

나에게 군산은 꿈이었다.

어머니는 충남 장항에서 가마 타고 군산으로 건너오는 배에 그 가마가 태워져 시집왔다. 군산에서 십릿길의 두메인 아버지의 집으로 가마 안에서 엉엉 울면서 시집온 것이다. 그 뒤 장항의 외가 전체가 군산으로 이사해와서 교외 오룡동에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나는 외삼촌이 우리 집에 오면 그의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군산의 외가에 가서 며칠씩 지낼 수 있었다. 외가 마을의 마루턱에 서면 군산항 일대의 전경(全景)이 바라보였다. 그런 군산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오랫동안 잠겨 있는 농촌의 적막한 나날이었다. 밤 소쩍새 소리와 여름날의 매미, 쓰르라미 소리 그리고 비 오는 날의 멈출 줄 모르는 뻐꾸기 소리뿐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군산에 갔다. 절반대중의 개바위부터 이미 내 가슴은 설레었다. 군산 시내―그 당시는 부내(府內)―명치정 소화통과 같은 일본식 이름의 도로를 지나 군산에서 가장 높은 삼층짜리 백화점 미나카이(三中井)에 들어갔다. 화려했다. 아버지는 점심때가 되자 청요릿집으로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었다. 그 짜장면 맛은 한 달이 지난 뒤에도 내 혓바닥에 남아 있었다. 또 아버지는 나에게 처음으로 책을 사주었다. 일본어의 소년잡지 《킹구(킹)》였다. 물론 그 잡지에는 일본 노기(乃木) 대장의 이야기는 있어도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있을 까닭이 없다.


군산은 식민지시대의 개항도시다.

고대에는 한 갯마을이었다. 마산 54국의 한 샤먼사회였다. 백제시대 마서량(馬西良)이었다. 고대 후기에는 옥구현(沃溝縣)이라는 서해안 변경의 한 지역이었다. 당연히 금강 입구이므로 당나라 군대와 백제군의 치열한 전투가 있던 곳이다. 오늘날에도 당나라 침략군의 총수인 소정방의 자취가 금강 연안이나 김제 부안에까지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니, 백제와 일본 연합군이 다시 한번 신라와 당 연합군과의 백강(白江) 전투를 한 현장이 바로 군산 일대였다. 이런 금강 하구 일대를 진포(鎭浦)라고 총칭했다. 고려 말 왜구의 군선 오백 척을 최무선의 화약 작전으로 침몰시킨 진포대첩 이래 이곳을 고려, 조선의 주목받는 국방의 요충으로 만들었다.

군산이라는 이름은 오늘날의 고군산군도 속의 선유도를 군산도라고 부른 것을 옮겨온 것이다. 선유도가 많은 봉우리의 섬들 중의 하나이고 그 섬 자체도 여러 봉우리로 이루어졌으므로 군산도라는 이름은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그 군산이 군산진으로 옮겨오고 그래서 새 이름 선유도가 그 섬에 붙여졌다.

군산은 나라 안의 역할로는 금강 일대의 전북 충남의 조세의 세곡선이 모여 있거나 경창(京倉)으로 실어가는 천 석 적재의 배 여섯 척을 거느린 진성창(鎭城倉―鎭浦倉)이었다. 그래서 군산의 속명은 군창(群倉)이기도 하다.

여기에 고려 이래 끊이지 않는 왜구와 중국 해적들에 대한 방어 현장으로서의 군대 진주의 진(鎭)으로도 활용되었다. 이런 군산이라 해도 주민 생활의 터전으로 보면 한 어촌이기 십상이었다. 바로 이 어촌지대를 일제는 이곳의 배후를 이루고 있는 비옥한 평야의 소출을 수렴하는 항구의 필요성에 눈떴다. 그래서 근대도시로서의 군산 개항이 실현된 것이다. 광무 3년이다.


군산 개항이 일제쟀 식민지 전략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 자체가 근대도시가 하나의 ‘외국’이라는 문명적인 지적 이외에도 정치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뿐 아니라 군산이 ‘쌀의 도시’ ‘쌀의 항구’로 불리는 것 자체가 그 쌀이 일제의 수탈에 의한 조선 농민의 피땀임을 간과하고 있다. 군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토지와 운송, 금융 등을 자신들의 의지로 전단하며 군산 일대의 농민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군산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고향 이름을 붙이거나 자신들의 왕 이름으로 거리와 학교 이름을 붙여서 살아가는 곳이었다. 국민학교도 명치국민학교였고 소화국민학교였다.

또 필리핀을 점령하는 대가로 일본의 조선 통치를 지지한 미국의 언론이 그 당시 조선 일대, 특히 군산 교외의 일본인이 개간한 간척지와 새 농지에서 조선인이 그전보다 잘살고 있다고 현지 취재로 강조함으로써 일제 식민주의를 국제적으로 선전해준 일도 있다. 그 새 농지들의 이름도 미야자키 농장, 구마모토 농장 그리고 후지 농촌(不二農村)이었다. 1943년 국민학교에 들어가 군산 시내의 극장에도 들어가고 일본인 교사의 인도로 신사참배도 해야 했다. 이미 내 이름은 일본 사무라이 이름답게 다카바야시 도라스케(高林虎助)였다.

이런 소년 시절의 나에게 군산은 내 꿈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더 분명한 것은 그곳이 외국이고 외국으로서의 일본이라는 사실이었다. 자동차는 겨우 몇 대만이 지나다니는 거리를 소가 모는 달구지가 지나가기도 하지만 일본 여인의 하오리와 게다짝 소리의 거리였고 국민복을 입은 일본 관리가 거들먹대는 거리였다. 그런 곳에 어느 날 해방이 온 것이다. 그 해방이 도둑처럼 왔든 거지처럼 왔든 그것으로 인해서 갑자기 하나의 도시는 외국으로부터 자신의 조국으로 바꾸어진 것이다.


나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일본인 교장, 내가 천황 폐하가 될 것이라고 말한 일로 퇴학 처분을 결정했던 교장이 쓸쓸한 약자로 떠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해방 뒤 새로 온 한국인 교장이 친일파라는 사실이 알려져 그 교장 배척의 동맹휴학에 앞장선 소년인 나에게 군산이라는 도시는 더 이상 꿈도 아니고 외국도 아니었다. 일본이 사라진 공간이 바로 나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해방시대의 나는 군산의 중학교 학생이었다. 군산 시내의 거리를 아무런 열등감 없이 걸어갈 수 있지만 일본인이 떠난 그 거리에 미군의 지프가 내달렸다. 군산 비행장은 이제 미공군기지가 되어 일본의 쌍엽비행기 대신 그라망 전투기가 날아올랐다.

그 뒤 전쟁이 일어났다.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김일성의 사진, 스탈린의 사진이 군산 시내 주요 건물의 현관 위에 걸렸다. 그러자 군산항은 북괴군의 군수물자 폭격을 위한 미공군 제트기들의 기총소사와 폭격기들의 폭탄 투하가 있게 되었다. 군산은 일제 식민지시대의 도시 능력을 잃어버렸다.

수복 뒤의 군산은 거의 폐허였다.

벽돌 조각 시멘트 조각이 나뒹구는 도시에 북한에서 온 피난민의 바라크들이 들어섰다. 평양냉면을 파는 판잣집과 미군부대가 먹다 버린 것을 얻어다 끓여 영양 만점의 꿀꿀이죽을 팔았다. 이런 전후의 잿더미에서 어설픈 국민주택이 하나 둘 들어서서 남아 있는 일본식 주택건물 사이에 뿌리박았다.


이제 군산은 1930년대 쌀의 항구에서 인간의 욕망이 허망으로 돌아가는 것을 토속과 해학이 근대의 이율배반으로 얽혀드는 채만식의 『탁류』의 소재가 아니다. 한국의 여느 도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보기 흉한 옥상의 돌출물이 공중에 나열된 그 아파트 단지가 군산이라고 예외일 수 없게 산등성이와 논밭들을 다 삼켜버렸다.

이제 군산이 더욱 도시적일 때 그 도시에는 인간의 얼굴들이 어영부영 떠돌지 모르나 인간의 영혼은 깃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군산이라는 도시가 무슨 중공업단지 무슨 자동차공장 무슨 산업단지 등의 초대형 사업들이 들어오고 새만금이라는 전초기지가 된다 한? 그 거대한 도시의 미래는 거대한 인간의 소외만이 예정되어 있을지 모른다.

도시! 그것은 삶의 환희의 장소인가. 욕망의 창고인가. 무덤인가. 아니 도시는 도시 밖의 모든 공간과 심상(心象)까지도 전부 자신의 영역으로 흡수해버리는 욕망체계인가. 나의 고향은 군산이다. 그러나 이런 고향은 내 기억 밖에서는 포항이나 여수나 인천과 다를 바 없다. 도시는 인간에게 고향 상실의 공간이다.

내가 군산에 가는 것은 부모의 무덤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그곳 사람?의 언어 속에 남은 고향의 운율을 귀 기울여 듣는 일 때문이다. 이제 고향은 향토가 아니라 도시의 구조물로 바뀌었다. 다시 한번 도시는 나의 외국이고 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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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 1933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고은 시 전집』『고은 전집』을 비롯해 수많은 저서를 간행했다. 한국문학작가상, 만해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대산문학상, 만해대상 등 총 14개의 국내외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대 초빙교수와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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