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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위로를 찾는다, 미술사학자 이주은

그림, 정답은 없다. 내 멋대로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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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그림을 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감수성으로 그림을 사랑한다. 또, 그림을 둘러싼 문화에도 관심이 많다.

‘이주은’이라는 미술사학자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빅토리아의 비밀』을 읽고 나서다. 빅토리아 시대의 그림들로 그 시대 여성의 삶을 읽어내는 책이었는데, 책 내용 외에 눈길을 끌었던 것은 대학에서는 언어학을 전공했고, 회사 생활을 3년 하다가 그만두고,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다는,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 있는 그의 이력이었다.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공부를 선택하다니. 스스로 고생을 선택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책 『그림에, 마음을 놓다』를 읽으면서 그 궁금증이 조금은 풀렸다. 얼핏 편안한 그림 해설서처럼 보이는 이 책에서 아름다운 그림보다 더 마음에 가는 건 삶의 고단함을 위로하는 따뜻한 손길이다. 그림 속에는 인간이 삶에서 희로애락이 때로는 전면에 드러나고, 혹은 이면에 감추어져 있다. 이주은은 그림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좀더 나은 내일을 살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글로 옮겼다.

삶의 연륜이라는 것은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가 힘들고 치열하게 인생의 터널을 통과했기 때문에 타인의 아픔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어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멋대로 추측해 보았다.


늦게 찾은 자기 길, 미술사 공부를 시작하다

그는 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그때는 대학생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로 여겨졌던 시대였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헤맨 거죠.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빠릿빠릿하게 살지 못했어요. 눈 깜짝할 사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어찌어찌 대기업에 취직해서 3년을 다녔어요. 그런데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때가 되어서야 진지하게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했는데, 미술사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학부에서 언어학을 배우면서 기호와 소통의 문제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이미지의 소통 문제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처음엔 광고를 공부해 볼까, 싶었어요. 그런데 이미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알타미라 동굴 벽화 같은 게 나오잖아요. 그래서 제대로 공부하려면 그림부터 해야겠구나 싶어서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남들보다 몇 년이 늦은 데다 학부 때와 전공이 달라 수업 따라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학부에서 이미 들은 수업을 그는 대학원 수업과 병행해서 들어야 했다. 3년 동안 정말 숨도 안 쉬고 공부만 했다고 했다. 영어로 보고서를 쓰는 일도 힘들었지만 다행히 이웃에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다.

“읽고 해석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글 쓰는 건 좀 힘들었어요.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이나 글 쓰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 그런데 집 근처에 할머니가 알래스카 맬러뮤트를 키우셨는데 산책시키는 걸 너무 힘들어하셨어요. 제가 개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매일 개를 산책시켜줬는데 할머니가 너무 미안해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내가 영어로 글을 쓰는데 문법이 많이 부족하다. 내가 쓴 글을 읽고 어색한 부분을 좀 고쳐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학교 선생님이셨어요. 무척 꼼꼼하게 글을 고쳐주시고, 논리적인 부분도 일일이 체크해 주셨죠. 운이 좋았어요.”

석사를 마치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양 미술사를 공부하는 데에는 당연히 한국보다는 미국이나 유럽이 더 유리하지만 3년 동안 있는 힘을 다해 공부만 해 와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다.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공부와 현실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회의마저 들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자 한국으로 가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취직이 하고 싶었어요. 고립되어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과 너무 멀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미술관에서 인턴으로 일했는데 그것도 꽤 재미있었어요.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을 때라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기도 했고요.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일에 몰입하고 싶었는데 다시 공부가 하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박사 학위를 땄고, 지금은 대학생과 대학원생에게 미술사를 강의하면서 이대 박물관의 학예연구원(큐레이터)으로 일하고 있다. 가르치는 일도 즐겁고, 연구하는 일은 적성에 맞고, 전시를 기획하는 일도 흥미롭다. 그렇지만 생활인으로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공부하는 건 여전히 즐거워요. 하지만 학교를 벗어나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죠. 내 나이에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고민이 될 때가 있어요. 아이는 크는데 아이한테 몰입해주지도 못하고, 가족한테 미안하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낮밤 없이 책에 파묻혀 살아야 하니.”


두 권의 책, 『빅토리아의 비밀』과 『그림에, 마음을 놓다』

첫 책 『빅토리아의 비밀』을 냈을 때, 의외로 그에게 에세이 쓰는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빅토리아 시대의 이야기를 좀 재미있게 글로 써서 알려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썼어요. 이 시대의 그림들이 의외로 심오한 구석이 있거든요. 시대 자체도 워낙 흥미롭기도 하고요. 그런데 일반인들은 빅토리아 시대가 19세기인 것도 잘 몰라요. 쉽게 어떻게 쓰나, 고민을 하다가 내 이야기로 시작하면 뒤에 있는 무거운 이야기도 좀 쉽게 읽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빅토리아의 비밀』을 읽고, 의외로 ‘에세이’에 재주가 있다는 평을 들었어요. 내 이야기를 쓴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 부분을 좀더 확대해 글을 써보라는 권유를 받았지요. 그래서 이번 책에는 제 이야기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키우는 반려견까지) 다 등장했어요.”

아이가 싫어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자기 이야기가 책에 나와서 좋아하더라’고 대답했다. 그가 쓰는 글의 강점은 평범함에서 나온다. 풍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감동적인 글로 엮어내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딸로, 아내로, 엄마로, 친구로 살아온 경험들은 독자들의 삶의 궤적과 나란히 포개진다. 삶의 고비고비마다 겪는 좌절과 분노, 체념와 같은 비슷한 심리적 위기들을 그도 겪었기 때문에 그의 위로는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기 고민을 털어놓는 독자들의 메일도 꽤 많이 받았다.

『그림에, 마음을 놓다』에 실린 글들은 먼저 신문에 연재되었던 것들인데요. 기사 말미에 제 이메일을 기재해 놓았어요. 그런데 독자들이 글을 읽고 메일을 보내왔어요. 그런 식으로 독자들이 반응을 보이는 것이 놀라웠어요. 글 잘 읽었다는 메일도 있고, 자기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도 있고 그랬습니다. 연구 논문을 쓸 때는 경험하기 힘들 일이었어요. 다행히 악플 같은 건 없었고, 위로가 되었다, 잊고 있던 꿈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는 메일이 많았어요. 다행이죠.”

책에 실린 그림들을 고른 특별한 기준은 없다. 다만, 수없이 많은 그림을 보면서도 유난히 ‘좋다’고 생각되는 그림이 있다. 그리고 왠지 계속 보고 싶어진다. 그런 그림들이 그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그래서 씌어진 글들이 『그림에, 마음을 놓다』다. 그에게 그림은 연구의 대상이자 위로의 대상이다. 그림을 연구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그는 그림으로 푼다. 한때 그림이 세상과 그를 고립시켰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 그림은 그와 세상을, 그와 독자를 연결해주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림, 정답은 없다. 내 멋대로 봐라

엄마가 큐레이터이자 미술사학자지만 딸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엄마의 박사 학위 논문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라고 말하며 그는 웃었다.

“제가 박사 논문을 쓸 때 딸애가 여섯 살이었는데 걔를 데리고 영국에 갔었는데, 딱히 맡길 데가 없어서 수시로 박물관 어린이 프로그램에 넣어두고 저는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했거든요. 그때 너무 박물관에만 있으니까 그게 싫었나 봐요. ‘박물관’ 하면 ‘엄마가 가둬놓고 가는 곳’ 그렇게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한동안 ‘박물관 싫어, 안 가.’' 그랬어요. 지금은 그렇진 않은데 딱히 박물관 가는 걸 좋아하는 것 같진 않아요. 다행히 책은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림에, 마음을 놓다』의 저자
미술사학자 이주은
미술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는 어려운 숙제다. 그래서 그림을 연구하고 전문적으로 보는 그에게 ‘그림을 잘 보는 요령’을 물어 봤다.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신통치 않은 대답이다. 그래서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서 사조나 화가들의 이름을 공부해야 하는지 물어 보았다. “시험 칠 것이 아니면 굳이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쉽게 씌어진 입문서 정도를 읽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역시 미지근한 대답이다. ‘전문가’인 그는 어떻게 그림을 보는지 물어보자 한참 생각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일단 저는 그림을 많이 봐서 그런지 겁내지 않고 그림을 보는 것 같아요. 일반인들은 그림 보는 것을 좀 겁내 하는 것 같아요. 너무 그림을 대단하게 생각한다고 할까요? 너무 ‘거장’ ‘천재’ 그래서 그런가요? 그림 보는 데 정답이 없는데 은연중에 ‘이렇게 봐서는 안 되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림을 볼 때 ‘내 머릿속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봤으면 좋겠어요. 그림을 잘못 보는 일은 없어요. 편하게 자기 마음에 와 닿는 느낌을 즐긴다면, 그림 보는 게 훨씬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셜록 홈즈처럼 그림을 단서로 문화를 추리한다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연구를 탐정 노릇에 비유했다. “저는 예술은 어떻게 해서든지 현실과 접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하는 연구는 예술을 둘러싼 문화 전반에 대한 것이죠. ‘왜 이런 그림이 그려졌을까, 그 시대의 어떤 요구가 이런 그림을 그리게 했을까?’를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추적해 보는 거죠. 셜록 홈즈가 반쯤 비어있는 커피잔, 외투에 묻은 흙, 주머니 속에 든 차표로 추리를 해 사건을 재구성하고 범인을 발견해내는 것처럼.”

그는 인문학자의 시선으로 그림을 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감수성으로 그림을 사랑한다. 또, 그림을 둘러싼 문화에도 관심이 많다. 그림과 현실을 접목하는 그의 연구는 계속될 것이고, 독자들은 채널예스에 연재되는 그의 칼럼 <이주은의 스타일, 삶의 태도>에서 그것을 약간이나마 엿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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