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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와의 뉴욕 산책 『뉴욕 3부작』

폴 오스터와의 뉴욕 산책 『뉴욕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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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바람이다. 여행을 가는 것은 바람이 나는 것이다. 내 삶 속에서 기득권을 차지했던 것들에게 잠깐 ‘실례’를 요청하는 일이다.

칼럼을 시작하며

여행은 바람이다. 여행을 가는 것은 바람이 나는 것이다. 내 삶 속에서 기득권을 차지했던 것들에게 잠깐 ‘실례’를 요청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낯설고, 새롭고, 두근거리고, 어설프고, 아직 확신은 없지만 분명 매혹적임에 틀림없는 대상에게 나를 맡기는 것이다. 이제, 몸속에서 톡톡거리는 세포들의 즐거운 반응을 감지할 차례다. 있는 힘껏 모든 감각기관을 곤두세워야 애써 잡은 바람의 대상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책, 영화, 음악, 미술, 건축, 공연…….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문화적 도구들이 당신의 여행길에서 꽤 괜찮은 길잡이가 되어줄지 또 알겠는가.

*

폴 오스터와의 뉴욕 산책 『뉴욕 3부작』

#1. 나는 계속 걸었다. 지하철을 타고 타임스퀘어에서 내린 후 몇 시간째 발길 내키는 대로 걷고 있다. 한여름의 태양이 가끔 구름 속으로 사라지기라도 하면 원군을 만난 것처럼 신이 나서 또 걸었다. 그러다가 누더기를 껴입은 거지의 공허한 눈길과 마주쳤다. 마치 카뮈의 음울한 표정을 흉내라도 내듯 커피 한잔을 놓고 세상의 온갖 철학에 빠져 있는 한 남자의 깡마른 얼굴과도 만났다. 비둘기와 대화하는 노인, 십자가를 높이 쳐들고 천국의 부름을 외쳐대는 하느님의 전령(傳令), 색소폰을 불며 찰리 파커를 찬양하는 거리 악사. 내가 가는 길목 한편에 그들이 있었다. 수백 개의 단편영화처럼 변화무쌍한 에피소드로 합쳐진 뉴욕의 길. 걷다 보면 길을 잃고 또 걷다 보면 길을 찾는다. 나를 잃어버리다가 다시 나를 찾아가는 것과 같다.


미드타운 거리

“하지만 그가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것은 걷는 일이었다. … 뉴욕은 무진장한 공간, 끝없이 걸을 수 있는 미궁이었다. 아무리 멀리까지 걸어도, 근처에 있는 구역과 거리들을 아무리 잘 알게 되어도, 그 도시는 언제나 그에게 길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 주었다. … 거리에서의 움직임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 생각을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리의 도시」 중에서)

#2. 손바닥만 한 햇빛 가리개 하나 없는 편편하고 긴 시멘트 바닥이지만 1.8킬로미터 산책로 위에서 내가 본 것은 유희(遊戱)하는 사람들, 그들의 사색과 휴식이었다.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브루클린 다리. 그러나 다리를 지탱하는 수천 개의 거대한 케이블선과 하늘로 우뚝 솟은 고딕식 돌탑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넘어선다. 나는 강바람을 맞으며,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맨해튼 건물들의 수직선을 관람하며, 횃불을 높이 쳐든 자유의 여신상에 먼 눈길을 주며, 걸었다. 내가, 그리고 사람들이 이 길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다. 어쩌면 백여 년 전, 이 브루클린 다리의 첫 설계자였던 존 뢰블링과 그의 아들 워싱턴이 목숨 바쳐 완성한 그 대가가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브루클린 다리

“블루가 걸어서 브루클린 다리를 건넌 지도 벌써 여러 해 전이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다리를 건넜던 것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였는데, 이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옆에서 걸어가는 어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아래쪽으로 강철 다리를 따라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을 들으면서는 아버지에게 그 소리가 마치 엄청나게 많은 벌들이 붕붕거리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했던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다.” (「유령들」 중에서)

#3. 그랜드센트럴에 들어갔을 때는 딱히 떠날 곳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영화 <피셔킹>의 몽환적인 춤 장면 하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곳에서의 나들이는 충분히 그럴 듯했다. 떠남과 도착, 만남과 이별의 함수관계가 제멋대로 뒤엉키며 작은 인간사(人間事)를 연출하고 있는 곳. 그 위에는 희로애락의 현실을 기꺼이 품으려는 듯 별천지로 장식된 둥근 천장이 있었다. 나는 홀 중앙에 서서 고개를 위로 젖힌 후 한참이나 올려봤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별자리를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랜드센트럴 터미널

“(그는) 커다란 홀의 둥근 천장을 올려다보며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성좌를 찬찬히 살펴보았다.…어렸을 때 몇 시간씩 밤하늘을 쳐다보며 점점이 박힌 별 무리들을 곰, 황소, 궁수, 물병 등과 일치시켜 보려고 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들어맞지가 않았다. 그럴 때면 마치 자기의 머리 한가운데에 맹점(盲點)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멍청이가 된 느낌이었다.” (「유리의 도시」 중에서)

#4. 파크 애비뉴를 따라 아래쪽으로 걷다가 40가에서 우회전한 후 뉴욕 도서관 앞 돌계단에 앉아 숨을 돌렸다. 거리는 사람들뿐이다. 뉴욕 완전정복에 나선 가족 관광객들, 장기 복역수의 꿀맛 같은 휴식을 연상케 하는 어느 회사원의 멍한 표정, 쇼핑만이 구원의 길임을 증명하려는 젊은 여자의 당당한 쇼핑백들. 소크라테스의 추종자로 보이는 노숙자의 의연함. 이 부조화의 인원 구성은 유니온스퀘어까지, 그리니치빌리지에서 워싱턴 광장과 소호로, 차이나타운과 월 스트리트까지 계속 이어졌다.

지하철역 댄서들

"그 별난 지옥에서 길을 잃은 사람 하나하나마다, 광기에 갇혀 육신의 문턱에 있는 이 세상으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이 서넛씩은 있다. 그들은 설령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존재하는 것으로 셈에 넣어지지 않는다." (「유리의 도시」 중에서)

#5. 센트럴파크 속으로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내 귓가에서 ‘윙윙’거리던 맨해튼의 소음이 순식간에 멈췄다. 빌딩은 초록색 숲으로 변했고 사이렌 소리는 새들의 지저귐 뒤로 사라졌다. 시인 D. H. 멜헴(Melhem)의 표현 그대로 ‘내 발끝은 뜨거운 태양 속에 담겨졌고 내 머리는 센트럴파크의 나무들로 장식되었다’. 현실의 짐을 슬쩍 벗어던진다고 세상이 무너지겠는가. 호수와 연못, 떡갈나무와 잣나무와 소나무, 야생을 즐기는 수천 마리의 새들과 비옥한 토양에 몸을 비벼대는 벌레들. 그들과 몇 시간쯤 느슨한 대화를 즐긴다고 해서 내 인생이 뭐 그리 어긋나겠는가.

센트럴파크

“머리 위의 나무들은 잎이 여전히 무성했고…반짝이는 햇살과 그늘이 놀랄 만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멀지 않은 곳에 떡갈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그 나무로 다가가서 빨간 공책을 베개 삼아 떡갈나무 바로 북쪽의 잔디 둔덕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 잠은 그가 몇 달 만에 처음 누려 보는 숙면이었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유리의 도시」 중에서)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들리는가 하면 힙합 댄서들의 거친 몸놀림 소리도 있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평균대 위에서 함께 곡예를 하고, 업 타운의 변호사와 브롱스의 노무자가 지하철역에서 같은 공기를 마신다. 클레오파트라의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다가도 『리어왕』의 깊은 절망이 휘감는 곳. 폴 오스터는 ‘두 번 다시 떠날 생각이 없는’ 뉴욕에서, 어느 날, ‘남’을 관찰하다 말고 무섭도록 또렷이 다가온 ‘나’를 발견한다. 미궁(迷宮)의 도시에서 제 길을 찾은 것일까. 혹은 「유리의 도시」에서 희망을, 「유령들」에서 실재를 본 것일까. 『뉴욕 3부작』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이 의문은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단지 책 속 한 문장이 그 답의 실마리처럼 보일 뿐이었다.

“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그가 (공책에) 쓰는 것은 별, 지구, 그리고 인류에 대한 그의 희망 같은 것들이었다.…그는 자신이 태어난 순간을, 자기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얼마나 부드럽게 당겨져 나왔는지를 떠올렸다. 또, 이 세상과 자기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의 한없는 호의도 떠올려 보았다. 이제는 어느 것도, 그 모든 아름다움 외에는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유리의 도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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