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밥, 풍만했던 그 여름의 맛!
물에 만 보리밥에 조린 멸치며 무짠지며 짭짤한 밑반찬을 한 점씩 얹어 어둑시근한 부뚜막에 걸터앉아 먹는 맛! 보릿고개가 웬 말이냐 싶고, 가난이 어느 곳 얘기냐 싶을 만큼 풍만했던 그 여름의 맛!
봄에서 여름 그리고 햅쌀이 나올 때까지는 그야말로 집 안에 쌀 한 톨이 없었다. 어쩌다 제사나 생일날만 빠꼼 얼굴을 내밀었다가 다시 쌀들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쌀이 얼굴을 내밀 때는 늘 조신하게 몸을 숨기던 보리가 당당히 주인 노릇을 하는 계절. 그때가 바로 여름이다. 물에 만 보리밥에 조린 멸치며 무짠지며 짭짤한 밑반찬을 한 점씩 얹어 어둑시근한 부뚜막에 걸터앉아 먹는 맛! 보릿고개가 웬 말이냐 싶고, 가난이 어느 곳 얘기냐 싶을 만큼 풍만했던 그 여름의 맛!
청보리밭으로 숨어들던 달콤 쌉싸름한 기억
경상도에서 흔히 쓰는 말로 ‘보리문둥이’라는 말이 있다. 문둥병 환자 혹은 나병 환자, 좀 더 현대적인 용어로 하자면 한센병 환자를 옛날에는 ‘문둥이’ ‘문딩이’ ‘문댕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하필 보리문둥이일까. 꼭 그래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보리밭 속에는 여러 ‘사람’들이 ‘깃들이’곤 했다. 보리밭에 깃들인 첫 번째 선수들은 연애할 장소가 마땅찮은 청춘남녀. 천지사방 둘러봐야 ‘러브호텔’이 들어서려면 아직 삼십 년은 더 기다려야 할 판. 에라 모르겠다, 보리밭으로 뛰어든다. 저희들도 짝을 짓던 종다리가 혼비백산 날아오르고.
보리밭에 ‘러브’만 있으면 좀 좋으랴. 그러나…… 어느 날 학교를 파하고 동네 아이들하고 집으로 오는데, 보리밭 사이를 지날 때쯤 누군가 소리 질렀다.
“보리밭에 문댕이 있다!”
보리밭 속에 진짜 문댕이(이 표현에 대해 양해를 구하면서)가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쳤다. 왜냐하면 어른들로부터 이미 보리밭 속 문댕이 이야기를 들었던 때문이다. 문댕이가 보리밭 속에 숨어 있다가 애들이 지나가면 달려나와 애들 간을 빼먹는다는.
특히 오월, 청보리 키가 아이들 키를 넘어설 무렵이면 아이들은 ‘보리문댕이’ 공포로 인하여 보리밭 근처를 지날 때면 언제나 삼삼오오 떼를 지어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재빠르게, 그야말로 구름에 달 가듯이 스쳐 지나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보리밭 속에서 무슨 소리라도 났다 싶으면 누군가가 단말마의 째지는 비명을 지르게 마련이었고, 아이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쳤다. 그 중 작은 아이들은 거의 기함을 할 지경에까지 도달하거니와, 또 그중에 신발이라도 벗겨진 아이는 초죽음 직전까지 가기도 하였다. 아, 신발 벗겨진 아이란 그러니까 바로 나였던 것이다.
일렁일렁 일렁이는 보리밭, 파도치는 보리밭, 그 보리밭 사잇길 어딘가에서 벗겨진 나의 꽃고무신 한 짝. 어린 가시내 가슴을 새가슴으로 만들었던 공포의 허물인 꽃고무신 한 짝은 그날 밤 달빛 아래 요염하게 빛났으리라.
우리 집에 쌀이 떨어졌다
보리, 보리밭! 생각만 해도 내 가슴은 또다시 일렁인다. 나는 이 세상에서 바람에 물결치는 보리밭보다 아름다운 풍경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보리밭 속에 깃들인 새와 새알과 새둥지만큼 가슴 아릴 지경으로 이쁜 풍경을 알지 못한다. 나는 보리밭 속에 피어서 하늘거리는 망초꽃만 한 호젓함을 알지 못한다. 보리밭의 사랑, 보리밭의 공포, 보리밭의 설렘, 이 세상이 온통 보리 물결로 출렁이던 때, 나 또한 생의 기쁨으로 출렁였었다.
어느 때부턴가 세상은 적막해졌다. 그 많던 보리밭이 차츰차츰 없어지면서부터 나는 세상이 적막강산인 것만 같아졌다. 더 이상 기다릴 그 무엇도, 더 이상 설렐 그 무엇도 남아나지 않은 적막강산의 세상!
보리밭. 보리밭에 서서 무엇을 기다렸던가. 두말할 것도 없이 보리다(김이 좀 새더라도 할 수 없다!). 보리밭에 서서 나는, 우리는 모두 보리를 기다렸다. 이윽고 검불에 구워 먹을 보리, 이윽고 가마솥에 덖어 먹을 보리, 이윽고 보리개떡빵을 해 먹을 풋보리를 우리는 기다렸다.
아니 그전에 우리는 이미 보리를 먹은 적이 있었다. 지난 초봄에 우리는 보리싹을 뜯어다 보리된장국을 끓여 먹었고 보리싹 풀떼죽을 쑤어 먹었다. 그렇지만 햇빛 찬란한 오월에 기다리는 건 보리싹이 아니라 보리알이다. 탱글탱글한 보리알. 그해 들어서 우리 입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곡물로서의 보리. 양식으로서의 보리. 보릿대째로 불에 슬쩍 구워 손바닥으로 쓱쓱 비벼 먹을 보리. 그 보리를 입 안에 탁 털어넣으면 덜 익은 보리알에서 달착지근한 물이 톡톡 터져나오곤 했다. 가마솥에 사카린 넣고 덖어 먹을 보리. 그 보리알 색깔은 내가 이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녹색이다. 그래서 더러 녹차 잔 같은 데 새겨진 파란 눈 무늬를 보리알 눈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가마솥에 보리 덖어 먹는 것을 ‘보리 올개심니 한다’고 한다. 맑고 파란 보리 올개심니. 아, 보리. 이름도 고운 보리.
보리 베기는 언제나 하지 전에 해야 한다. 하지 넘으면 보리가 햇빛과 바람에 다 ‘꼬시라져’ 버린다. 논이 없는 우리 집은 밭에다 보리를 심었다. 보리 베러 갈 때는 중무장을 해야 한다. 보리 가시랭이에 쓸린 몸은 생각보다 쓰리고 괴롭다.
우리 엄마는 지난 봄 내내 이 산언덕 보리밭에서 노고지리 벗을 삼아 육자배기 가락에 시름을 실어 지심(*풀)을 맸었다. 그런 날, 엄마가 쓴 흰 머릿수건 위에는 산마루를 휘돌아 불어온 바람에 실려온 노란 송홧가루가 자욱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태가 졌다 할 만큼 뭉글뭉글 피어난 붉은 진달래와 초록 융단 같은 보리와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군무를 추는 노란 송홧가루. 물주전자를 들고 엄마한테 가는 그 봄의 산언덕 길에서 나는 언제나 어지러웠다. 보리밭을 매는 엄마는 보리밭에선 언제나 육자배기 가락으로 말했다.
“이 보리로 돈을 사서 금쪽같은 우리 딸랑구(*딸의 전라도 방언.) 간따구(*원피스.)를 사주꺼나, 맘보 쓰봉을 사주꺼나, 빼쪽구두를 사주꺼나아…….”
진달래가 지고 찔레꽃이 피고 찔레꽃이 지고 살구가 익을 무렵, 내 간따꾸가 되고 맘보 쓰봉이 되고 빼쪽구두가 되어줄 보리를 베었다. 그리고 그 보리는 끝내 간따꾸도 맘보 쓰봉도 빼쪽구두도 될 수가 없었다. 보리는 여름 내내 우리 집 식구들 밥이 되고, 보리단술이 되었다.
봄에서 여름 그리고 햅쌀이 나올 때까지는 그야말로 집 안에 쌀 한 톨이 없었다. 어쩌다 제사나 생일날만 빠꼼 얼굴을 내밀었다가 다시 쌀들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쌀이 얼굴을 내밀 때는 늘 조신하게 몸을 숨기던 보리가 이제는 당당히 주인 노릇을 할 바로 그때인 것이다. 아침에는 주로 감자를 넣은 보리밥을 해 먹었다. 그래야 부드러운 감자 힘을 받아 푸실한 보리밥을 목구멍에 넘길 수가 있었으므로. 보리밥에 감자 대신 돈부를 넣어 먹기도 하였다. 포근포근한 붉은 돈부가 점점이 박힌 보리밥. 그럴 때 아직 목구멍이 여물지 않은 어린애들은 보리는 다 밀쳐두고 돈부만 골라 먹기 십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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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이 먹고 자란 것들을 둘러싼 환경들, 밤과 낮, 바람과 공기와 햇빛, 그것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몸짓과 감정들이 실린 스물여섯 가지 먹을거리 이야기을 담은 음식 산문집. 봄이면 쑥 냄새를 좇아 들판을 헤매고, 땡감이 터질듯 무르익는 가을이면 시원한 추어탕 한 솥을 고대하던 지난시절의 기억들을 소복한 흰 쌀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