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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재상이 목숨 걸고 다퉜던 철비

동지중추 이영은李永垠과 예조판서 김겸광金謙光이 동시에 철비를 첩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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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은 한 여자를 놓고 치열한 대결을 펼쳤다.

철비哲非는 고故 정랑 권이경權以經의 계집종으로 주인이 죽자 아비 김은金殷을 따라 성주에 내려와 살고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동지중추 이영은李永垠과 예조판서 김겸광金謙光이 동시에 철비를 첩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 둘은 한 여자를 놓고 치열한 대결을 펼쳤다. 결국 이영은보다 15세가 많았던 김경광이 두뇌 싸움에서 이겨 철비를 갖게 되는데 그녀를 차지한 남자는 72세까지 살고, 빼앗긴 남자는 38세에 요절했다.

이영은은 당대의 명문가 자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었다. 이영은은 이색을 닮아 문장에 매우 뛰어났다. 23세가 되던 1456년(세조 2) 과거에 올라 승사랑承仕郞 권지 승문원 부정자에 제수됐다. 1457년(세조 3)에는 중시重試 1등에 뽑혔다. 그의 답안이 매우 뛰어나 세조가 4품 벼슬을 주고자 했으나 이조와 병조에서 너무 과하다고 논박해 통덕랑通德郞 사간원 헌납으로 특별 임명했다. 얼마 안 있어 세자필선世子弼善에 오르고 직예문관直藝文館으로 자리를 옮겼다.

1465년(세조 11)에는 사헌부 집의로서 시폐時弊를 논했는데 세조가 매우 흡족히 여겨 “너의 말이 시대의 병통을 깊이 맞추었고 또 소장疏章의 격식에도 적합하니, 참으로 조부 목은의 문장이다” 하였다. 이후 동부승지에 발탁됐다. 집안과 실력을 바탕으로 이영은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런 그가 한 미천한 여자 때문에 큰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삼십대 중반 이후에야 과거 시험에 합격했는데 이영은은 23세에 합격할 정도로 명민했다. 그는 항상 큰소리치기를 “다만 몸을 곧게 함을 요할 것이고, 남의 말은 돌볼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오만함이 가득했다. 세조는 “좌우 시종 가운데 한 사람도 이영은을 천거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반드시 크게 뛰어난 사람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세조의 사랑은 그의 몸에서 독으로 바뀌었다. 형조판서가 돼서는 뇌물을 받는 데 만족할 줄 모를 정도였다. 한번은 신 만드는 장인에게 가죽을 주고 신을 만들게 하고 얼마를 쳐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매번 값을 깎거나, 제작이 조금 더디면 옥에 가두었다.

나중에 이영은이 예조판서 김경광과 철비를 두고 다투다가 사헌부에 고소하니, 사헌부에서 이영은에게 죄주기를 청했다. 당시 이영은은 공공의 적이었다. 의금부에서 국문하자 이영은은 스스로 분하게 여겨 졸도했다. 이후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비명횡사한 것이다. 혹 의금부의 잔혹한 과잉 수사에 제대로 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이른 나이에 출세해 세상의 말을 들을 기회가 없어 목숨을 잃었다.

*

철비를 가졌던 김겸광은 1418년생으로 35세가 되던 1453년(단종 원년) 문과에 합격해 예문관 검열,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과 정랑을 거쳤다. 1460년(세조 6)에 사헌부 장령으로 야인 정벌에 종군해 공을 세우기도 했다. 곧 승정원 동부승지?우승지?가선대부?평안도 관찰사에도 올랐다. 1465년(세조 11) 호조참판에 제수됐다가 1467년(세조 13)에 예조판서에 제수됐다. 이때 그의 나이 49세로 이영은과 철비를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일 때였다.

김겸광은 재상 신분으로 남세스러운 첩 다툼을 벌여 조정을 시끄럽게 했지만 출셋길이 막히진 않았다. 성종이 즉위하자 좌리공신으로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져 판한성 부윤, 의정부 우참찬 등을 역임했다. 사관들은 “김겸광은 재물을 탐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으며 집안 재산이 대단히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 철비를 이겨서 차지하는 일에 재물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케 한다.

이영은과 김겸광은 어떻게 철비를 알았을까? 철비는 권이경의 계집종이었는데 권이경의 처가 이영은의 사촌누이였다. 이 때문에 이영은은 일찍이 철비를 알고 있었다. 그는 철비를 자신의 첩으로 삼고 싶어 철비의 부모와도 이미 이야기를 끝낸 입장이었다. 그러던 중에 김겸광의 눈에 철비가 띈 것이다.

김겸광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영은의 예비 첩을 빼앗으려고 했다. 사건은 이영은이 국상 중에 목욕하러 간다고 핑계하고 성주에 가서 철비를 취하려 했을 때 벌어졌다. 국상이란 황제?왕?황후비?왕세자?왕세자빈 등의 사망으로 치르게 되는 상례를 말한다. 국상 3년 동안에는 민가에서 풍악을 울리고 음사淫祀를 행하는 것을 금했다. 이 와중에 두 재상이 첩을 삼기 위해 혈투를 벌인 것이다.

김겸광은 이영은이 성주에 내려간 사실을 알고서 관찰사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다. 그의 정치 라인이었던 관찰사는 관아의 무리를 급파해서 강제로 철비를 서울로 올려 보냈다. 철비는 영문도 모른 채 급하게 짐을 꾸려 길을 나섰지만 그녀의 서울행은 곧 시집가는 길이었다. 노비들의 혼인은 특별한 형식이 없었다. 철비의 큰 두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아버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연신 머리만 조아렸다. 딸의 혼인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도, 사윗감을 고를 수 있는 선택도 아비에게는 없었다. 철비는 서울에 와서 김광로金光老의 집에 숨어 살았다. 김겸광은 철비를 안전가옥에 모셨다. 이영은이 쳐들어올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영은의 눈을 피해 철비를 몇 차례 옮기더니 드디어 취했다.

김겸광이 철비를 가로챘다는 소문을 듣고 이영은은 권이경의 집으로 가서 철비의 어미 약덕若德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딸을 취하려고 도모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어찌하여 김겸광에게 주었는가?” 하고 따졌다. 그러더니 이영은은 주머니 속에서 글을 꺼내 “이것이 고장告狀의 초안이다. 내가 마땅히 헌부에 고소하겠다”라고 일렀다. 또한 사촌누이인 권이경의 처에게 “철비를 빼앗아 나에게 달라. 나는 반드시 이 계집을 첩으로 삼은 다음이라야 그만두겠다”고 했다. 이에 권이경의 처가 철비를 만나 설득했고, 급기야 철비가 몰래 도망쳐나오다가 김겸광이 붙여둔 하인에게 걸려 방문에 자물쇠가 걸릴 지경에 이르렀다.

두 사람의 여자 다툼은 장안을 시끌시끌하게 했다. 사헌부 장령 박숭질朴崇質은 사리를 아는 재상들이 오랑캐의 풍속처럼 첩을 두고 싸움을 벌였다며 왕에게 국문을 요청했다. 또한 관찰사 오백창吳伯昌이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가동을 가두고 강제로 철비를 보내게 했으니 함께 국문하도록 요청했다.

*

성종은 김겸광?이영은?홍귀달을 불러 우선 홍귀달에게 말했다.

“철비의 아비가 살아 있으니 그 사정은 마땅히 아비에게 물어봐야 한다. 지금 사헌부에서 그 어미와 양부養父에게 곤장을 때렸는데, 이것은 사헌부의 잘못이다. 사건의 정황을 잘 알고 있는 철비의 친아버지인 김은에게 물어야 한다.”

이어 왕은 김겸광과 이영은을 끝까지 국문해 실정을 캐봤자 무익하니 다시는 논하지 말라고 했다. 성종은 사건이 확대돼 지도층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이 나빠질까봐 염려했다. 왕은 둘의 화해를 유도했다.

“경들은 조정의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이다. 지금 첩 때문에 고소장을 내어 서로 힐난하니, 대신의 도리가 진실로 이와 같을 수 있는가? 더구나 경들은 동맹해 입에 삽혈?血(맹세하여 굳게 언약할 때 그 표시로 짐승의 피를 서로 나눠 마시거나 입가에 바르던 일)한 것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조그마한 일에 혐의를 일으켰으니, 삽혈한 뜻이 또 어디에 있는가? 이번 일은 그만이지만 뒤에는 이와 같이 하지 말라.”

그러나 홍귀달이 성종에게 이들을 강하게 문책하기를 요구했다.

“김겸광은 이미 이영은이 혼인하려고 꾀하는 줄 알고서 몰래 꾀를 내어 먼저 취했고, 이영은 또한 김겸광이 이미 취한 것을 알고서도 도로 빼앗으려고 꾀하였습니다. 그 정상이 이미 드러났는데, 이것을 버려두고 다스리지 않는다면 풍속의 허물어짐이 조정에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홍귀달의 청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첩을 다투는 일은 풍속에는 관계되나 국가에는 관계되지 않는다며 더 이상 언급하지 말 것을 명했다. 하지만 대간들의 직언은 이어졌다.

성종이 경연에 나아가서 강을 끝마치자 박숭질이 왕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때에도 성종은 “이미 내가 두 사람을 불러 꾸짖었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대간들은 그치지 않았다.

“사람의 죄는 마음에서 나온 것도 있고 마음이 없는 데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만약 심술이 바르지 못한 데에 근거하고 이욕利慾을 탐해 감히 기탄하는 바가 없는 자라면 어찌 공功으로 죄를 용서하겠습니까? 만일 그 정범情犯을 깊이 연구하지 아니하고 일체 공으로 죄를 용서한다면 신 등은 심히 두렵건대, 나라의 법이 훈귀勳貴에게 행하지 못하여 풍속이 바로잡힐 날이 마침내 없을까 합니다.”

거론하지 말라는 입장과 죄를 물어야 한다는 논의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성종 스스로도 자신이 왕이 되는 데 도움을 줬던 공신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이때 김경광이 임금에게 선처를 바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는 글을 올린 사실이 승정원을 통해 사헌부에 전해졌다. 사헌부 관리들이 흥분했다. 대사헌 한치형韓致亨 등이 들고 일어났다.

“탄핵을 입은 김겸광이 감히 글을 올려 왕의 은혜를 바란 것은 사헌부가 아닌 바로 임금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마땅히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께서 계속 허락하지 않으니 한스럽습니다. 재물과 여색을 따르면 음풍으로 재상과 사대부가 몸에 한 가지만 지니고 있어도 그 집이 반드시 망할 것이라? 했습니다.”

이때 팽팽한 대결 구도를 깬 것은 어이없게도 사건 당사자인 김겸광과 이영은이었다. 이영은이 의금부 조사를 받다가 홧김에 졸도한 것이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게다가 김겸광은 도무지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했다. 노비였던 계집종을 첩으로 삼은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알지 못하고 오히려 당당하게 스스로 사헌부에 나가 자신의 무죄를 밝히겠다고 큰소리쳤다. 이것을 본 성종은 이 사건을 승정원에서 재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김겸광이 너무 자신만만하게 나오자 성종은 “죄가 있는 자는 기뻐하고 죄가 없는 자는 민망스러워한다”며 국문해 거짓과 참을 밝히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여기서 실록의 기록은 행간의 의미를 감추고 있다. 좌익공신으로 정부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왕의 신임을 받은 김겸광이 곤장 앞에서 자청해서 바지를 내렸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는 정치꾼이었다. 다만 이영은이 그렇게 독할 줄 몰랐을 뿐이다.

임자를 만난 김겸광은 사건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왕이 궁지에 처하자 이 매듭을 스스로 풀어야 함을 깨달았다. 왕에게 글을 올리고 사헌부 마당에서 큰소리를 친 것은 왕이 정치적으로 불리한 판단을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성종도 물론 좌익공신의 그러한 뜻을 알았을 것이다. 김겸광을 재조사하라고 지시하면서도 성종은 그런 오른팔을 뒀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김겸광은 그해 10월 예조판서직에서 갈리지만, 12월 곧바로 한성 부윤, 오늘날로 치면 서울시장의 자리에 오른다. 왕은 자신에게 충언하는 신하보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신하를 옆에 두고 싶어했다.

한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왜 김겸광과 이영은은 철비를 그토록 가지고 싶어했을까. 사헌부 조사에 따르면 대사헌 한치형 등도 이 점이 궁금했다. 그러나 철비는 경국지색이기는커녕 외모가 지극히 평범했다. 다만 성주에 있는 철비의 어미 약덕의 말을 들으면, 철비는 전민田民이 아주 넉넉했다. 결국 두 재상은 철비의 미색이 아니라 재산을 두고 다투었던 것이다. 김겸광의 차지가 된 철비는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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