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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불교와 장자에 심취한 사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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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는 『하얀 가면의 제국』『당신들의 대한민국』『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박노자의 만감일기』 등의 글을 통해 한국, 북유럽, 러시아에 대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근본부터 뿌리째 흔들며 던져주는 우리 시대의 놀라운 논객이다.

4월 8일 저녁 우주선이 발사됐다. 나는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우주선이 카운트다운 숫자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막연히 바라보았다. 그때 엉뚱하게도 루이 블랑키가 생각이 났다.

우주 크기는 무한하다. 그러나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육십 몇 가지 원소다. 이 원소들의 결합이 제 아무리 많은 수효에 이른다 해도 끝내 유한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한다. 그렇다면 이 원소들로 무한대의 우주를 만들기 위해선 온갖 결합을 시도하면서 갖가지 결합을 무한히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는 지구도, 이러한 결합의 하나인 지구도 태양계의 한 행성이 아닌, 틀림없이 무수히 존재하리라. 이 지구의 나폴레옹은 마렝고 전투에서 대승했다. 그러나 망망한 허공에 떠있는 다른 지구의 나폴레옹은 같은 마렝고 전투에서 대패했을지 모른다. 이것은 육십칠 세의 블랑키가 꿈꾼 우주관이다. 이에 시비 걸지 않겠다. 그저 블랑키는 감옥에서 이런 꿈을 글로 적었을 때 모든 혁명에 절망했다. 이 사연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언가 우리 마음속에 스며드는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꿈은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다. 우리도 위안을 찾기 위해서 몇 만억 마일의 하늘로-우주의 밤에 걸린 제2의 지구로 빛나는 꿈을 비추지 않으면 안 된다. (아쿠다카와 류노스케, 『쓸쓸함보다 더 큰 힘이 있으랴』 중에서)

나도 루이 블랑키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싶진 않다. 그러나 나는 아직은 블랑키와는 다른 이유로 우주를 본다. 나는 아직은 나의 첫 번째 지구에 미련이 많다. 아직 사랑할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그날 밤 우주로 날아오른 한 척의 우주선이 내게 던진 메시지는 오로지 자신의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사람만이 다른 세계를 맛본다는 것. 오로지 자신의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사람만이 놀라운 사랑을 맛본다는 것. 세계의 다른 끝에 접촉하려는 자들만이 출구를 찾는다는 것. 인간은 하늘과 땅이란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그런 방식으로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 먼 훗날 절망감과 쓸쓸함에 떨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어딘가에 꿈을 비추는 존재일 거라는 것.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봉쇄된 도시에서 자기만의 서치라이트로 어딘가에 꿈을 비춘 자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사랑이 그런 것처럼 과거와 갈망에 속하는 이야기지만 또 사랑이 그런 것처럼 오래 계속될 이야기의 앞부분 정도일 수 있다. 어쨌든 이 글은 레닌그라드(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그 St.Petersburg)에 태어난 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그 주인공은 박노자다.

박노자 ⓒ 프레시안

본명이 블라드미르 티호노프인 박노자는 『하얀 가면의 제국』『당신들의 대한민국』『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박노자의 만감일기』 등의 글을 통해 한국, 북유럽, 러시아에 대해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근본부터 뿌리째 흔들며 던져주는 우리 시대의 놀라운 논객이다. 그는 1973년, 레닌그라드의 유서 깊은 동네, 브보르그스카야 스토로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렸을 적 애칭은 볼로댜였다. 아버지는 원자력 발전소 변전기 엔지니어였고 엄마는 미생물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두 분 모두 유대인이었다. 히틀러가 레닌그라드를 포위했던 그 유명한 독소전투 때 그의 할아버지는 아사를 했고 (1941년부터 4년간 계속된 전투에서 당시 레닌그라드 시민 130만 명 중에 65만 명이 아사했다. 나는 당시의 흑백사진 한 장을 본 일이 있는데 그 사진 속 독일 병사 앞에는 레닌그라드 방향 표지판이 있었다. 그 표지판으로 진격한 것이 세계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된 전투의 첫걸음이었다.) 그의 친척 유대인들은 참전해서 전사하거나 병사했다. 어쨌든 박노자는 1917년 혁명이 아니었으면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날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브보르그스카야 스토로나라는 곳은 레닌그라드 (현 상트 페테르부르그. 앞으로는 쭉 ‘레닌그라드’라고 쓰겠음. 박노자 본인이 줄곧 ‘레닌그라드’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동북쪽에 있는, 공장들이 18세기 이후로 가장 많이 집결돼 있는 러시아판 ‘영등포’ 내지 ‘구로동’입니다. 1917년 10월혁명의 요람인 그곳에서는 어디를 보아도 연기 나는 굴뚝부터 보이지요. 저희 학교만 해도 초등학교부터 노동 연습 시간이 따로 배정돼 있었고 저도 선반공 등의 실습을 하면서 나중에 노동자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곳 인구의 상당 부분은 공장 노동자이었지만 각종의 대학과 전문대학 등 인력 양성 기관들도 있었고, 저희 어머니와 같은 전문대 교수들도 직장 가까이 그곳에서 살았어요. 저희 어머니의 어머니 쪽은 우크라이나, 아버지 쪽은 백러시아 계통의 유대인이었지만, 1917년 10월혁명 이후에 변방의 유대인들에게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 도회지에의 이전과 자유로운 대학 교육 받기가 허락되어 결국 레닌그라드로 이전하여 아버지와는 거기에서 만나게 됐습니다. 1917년 10월 이전까지는 러시아는 유대인들에게 이주의 자유를 많이 허하지 않고 각종의 민족 탄압책을 썼으니까요.”

구소련 시절 대다수의 가정에서는 독서를 즐기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는데 당시 ‘민중들의 오랜 숙원인 문맹 퇴치, 일반 교육 보편화’가 이뤄졌기 때문이었을 거라 한다.

“저는 대체로 책벌레형이었는데, 그 당시엔 그러한 체질의 아이들이 환영을 받았지요. 저의 경우에 제가 저 자신을 기억하는 바로 그 첫 순간인 서너 살 때부터 뭔가 읽고 있었던 기억이 나요. 여섯 살 때 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가 너무 재미없었어요. 그때 제가 고대 희랍사에 하도 관심이 많아서 깊이 빠져 있었는데 학교에선 그런 것은 가르쳐 주지 않고 알파벳을 가르치는 거예요.”

여기서 나는 잠깐 내 귀를 의심하면서 녹음기의 스탑 버튼을 누르고는 애원하는 표정으로 박노자를 바라보았다. 말풍선을 달 만한 내 머릿속 생각은 ‘어머, 러시아엔 그때 벌써 어린이 학습 만화가 있었나?’였다. 나는 오로지 진실만을 말해달란 간절한 눈빛을 박노자에게 띄웠다. 그는 즉각 알아들었다.

“아니에요. 만화가 아니라 대학 교재 같은 거였어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대 희랍사는 동양의 사마천의 《사기》 같이 문화의 근본 중의 근본이어서 누구나 조금씩은 알고 있었어요. 게다가 신화다 보니까 어린이 동화 같은 느낌도 들고요. 특히, 헤라클레스의 열두 가지 모험을 좋아했고 오딧세이가 아름다운 부인 페넬로페를 놔두고 트로이에 갔다가 고생고생하며 돌아가는 호메로스의 오딧세이 서사시를 좋아했어요. 오딧세이를 기다리는 페넬로페의 정서. 페넬로페를 향해가는 오딧세이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해요. 아이라면 누구나 엄마를 그리워하니까 이별 모티브를 이해할 수 있었고 이별과 생이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죠. 오딧세이가 거인국에서 죽을 뻔한 이야기 같은 건 지금도 상세하게 기억나요. 내 주위 친구들도 그런 애들이 없진 않았고요. 그리고 한국의 학동들도 여서일곱 살 때 《소학》 떼고 《대학》을 읽었지 않았습니까? 김시습 선생도 이미 5, 6세 때 한시를 지었는데 한시를 지으려면 중국 고대 신화 체득해야 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수준은 좀 떨어져도 나도 내 나이 여섯 살, ‘생이별’이란 말을 첨 이해했던 것 같다. 나는 『엄마 찾아 삼만 리』란 책을 읽으며 눈물범벅이 되어서 생이별을 이해했던 것 같고 처음으로 내 가슴에서 흘러나온 슬픔이 온 세상을 적실 수도 있단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와 말을 하고 있자니 나 역시 30일 동안 동굴에서 네미아의 사자의 목을 조르고 있던 헤라클레스의 모습과, 하늘에 올라가 영원히 별자리로 남은 헤라클레스의 스승 켄타우로스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오딧세이가 마녀 키르케를 만나는 장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그의 고향, 그의 정숙한 아내 페넬로페가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이타카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다시 박노자의 깊은 눈을 바라보자니 그의 얼굴이 자기 키보다도 높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책에 코를 박고 있는 소년의 얼굴처럼 보였다. 내겐 그런 소년들의 얼굴도 하나의 신화다. 그 소년들은 나중에 인간의 비밀을 풀고 과제를 해치우기 위해 길고 긴 여행을 떠난다. 내가 내 나름대로 신화의 의미를 깨우쳤던 건 콘스탄티노스 카다피의 시 「이타카」 덕택이었던 것 같다. 그 시를 읽다보면 신화 속 이야기는 신화로 끝나지 않고 아주 길게 이어지는 시간과 삶의 이야기가 된다.

네가 이타카로 가는 길을 나설 때,
기도하라, 그 길이 모험과 배움으로 가득한
오랜 여정이 되기를.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
포세이돈의 진노를 두려워 마라.
네 생각이 고결하고
네 육신과 정신에 숭엄한 감동이 깃들면

그들은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하리니.
네가 그들을 영혼에 들이지 않고
네 영혼이 그들을 앞세우지 않으면
라이스트리곤과 키클롭스와 사나운 포세이돈
그 무엇과도 마주치지 않으리.

기도하라, 네 길이 오랜 여정이 되기를.
크나큰 즐거움과 크나큰 기쁨을 안고
미지의 항구로 들어설 때까지,
네가 맞이할 여름날의 아침은 수없이 많으니.
페니키아 시장에서 잠시 길을 멈춰
어여쁜 물건들을 사거라,
자개와 산호와 호박과 흑단
온갖 관능적인 향수들을.
무엇보다 향수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최대한,
이집트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가
현자들에게 배우고 또 배우라.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너에게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이타카」 전문)

사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마녀 키르케에 대해서 쓰고 싶어 죽을 지경인데 글의 맥락을 에로틱하게 흔들 게 분명해서 참고 넘어간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 참고). 다시 박노자의 죽을 지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는 531번 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생활은 계속 지겨워서 죽을 지경이었어요. 소련이 군사주의 행사를 많이 해서 지겨웠던 거죠.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당시 소련이 궁핍하진 않았지만 물자 공급은 제한된 사회였는데도 책 공급은 좋았다는 거였어요. 원하는 도서는 다 살 수 있었고 웬만한 세계 고전은 다 번역되어 있었어요. 부모님이 영국 고전을 좋아해서 우리 집에는 찰스 디킨스 전집 90권이 있었어요. 나는 그것도 다 읽어버렸죠.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청교도적인 기질이 있어서인지 정말 열심히 작업했더라고요. 저도 그만 외국 문학에 빠지고 말았어요. 이건 제정 러시아 때부터의 전통인데 아동 고전에 대한 전통이 있었어요. 남한으로 치면 세계 위인전 읽는 것처럼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 이래 19세기 서구 아동 문학을 안 읽으면 간첩으로 여겨졌어요. 쥘 베른 전집을 다 읽었어요. 『80일간의 세계일주』를 탐독했던 기억이 나고 그다음에 뒤마의 『삼총사』 시리즈를 읽었는데 『삼총사』 읽고는 소감이 복잡했어요. 사람 죽이는 이야기만 나오는 데다가 삼총사와 달타냥의 첫 만남도 결투 장면이잖아요. ‘봉건귀족들이 서로 살육하는 걸 왜 읽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뒤마는 부르주아 기호에 딱 맞춰서 쓰는 걸로 보였어요. 그런데 나중에 북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북한 사정은 어려웠어요. 북한은 70년대 이후 세계고전 문학을 새로 찍어 내진 않았어요. 일부 지식인들만이 60년대까지 인쇄된 서양 고전을 갖고 있었죠. 북한의 보통 사람들은 디킨스나 또 다른 작가들을 전혀 모르고 삶을 마감하는 거죠.”



 

 

박노자는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에서 열 살부터 거의 5년간 매일 해야 했던 대화를 소개하는데 그 대화는 “준비돼 있어라!” “예 준비돼 있습니다.”이다. 당시 소련에선 거의 모든 청년이 비오네르라는 훈육에 가입해야 했는데 준비돼 있다는 다짐은 단위 부대의 부대장에게 늘 해야 했던 말이다. 그리고 매주 몇 번씩 대열 행군과 자동소총 분해 조립을 연습해야 했고 합숙 야영과 전쟁 훈련 게임에 참여해야 했다고 하니 전쟁은커녕 축구공 차는 것도 싫어하던 박노자가 얼마나 곤혹스러웠겠는지는 짐작이 간다. 디킨스와 쥘 베른, 뒤마는 한국의 아이들도 한 번씩은 읽고 넘어가는 책일 것이다. 나의 경우는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두 도시 이야기』『크리스마스 캐럴』『데이비드 카퍼필드』를 읽었는데 그중 『데이비드 카퍼필드』에 대해서는 무한정 따스한 애정이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과 관련해선 나에겐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무렵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게 되었는데 주인공인 스크루지가 처음엔 지독한 괴물딱지 같은 구두쇠였다가 세 명의 유령을 만난 뒤 런던에서 가장 인심 좋은 사람이 되는 스토리에 크게 매료되어서 본격적으로 산타클로스의 과거에 의구심을 품게 된 것이었다.그리하여 「호외! 새로 밝혀진 산타클로스의 과거」라는 글을 집필(?)하게 되었는데 그 글 속에서 산타클로스는 마치 스크루지가 그러했듯 어두운 과거가 있는 걸로 설정되었다. 『키다리 아저씨』에서 모티브를 얻어와 아동학대가 넘치는 위선적인 고아원이 배경이었고 훗날 선물을 배달하는 돈은 당연히 당시 부정축재한 돈이었다. 나중에 그 글을 이언 매큐언의 『속죄』에서처럼 가족들 앞에서 구두 발표했다. 결국 크리스마스 날 야유와 비난의 홍수 속에 헤매다 한 마리 미운 오리 새끼가 되고 말게 한 실패작이었지만 그래도 그 글 속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장면은 하나 있다. 산타클로스가 거울 앞에서 수염을 손질하는 장면이다. 아이들은 모두 기뻐해도 산타 자신은 속죄를 위해 선물을 배달하기 때문에 어쩐지 비장하고도 쓸쓸한 표정을 감출 수 없는데 자신의 쓸쓸함을 감추기 위해 더욱더 정성껏 수염을 손질하게 되고 그가 손가락을 가늘게 떨 때 거울에 한 겨울의 햇빛이 따스하게 비친다는 설정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중년 및 노년 남자의 비릿한 비애를 어린 나이에 살짝 이해했단 증거가 아닐까? 어쨌든 난 비정한 거리란 말만 들으면 마음이 몹시 복잡하고 대체로 우호적이 된다.



 

 

531번 학교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하고 싶다. 구소련엔 학교 이름이 따로 없고 그냥 지역별로 번호를 매겼다는데 내가 게리 슈테인가르트의 『망할 놈의 나라 압수르디스탄』을 읽었을 때 비슷한 학교 이름을 읽고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러시아에서 1,238번째 가는 부자의 147킬로그램 나가는 뚱보 아들이고 별명은 주전부리 대장이다. 소원은 오로지 미국 비자를 얻는 것.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배신한 동료에게 살해당하는데 그가 아버지가 폭사했단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자동차 안에서 보게 되는 풍경이 바로 567번 유치원 아이들이었다.

자그맣고 천사 같고 슬라브인처럼 생긴 아이들이 그 멍청한 빨간 깃발을 들고 북적거리는 볼쇼이 프로스펙스 옆에 서 있었다. 아이들의 통통한 얼굴에서는 입김이 작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 작은 아이들의 아이다운 생각들이 이 기록적인 추위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 같았다. 자동차들은 계속 아이들 앞을 지나쳐갔다. 부자들의 아우디도, 가난한 사람들의 라다도, 아무도 아이들이 건너갈 수 있도록 차를 멈추려 하지 않았다. 나는 자문해 보았다. 만약 내가 저 아이들한테 각각 10달러씩 준다면 저 아이들의 삶이 바뀔까? 저 아이들이 사춘기를 지날 무렵이면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게 될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운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567번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해서, 나의 무능력 때문에,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꾸민 음모 때문에 울었다. 결국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서도 울 거야. (『망할 놈의 나라 압수르디스탄』 중에서)

익살스럽고 능청스러운 게리 슈타인가르트는 박노자보다 한 해 빠른 1972년 구소련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8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간 것이 박노자와의 차이지만 그 둘은 결국 나에게 어느 정도 같은 세계를 보여준다. 531번 학교는 봉쇄된 세계에서 꿈꾸는 방법에 대해서, 567번 유치원은 비틀어진 아메리칸 드림이 놓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박노자의 말 중에서 대다수의 북한 주민들은 ‘디킨스나 또 다른 작가들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한다’는 말은 언제나 인간의 뒤에 버텨주고 있는 하늘이나 별을 잃었다는 말처럼 슬프다. 왜냐하면 빛이 있어야 기대어 불복종할 수 있기 때문에. 박노자는 책을 읽으며 불복종했다.

“하지만 그런 책(세계명작)을 읽으면서도 저는 평생 그런 곳에 가보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체제가 무너질 거라곤 생각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가장 하고 싶은 했던 것은 금서를 읽는 거였어요. 어느 정도 봉쇄되어 있고 세계하고는 소통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금서는 굉장히 매력 있었죠. 제가 그때 니체나 쇼펜하우어를 다 읽어버렸어요. 공산당 정권이 사상적으로 양호하지 못한 책이라고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기로 읽어버렸죠.”

그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문학 및 역사 특수목적 고등학교’였다.

"고등학교 선택권이 있었어요. 영어 고등학교가 특히 인기 있었죠. 통역을 직업으로 가지면 외국 출입이 가능하니까 당 간부들이 자기 자녀들을 외국에 보내려고 많이 응시했죠. 저희 집은 중간 인텔리겐차 정도였으니 영어 특목고는 들어가기 어려웠죠. 입학시험은 면접이었는데 ‘해외 문학을 얼마나 읽었느냐?’를 묻고 작문을 시켰어요. 프랑스 문학, 그중에서도 발자크와 스탕달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졌어요. 고등학교 시절은 절대로 한국만큼 바쁘지 않죠. 좋은 것은 ‘문화의 집’이란 게 있었는데 일종의 청소년 서클이었어요. 수업이 두세 시쯤 끝마치고 숙제를 하고 문화의 집에 가곤 했어요. 저는 지질학 서클에 들었어요. 탐험대 들어가서 먼 지역을 돌아다닐 수 있었고 그때 고고학자가 될까도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때 특히 좋았던 것은 스키타이 고분을 발굴하러 시베리아에 간 거죠. 한 고분을 한 달 반 발굴했어요. 고고학 전문가 세 명 정도랑 아이들 삼십 명 정도랑 간 것 같아요. 가는 데 한 오 일 걸렸어요. 발굴할 때 어차피 잡부가 필요한데 한국에선 일용직을 고용하지만 소련은 관심 있는 애들이 삽질(?)하게 했어요 .홍수가 나서 죽을 뻔도 했지만 그냥 숲 속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좋았어요. 산에 올라가면 사방에 인적이 없는 시베리아 밀림이 펼쳐져 있었어요. 전 그때 두려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쭉 가면 저쪽에 몽골 국경 지대일 텐데. 아, 세상에 끝이란 없구나.’ 이런 생각 했던 것 같아요.”

에니세이강과 시베리아 밀림과 스키타이 고분을 경험한 고등학교 생활도 의미심장하지만 고등학교 생활은 그에게 다른 몇 가지 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우선은 텔레비전에서 본 북한 영화 <춘향전>을 통해서 ‘코레야’란 나라에 대해 처음 들어봤단 것. 그 영화에 빠져서 한국 고전소설 번역판을 닥치는 대로 구해서 읽었다는 것.(당시 소련은 이북과의 특수 관계 때문에 조선학에 투자를 많이 해서 조선책을 많이 구할 수 있었다 한다. 그 조선책을 번역한 사람 중에 임수라는 고려인 지식인이 있었는데 나중에 박노자의 레닌그라드 대학 동방학부 은사가 된다. 그는 홍범도가 이끄는 항일 유격대의 부대원으로 러시아로 옮겨온 1세 교포의 아들인데 소련 정권의 고려족 탄압을 겪었으면서도 빈농의 아들인 자신이 한문학을 하게 된 것에 대한 긍정만은 잃지 않았다. 그는 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갈망했다. 박노자는 자신의 사랑하는 은사를 한국에 모셔오지 못했던 점을 두고두고 죄스러워했다.) 책에 빠져 있던 사춘기 소년으로 한국 여배우들이 예쁘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 둘째는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부패한 관료층과 상층부에 대한 저항 심리였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 아프간 양민 학살에 대한 혐오였을 수도 있고, 한편으론 유태인 시오니즘에 대한 실망으로 더 평화적인 종교를 모색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술회했다.



 

 

 

《법구경》《수타니타파》 초역본 같은 원시 불교 주요 경전들은 이미 1960년대에 소련의 산스크리트어(범어) 학자들에 의해 번역되고, 불교에 심취한 학생들의 필독서였지요. 그때에 소련군이 (지금의 미군처럼) 아프간에 불법 침략하여 거기에서 민간인 살육을 막 하고 있었는데, 침략 현장에서 돌아오는 제대 군인들이 (지금의 미군처럼) 자살도 하고 또 악몽에 시달리다 못해 남에 대한 폭력으로 자신의 한을 풀기도 했어요. 그때 소련에 마약이 돌게 되었지요. 제 친구들의 형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죠. 그러기에 제가 ‘폭력’이라는 화두에 걸리게 됐어요. 또 소련에서 ‘애국 전쟁 영화’(일종의 군사주의적 국책 영화)를 많이 보여주었는데, 거기에서 군사적인 폭력을 보다 못해 폭력에 대한 ‘혐오’를 갖게 됐지요. 그리고 89년 무렵엔 동독이 무너지면서 이젠 곧 뭔가 일어난다는 불안감이 퍼져 있어서 사람들이 불교에 관심을 많이 가졌어요.”

그의 꿈은 레닌그라드 대학교의 동방학부 인도학과나 티벳 학과에 가서 산스크리트어와 불교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티벳 학과는 경쟁률이 무척 높아서 (대략 14 대 1 정도) 뇌물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단 소문까지 돌았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이 바로 조선학과.

“티벳 학과가 인기가 높았던 것은 당 간부 자식들이 미국 중산층 흉내를 많이 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때 미국에선 라마교 티벳 불교가 인기였으니까요. 동양학부 조선사 학과 경쟁률이 6 대 1이었어요. 대학 때 불교 경전 러시아어로 번역된 것은 다 읽었어요. 불교는 근본적으로 말을 초월한 가르침이죠. 불교의 목적이란 ‘아상(我相)’, 즉 ‘나’라는 존재가 실재한다는 환상을 없애고 아집과 아집으로 인해서 생기는 탐진치(貪瞋痴)를 벗어나 남과 ‘너, 나’ 없는 하나의 수행자 공동체(상카僧伽)를 이루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사회주의도 마찬가지지요. 개인의 이윤 추구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에서 공익을 같이 추구하는, 보다 발달된 사회로 이동하자는 것으로 보였어요. 사회주의를 모색하는 것도, 남의 허물보다 자신과 도반(道伴)의 허물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 것도 부처님이 설하신 기본적 가르침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불교만큼이나 그가 심취했던 것은 한문학이었다. 그에 대해선 그의 책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잘 표현되어 있다.

부운(浮雲, 떠다니는 구름), 고봉(孤蓬, 외롭게 떠다니는 다북쑥), 공담(空潭, 인기척이 없는 못) 같은 세상의 무의미함과 변화무쌍함과 고적을 찾으려는 일종의 귀소본능을 담은 한시의 술어들이 내 머리를 떠난 적이 없었다. 이남과는 아직 관계가 없었고 이북에도 가기가 그리 쉽지 않던 그 시절 나는 ’샘물소리 높은 바위틈에서 흐느끼고 햇빛이 푸른 솔에 차갑기만 한‘ 명시 속 산수의 실제풍경을 내 눈으로 직접 감상할 날이 오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중에 관악산과 도봉산에 오르면서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격을 느꼈다. 샘물이 흐느끼는 계곡을 볼 때마다 구름이 낀 봉우리를 볼 때마다 내가 외우던 그 시 속의 정경이 선연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중에서)

그가 한시를 외우며 노닐던 1988년부터 1991년 사이에 세계는 완전히 노닐며 놀고 있지 않아서 소-남 관계가 공식화되고 김영삼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전격 방문하게 된다. 애초에 김일성 종합대학에 가게 되어 있던 그의 운명 역시 바뀌어서 그는 1991년 9월 갑자기 고려 대학교에 오게 된다.



 

 

“한국에서 행복했던 것은 동양 고전을 한자로 읽었단 거예요. 《장자》를 제일 좋아했어요. 종로서적이란 데 가서 사서 고려대 친구들과 읽었어요. 장자의 곱사등이 이야기 아시지? 곱사등이를 모든 세인들이 불쌍하게 여겼는데 전쟁이 닥치니 남정네들 다 징발되고 곱사등이는 곱사등이니까 징발 안 되고 살아남아요. 즉, 쓸모없는 것은 좋은 것이다.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지면 행복하다. 이런 게 좋았어요. 또 좋아하는 장자의 이야기는 죽음 이야기예요. 한 사람이 죽었는데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데 사실은 죽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죽으면 나의 도는 우주의 도와 합치되고 결국 나는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전 우주에 퍼지고…. 장자는 지금도 가장 읽고 싶은 책이에요.”

《장자》를 읽어본 사람은 그가 말하는 곱사등이 장면과 유사한 장면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에 대한 장자의 생각은 곡원 땅 상수리나무의 입을 빌려서 이렇게 표현된다. “나는 쓸모없기를 오랫동안 추구해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부족함에 남몰래 애간장을 태우며 부끄러워하는 우리로선 장자의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에 대한 생각이 반갑다. 이런 경우의 해답은 외부에 초연해서 시간과 함께 변화되어 자아를 잊는 것일지 모르니.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에 관한 한 내가 좋아하는 예문은 조롱박을 어린아이에게 주는 비유다.

“자네가 큰 조롱박을 세상일에 어두운 어린아이에게 주면 그것으로 물을 담거나 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반드시 그것을 물에 띄워놓고 가지고 놀 것이네. 왜냐하면 조롱박을 물을 담거나 푸는 데 사용하는 것은 사람들이 발명한 것이지 결코 조롱박의 천성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볼 때 그것의 쓸모 있음에만 눈독을 들일게 아니라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을 생각하라는 것은 거룩하기까지 하다. 박노자가 장자의 곱사등이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가장 심각한 비관주의자가 어쩌면 가장 철저한 낙관주의자일 수 있다.”“무심하게 버드나무를 꽂았는데 버드나무가 그늘을 이루었네.” “세계에는 본래 길이 없는 것이니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바로 길이 되고 사물에는 본래 이름이 없는데 부르는 사람이 많으면 이름이 있게 되네.”인 것 같다.

하지만 장자를 사랑하는 사회주의자라니?

“장자는 한국 사회에서 ‘신비주의’로 오해되는 부분은 있지만 실제로 ‘무위’ ‘무용(無用)’ 등은 ‘백성을 공연히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도 해요. 노자와 장자는 권력 관계가 많이 완화돼 거의 없어진 공동체적 사회를 이상사회로 보고, 과도한 착취와 전쟁을 반대했지요. 장자 이야기 중에서는 꼽추 지리소의 이야기 말인데요. 여기에서 ‘외모’보다 ‘내면의 덕’을 중시하라는 메시지도 있지만 징병에 대한 공포와 반감, 차라리 꼽추가 돼서라도 징병을 피하고 싶은 평민들의 마음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제게는, 장자는 인류 역사 최초의 아나키스트지요.”

고려대에 있다 소련으로 돌아갔을 때 그의 나라는 신생 러시아로 바뀌어 있었다. 나라가 바뀐다는 것은 젊은 사람들의 꿈도 바뀐다는 의미까지를 포함한다. 어린 시절 그의 친구 중 하나의 꿈은 트럭 운전사였다. 트럭 운전사가 되어서 국경선을 넘어 봉쇄된 나라를 넘어 핀란드까지 죽기 전에 한 번 가보는 게 꿈이었다. 이제 신생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외국계 회사에 취업하기나 미군부대에 근무하기를 꿈꾼다. 박노자는 후배들이 “꽃들이 난간 앞에서 웃어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같은 시를 감상할 줄 모르고 살게 된다면, 그 또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지키지 못한 탓이라 생각한다.

신생 러시아 탄생 이후 그의 삶은? 1995년 통역 일을 하다 만난 한국인 러시아 유학생과 결혼하고 경희대에 노어과 교수로 왔다가 3년 만에 귀화해서 한국인이 된다. 모스크바 유학시절 스승 미하일 박의 성을 따라 박 씨 성을 갖고 러시아의 아들이란 의미의 ‘노자’를 이름으로 스승에게 하사받게 된 박노자는 결국 한국에서 교수직을 구하지 못해 오슬로로 떠난다. 그는 현재 오슬로 대학의 한국어 및 동아시아 역사 담당 부교수다. 한국인 자격으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을 마지막으로 더 소개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다. 아쿠다카와 류노스케다. 아쿠다가와가 스물아홉 권짜리 《곤자쿠 모노가타리》를 읽고 모티브를 얻었다는 「나생문」의 여러 이야기들 중 잊혀지지 않는 것은 황폐한 라쇼몽의 다락방에 앉아, 죽은 남편의 시체 옆에서 머리카락을 뽑아 가발을 만드는 노파의 이야기지만 박노자가 좋아한 것은 내 생각엔 「어릿광이 난쟁이의 기도」 같다



 

저는 이 색깔을 물들인 옷을 입고 공중제비 재주를 바치며 태평을 즐기면 부족함이 없는 어릿광대입니다. 제발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제발 쌀 한 톨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발 곰발바닥 요리마저 싫어질 정도로 부유해지게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제발 뽕잎을 따는 시골여자조차도 싫어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제발 후궁의 미인마저 사랑하게 하지도 말아주십시오.
제발 콩과 보리도 구별 못할 정도로 어리석게 하지도 말아주십시오. 제발 하늘을 떠도는 기운을 살필 정도로 총명하게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중에서도 제발 용감한 영웅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
제발 영웅이 되지 않게, 영웅의 뜻을 세우지 않도록 힘없는 저를 지켜주십시오.
저는 이 봄날 술에 취해 이 청춘의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좋은 날을 기뻐하면 부족함이 없는 난쟁이입니다.

(『쓸쓸함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으랴』 중에서)

아쿠타가와는 인생의 상처를 견디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동정과 익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생각에 맞아떨어지는 시란 생각이 든다. 그가 일본 최초로 쌍칼을 사용한 검객이자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단 미야모토 무사시를 읽고 쓴 글도 명언이다. 무사수업 - 나는 지금껏 무사수업이란 사방의 검객들과 승부를 겨루며 무기를 닦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야, 사실상은 자기 자신만큼 강한 것은 세상에 별로 없음을 알았다.

내친김에 젊은 나이에 자살을 해버린 아쿠타가와의 명언 몇 가지는 더 소개하고 싶다.

나는 불행히도 안다. 때로 거짓말에 의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진실도 있음을.

천국의 백성은 무엇보다도 위와 생식기가 없으리라.
가장 두드러진 자기혐오의 징후는 모든 일에서 거짓말을 찾아낸다는 점이다.
인생은 낙장이 많은 책과 비슷하다. 한 권을 이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쨌든 한 권을 이룬다.


한국의 《한겨레》 신문이나 《가디언》, 노르웨이 신문을 읽느라, 깨어있는 시간의 40%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는 그에게 책은 타자와의 소통. 타자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타자와의 소통이란 오스카 와일드 식으로 말하면 ‘결국 우리의 삶이 아닌 서로의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에 대한 긍정 아닐까 싶다. 오스카 와일드의 또 다른 말도 있다. ‘도덕은 불완전한 매개체를 완전하게 사용하는 것’이란 거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이 말이 자꾸 생각났다. 우리의 매개체가 불완전함을 누가 그만큼 잘 말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지구에 미련이 있다면 누구나 귀를 기울여야 할 그 소리들.

어쨌든 내 눈에 박노자는 봉쇄된 도시에 살았던 날개 달린 방랑자였다. (물론 날개는 책이었다.) 방랑자는 그 도시의 설명할 수 없는 속성 때문에 오히려 무한히 배운 사람인데 그는 항상 두 가지씩을 동시에 배운 것 같다. 지식과 무지. 열렬함과 무관심, 들끓음과 평온함. 불일치와 확신. 폭력과 평화. 갈망과 관찰. 거대한 우주 앞에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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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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