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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시간을 함께한 친구들

우리가 흔히 어렵고 힘든 산행의 여정을 인생에 비유하듯이 길고 긴 횡단열차의 시간들을 겪고 나니 그 과정 역시 대략 인생과 닮아 있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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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팍팍하고 먼 길이라도 결국 달콤한 휴식은 찾아오게 마련이고 종착역을 만나게 된다.

아이는 순수이며, 망각, 새로운 시작, 하나의 놀이, 스스로 구르는 바퀴, 태초의 움직임, 거룩한 긍정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러시아의 영화나 소설 등에는 유난히 기차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가 많다고 한다. 여기서 기차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뜻하겠는데 지구의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을 향해 달리는 1만여 킬로미터의 길고도 지루한 기차 여행에서 한창 때의 선남선녀가 같은 칸에 자리 잡는 설정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진부한 로맨스 한 가닥 정도는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TSR, Trans-Siberian Raiload.

젊은 날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고골과 체호프의 열혈독자였을 때부터, 후일 차이콥스키나 돈 코사크 합창단, 레드 아미 코러스의 음악에 심취한 동안에도 나의 꿈은 단연 횡단열차를 따라 황량하고 드넓은 시베리아의 거친 땅을 달리고 있었다. 사형을 면하게 된 도스토옙스키가 유배를 떠나 위대한 명작들의 씨앗을 키운 땅, 비운의 여인 카튜샤가 절망과 슬픔을 딛고 마침내 화려한 ‘부활’을 꿈꾸는 땅, 톨스토이의 민화나 아름다운 러시아 민요들이 잉태되고 자라난 민중의 땅. 그러므로 시베리아는 동토와 불임의 땅이 아니라 부활과 재생의 땅인 것이다. 실제로 이 땅은 숱한 자연광물과 자원을 감추고 있어 인류의 마지막 보루라고도 불린다.

시베리아 횡단에 대한 계획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마침내 시베리아로 떠나게 된 날은 그 비현실감에 하루 종일 감격했던 날이다. 흡사 가까스로 선택을 받아 달나라행 티켓을 구하게 된 사람이 마침내 은하철도 999에 올라타게 되는 장면이랄까. 적어도 살아가는 동안 간절히 소망했으며 과연 이루어질까 의구심을 가졌던 소원 하나쯤은 이루고야 만 것이니 말이다.

러시아의 극동항 블라디보스토크와 수도 모스크바를 오가는 횡단열차의 소요 시간은 6박7일가량. 모두 일곱 개의 시간대를 통과하는 구간을 지나면서 여행자는 곧 시간과 요일을 까맣게 잊게 되고 낮과 밤이 뒤바뀌는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경험을 겪게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뿐더러 너무도 지루한 여행이 될 듯하여 노선의 3분의 2쯤에 해당하는 바이칼 호수의 도시 이르쿠츠크에서 열차에 오르기로 계획을 세웠다. 중간에 올라탔다고는 하지만 거기서 모스크바까지도 꼬박 5박6일의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계절은 얼어붙었던 시베리아 땅이 따듯한 햇살에 일제히 녹아내리면서 황량했던 들판에 아름다운 빛깔의 들꽃들이 일제히 피어나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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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에서 나그네는 카튜샤나 나타샤 같은 여성을 만나 로맨스 하나 만들진 못했지만 같은 열차 칸에 탔던 아이들과 함께 많은 러시아 사람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무뚝뚝하고 뻣뻣한 러시아 사람들이긴 하지만 5박6일 동안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낯선 나그네의 존재는 그들에게도 차츰 친근하고 익숙하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같은 객실을 함께 사용하던 비행사 출신의 미하일은 하루 종일 낯선 나그네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 일 없이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다가 저녁에 보드카를 몇 잔 들이켜면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는 양 수다를 떨다가 심지어는 징그럽게 포옹까지 해왔다.

크라스노르야스크에서 내린 정교회 신부는 할리우드 영화의 악역 배우를 꽤 닮았는데 마음씨만큼은 천사 같았다. 기차 복도에서 밤새 러시아의 신앙과 삶에 대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열차엔 아이들이 있었다. 4인실 객실이 10여 개 모여 있던 한 칸의 열차 칸에서 아침에 눈을 떠 밤에 잠들 때까지 아이들은 홀로 떠나온 나그네의 절친한 벗이 되었다. 몽골계 브리야트족인 까닭에 겉모습도 한국인이나 몽골 사람과 흡사하게 닮았던 두이안나, 3남매의 맏딸인 새침한 안줄르카와 그의 개구쟁이 동생들인 마르크와 오르춤. 그들은 모두 학교에서 배운 서툰 영어로 나그네에게 힘겹게 말을 붙여왔는데 기껏 하는 말이라야 인사말이나 이름과 나이를 묻는 말, 자신을 소개하는 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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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한창 달릴 때면 열차 칸의 복도에서, 열차가 멈춰 서면 모두 플랫폼에 나와 서성이면서 아이들은 나그네와 멀지 않은 곳에 늘 함께 있었다. 점점 사이가 가까워지자, 뭔가 맛난 것이나 재미있는 것이 생기기라도 하면 나그네의 객실 문을 과감히 열고 들어왔던 아이들. 그들이라도 없었다면 나그네의 5박6일 기차 여행은 끔찍한 유형의 시간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마침내 아직 바깥에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어마어마한 길을 쉼 없이 달려온 횡단열차가 종착지인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 역에 긴 몸뚱이를 천천히 들이밀자 같은 칸에 있던 아이들은 모두 말끔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어느새 정숙한 아이들이 되어 하나 둘 플랫폼 쪽으로 내려갔다. 모두 그 긴긴 여행을 함께 멋지게 치러냈다는 성취감을 똑같이 느낀 것일까, 홀로 배낭을 둘러멘 채 동터오는 플랫폼을 향해 걸어가는 나그네를 향해 아이들은 자꾸만 고개를 돌려 작별인사를 건네왔다. 그러곤 이내 모스크바의 군중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맘이 허전했다. 여행에서 만난 이들에게 잠시라도 깊은 정을 주는 게 어리석은 일인 걸 알면서도, 나그네는 그만 또다시 어리석은 며칠을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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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어렵고 힘든 산행의 여정을 인생에 비유하듯이 길고 긴 횡단열차의 시간들을 겪고 나니 그 과정 역시 대략 인생과 닮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팍팍하고 먼 길이라도 결국 달콤한 휴식은 찾아오게 마련이고 종착역을 만나게 된다. 어느새 피어난 사랑과 연민을 어쩌지 못한 채 종당에는 아쉬운 작별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아이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긴 여정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우리의 긴긴 인생의 여정에도 이렇듯 꾸밈없는 아이들이 곁에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딱딱한 시간들로 채워질 것인가? 인생은 아이들이 있으므로 행복하다. 나도 아이였고 그 누구도 모두 아이였을 테지만 어쨌거나 아이들은 우리네 인생에 샛별과 같고 단비와 같고 축복과도 같은 존재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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