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108명 아이돌 이야기, 중국 4대 기서 - 『수호전』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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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 기서라고 하면 『삼국지』『수호전』『서유기』『홍루몽』을 꼽습니다. 이중에 가장 대중적인 소설이라면 무엇을 뽑을 수 있을까요? 물론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은 『삼국지』『수호전』이 가져갈 수 있겠습니다.

『삼국지』가 국가의 성립과 통일을 위한 전쟁을 그려난 메타 서사시라면, 『수호전』은 그 다루는 주제가 매우 미시적이고 민중의 삶 가까이에 있는 주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관우, 장비와 같은 불세출의 호걸들이 나오는 이야기가 주는 호쾌함이 있다면, 『수호전』에서는 바로 옆 동네 저잣거리의 유명인사가 등장해 펼치는 일종의 '길거리 액션' 류의 호쾌함이 있다는 차이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삼국지』 읽어본 사람은 흔해도, 『수호전』의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어느 정도 꿰고 있는 사람은 쉽게 만나기 어렵습니다. 막상 읽으면 오히려 『삼국지』의 인물들보다 친숙하게 다가오는 수호전을 접해보면, 사람이 사람을 보는 방식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더 늘어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수호전』은 기본적으로 인물에 근거하는 소설입니다. 배경은 중국 북송 말기로 하고 있지만, 역사적인 맥락이 『삼국지』처럼 크게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소설을 풀어가는 기본 뼈대는 크게 두 가지인데, 이른바 108명의 호걸들이 저마다 각자의 사연을 품고 ‘양산박’이라는 근거지로 모이게 되는 이야기들을 옴니버스 형태로 묶어낸 전반부와, 그들이 모여 황제의 명을 받고 반란군을 토벌하러 다니는 후반부입니다.

108명의 주인공이 가진 성격과 배경은 정말 제각각이고, 바로 여기서 『수호전』의 매력이 나타납니다. 108명을 총괄하는 두령인 송강宋江은 본래 산동 지방의 말단 공무원이었습니다. 중반부터 이야기의 재미 요소가 되는 인물인 흑선풍黑旋風 이규는 강주의 간수 출신이고, 시골 마을 경찰로 살다가 사람을 죽이고 승려가 된 화화상花化尙 노지심과 같은 캐릭터도 등장합니다. 동네 주막집 주인, 어부, 필경사, 도장 파기의 달인, 나무꾼, 날건달을 비롯해 하다못해 도둑질의 달인까지도 108명의 범주 안에 들어가 북송 말기의 많은 직업군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 하나하나가 양산박이라는 근거지로 모이게 되는 사유도 그래서 제각각입니다. 왕실 호위군의 무예 사범이던 표자두彪子頭 임충은 당대의 간신 고구로부터 미움을 사 가족을 모두 잃고 양산박으로 도망쳐 오고, 행자行者 무송은 바람난 형수와 정부가 형을 독살한 사실을 알고 두 사람을 죽인 뒤 도망쳐 옵니다. 입운룡入雲龍 공손승을 포함한 일곱 사람은 고위 관료의 비싼 생일선물을 통째로 강탈한 뒤 양산박으로 도망쳐 오기도 합니다.

가지각색의 다양한 사람들이 양산박으로 흘러들어오기까지 겪은 이야기들과, 그들이 마주한 문제를 양산박 108인이 가진 능력과 지혜로 해결해 가는 모습들이 『수호전』의 핵심적인 줄거리입니다. 이들은 옥에 갇힌 동료를 구하기 위해 가짜 공문서를 위조하기도 하고, 사형집행의 위기에 놓인 동료 구출을 위해 축제일에 맞춰 전 인원이 변장하고 북경으로 잠입하기도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모험 같은 작전들을 펼쳐 갑니다. 『삼국지』처럼 백만 대군이 몰려다니는 웅대한 스케일이 아니라, 시급을 다투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108명의 인물로 해결해 가는 퍼즐 게임과도 같은 재미를 제공합니다.

어찌 보면 정말 도둑놈 집단에 떼강도로 비춰질 수 있는 이런 108명의 무뢰한들은 그러나 중국 전통의 가치, 충효에 근거한 각색을 통해 인의가 가득한 집단으로 거듭납니다. 최종 편저자인 시내암은 총두령 송강의 캐릭터를 유교적 가치에 충실한 인물로 그려내어 양산박을 도둑 소굴이 아닌 억울한 호걸들의 피신처로 바꿔 줍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숨어버린 이들은 항상 황제가 자신들의 충심을 알아주어 사면해 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마침내 그 뜻이 이루어지면서 충의의 가치는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사실을 다시금 소설 속에서 보여줍니다.

결국 황제로부터 사면(이 사면도 양산박 108인 중 첩보와 외교에 능한 인물들이 만들어 낸 작품입니다)받고 관군으로 편입된 이들은 요새를 떠나 요나라 정벌, 반란군 토벌 등에서 다채로운 활약을 보여줍니다. 그 와중에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는 이들과 속세를 등지는 이들이 나타나고, 모든 정벌이 끝난 뒤 간신들에 의해 송강이 독살당하면서 『수호전』은 막을 내립니다. (시내암의 원판 120회본에서는 송강의 죽음이 끝이지만, 다른 저자에 의한 『후 수호전』에서는 생존 인물들의 후기를 이어갑니다.)

중국 평민층을 다룬 영화들을 가만히 보면 어딘가 모르게 시끌벅적하고 난삽한 분위기가 없지 않은데, 『수호전』에서 묘사하는 108명의 일상들이 대개 그러합니다. 충의를 기반으로 도덕적으로 갖춰진 송강마저도 동네 뚜쟁이 노파의 꼬임에 넘어가 첩을 두었다가 살인에 연루되는데, 이것도 결국 저잣거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건들은 화려한 궁중이나 회랑이 아니라 동네 시장바닥에서 일어나고, 또한 그 시장바닥에서 해결됩니다. 이러한 소란스러운 듯한 분위기는 소설 전체를 지배하며, 편저자의 문장에 의해 시끄러움이라기보다는 친근하고 낯설지 않은 편안함이 되어 독자들에게 다가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던, ‘가장 대중적인 소설’로서의 자리매김은 바로 이러한 『수호전』의 특성에서 기인합니다.

그렇게 대중적인 기반이기에 『수호전』은 민중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절절하게 반영합니다. 양산박 영웅들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북송 말기 유약한 황제를 둘러싸고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고구, 채경을 중심으로 한 간신배들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이들에 의한 국정 황폐화와 이에 따른 민생 불안은 나타난 바 있는데, 바로 이러한 관료층에 대한 불안과 불만은 상대적으로 이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도둑떼들에 대한 동경으로 나타납니다. 양산박은 간신들과 척을 진 인물들이 많았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어 실제 역사 속에서의 수적 소굴이 아닌 의적 집단이 되었고, 한국의 임꺽정이나 홍길동과 같은 민중을 대변하는 모습이 된 것입니다.

단순히 정부에 대한 불만만이 서민층의 시각은 아닙니다. 그들이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접하는 강도와 불륜, 산적들의 횡포도 『수호전』의 주된 이야깃거리이며, 지방 관료들의 탐관오리 짓 또한 양산박에 의해 응징되는 모습을 수차례 보여줍니다.

이러한 혼란한 시대상은 북송 멸망 직전의 시대상 그대로입니다. 혼란한 시기의 어지러운 모습 속에서 억울함과 괴로움을 호소하는 민중들의 목소리는 소설 『수호전』 속에 때로는 풍자와 비유로, 때로는 직설적인 묘사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런 혼탁함 속에서 민중은 기댈 만한 아이돌을 염원했고, 그러한 염원은 산동 지방의 도적떼 이야기를 서서히 영웅담으로 각색해 가며 108명의(108이라는 숫자는 36 천강성과 72 지살성의 별자? 수로, 신성함을 상징합니다) 하늘이 내린 의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저자 시내암은 그렇게 떠돌아다니던 양산박 관련 민담과 에피소드들을 하나하나 채집해 엮어 총 120회본의 연극 대본으로 완성시켰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우리가 이어 보는 『수호전』의 원전이 됩니다. 어찌 보면 명확한 저자가 있는 이야기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난세 속에서 영웅을 기다리던 민중들의 입담 속에서 나온 이야기가 『수호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혼탁한 세상에서 사람들의 소망이란 건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경제가 어렵다는 수십 년의 목소리 속에서 경제 영웅으로의 이미지를 살려 낸 새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서민들은 많은 기대를 갖습니다. 조금 차이라면 『수호전』의 아이돌은 이야기로 남았지만, 지금 시대 경제 살리기의 역사를 걸머진 아이돌은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이겠지요. 소설 속 아이돌이 민중의 카타르시스를 대리했던 만큼만 현실에서도 이루어진다면 즐거운 5년이 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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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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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tc

2020.08.16

2명 신청합니다. 만난지 얼마안된 남친이랑 같이 듣고 싶어요^^ 저 또한 클래식 음악 전공이라 관심이 많이 가는 강연이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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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jrkr

2020.08.14

꼭 보고싶어요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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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a625

2020.08.12

2명 신청합니다. 요즘 그 어느때 보다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클래식이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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