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마녀의 어린이책 요리하기
배가 고플 때, 사랑이 고플 때 혹은 배가 부를 때, 사랑을 토해내고 싶을 때
나는 요리를 끊었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제는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내 사랑의 극진한 표현으로서 나만의 요리법을 개발해 바친다
‘누구나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옛 식당 주인 구스토의 모토에 심기 불편한 최고의 음식비평가 안톤 이고의 이미지는 뮈리엘 바르베르 소설 속 주인공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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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여자는 피카소 화집의 마지막 페이지에 나온 <뱀장어 스튜(La matelote d'anguilles)>에서 오래오래 시선을 머뭇거렸다. 그런 다음 『피카소의 식탁』이라는 책에서 인용되었다는 ‘자끌린의 뱀장어 스튜 조리법’을 읽으며 생각에 빠져든다. 여자의 관심을 끈 것은 4인용 스튜에 들어가는 식재료인 ‘1.2킬로그램의 뱀장어, 2큰술의 올리브유, 당근 2개, 양파 2개, 굵은 대파 2개, 샐러리 2쪽, 마늘 3통, 버터 100그램, 월계수 1장, 향초 약간……’ 등이 아니었다. 여자는, 자기가 탐했던 여인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봐줘야 직성이 풀렸던 지독한 난봉꾼인 파블로 피카소의 마지막 여인, 자끌린에게 온통 생각을 집중했다. 1960년 12월 3일, 자끌린은 여든 살의 피카소, 이 늙은 나르시시스트를 위해 난교하듯 서로의 몸을 한데 엮은 뱀장어 세 마리를 사온 뒤, 시리도록 날이 선 칼로 푸른 빛 도는 싱싱한 몸뚱이들을 표정 없는 얼굴로 단호하게 내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여자는 자기현시욕이 강했던 피카소가 그림 밑에 써놓은 “이 그림을 바침으로써 그녀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만 한다면”의 글귀에서 마지막 여인을 향한 대(大)화가의 예의를 느낀다. 에바, 올가, 마리-떼레즈, 도라, 프랑소와즈, 자끌린…… 자신을 거친 여인들의 초상은, 그림만으로는 도무지 누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뒤틀리고 꺾인 형상으로 화집 속에 진열되어 있다. 허나, 소설 속 여자는 화집 맨 마지막 그림에서 한평생 여성들의 질투심을 미끼로 자신의 창작 연료를 태웠던 이 늙은 화가로부터 식어 뭉근해진 미열을 애틋하게 짚어낸다. 그러면서 소설 속 여자는 혼잣말한다. “인생이란 화려하지도, 더군다나 장엄하지도 않으며 다만 뱀장어의 몸부림과 같은 격정을 조용히 끓여 내는 것은 아닐까……. 스튜 냄비의 밑바닥처럼 뜨거움을 견디고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들 때” 여자는 이슬비 내리던 파리 근교의 낡은 아파트 부엌으로 조용히 들어서던 날, 자신의 씁쓸함을 떠올린다.
소설 속 여자처럼 질긴 연애를 해본 적도, 두 남자 사이에서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해 본 적도 없는 나는 서로의 미끈한 몸을 엮고 또 엮는 끈끈한 뱀장어들의 몸통을 사정없이 내리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나라면, 자끌린처럼 늙고 기운 빠진 오입쟁이를 조용히 조롱하기 위해 은근한 불에 저 생기 가득한 뱀장어 세 마리의 날몸이 서서히 녹아드는 고통을 주는 수동적인 가학을 즐기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든 노인은 정력에 좋은 음식 하나로 감탄하고, 평생 그 누구에게도 나눠주지 않았던 영원한 사랑까지 바치려 했다. 아, 모순된 인생의 비릿함이여! 피카소의 발정난 눈빛, 테스토스테론이 터져버릴 듯이 탱탱한 근육은 주체 못할 정욕으로 꿈틀거리는 뱀장어 같아, 나는 이 둘을 혐오한다. “냄새 나는 것들!”은 내가 하는 욕이다. 그런데 그것들에 올리브유를 더하고, 당근과 양파를 썰어 넣고, 대파와 샐러리, 마늘로 간을 한다면, 무슨 냄새가 날까? 나는 권지예가 소설 속에서 소개한 레시피를 읽고 또 읽으며 코를 킁킁거린다. 요리 막바지에 월계수잎과 약간의 향초로 비린내를 없앤다고 하지만, 검은 피부의 흰 살덩어리, 붉은 야채와 푸른 이파리들이 섞이는 묘한 냄새. 그 흔적을 가리기 위한 강한 향신료의 쌉쌀한 거짓부렁.
별난 식도락가가 아니더라도 남도 사람이라면 그들만의 잔칫상에 오른 홍어삼합과 애(내장)국만으로도 귀빈 대접을 받은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지게 마련이다. 결혼식장에 차려진 상이든, 장례식장에 차려진 상이든, 톡 쏘는 맛의 홍탁과 누른 돼지삼겹살과 묵은 배추김치와 곁들여지는 탁주의 취기는 된장 풀어헤친 물에 희멀건 애(내장)를 섞은 애국으로 쉬이 가신다고 믿는 그들이다. 어제 나는 전라도 보성 갑부 노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갔었다. 흑산도에서 잡았다는 날홍어회가 진분홍빛 속살을 드러내고 상 위에 차려지자마자, 적어도 마음만은 경건한 척 예를 표해야 마땅한데도, 남정네들의 낯빛이 발그레해졌다. 군침 흘리는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으되, 서두르는 젓가락질. 오독오독 튕기는 속살의 맛에 쏙 빠진 그들이 펼쳐내는 각자의 무용담들. 우습게도 그들의 모습은 작살을 들고 배 난간에 기댄 수컷들처럼 원시적이다. 호상(好喪)난 부잣집 상에 오른 하이라이트는 서울에서는 여간해서는 맛보기 어렵다는 애(내장). 노리끼리하고 흐물거리는, 형태조차 묘한 그 맛을 익히 아는 남도 남정네들은 때도 장소도 모르고 굵은 소금과 참기름을 찾았다. 당장 거나한 풍악과 호리한 몸매의 여자들은 옆에 없지만, 그 아쉬움을 상쇄시켜주고도 남는 엑스터시 덩어리를 입속으로 밀어 넣고 오물거리는 그들의 황홀한 표정이란! 상주는, 글 쓰는 이라면 보지만 말고 먹어도 봐야 한다며 애란 것을 조금 떼어 내게 건넸다. 낯선 음식에 대한 거부감의 진짜 원인은 두려움이다.
예의상 입 안에 받아들인 애의 첫맛은 쓰다. 혀에 닿는 찰나, 전두엽 피질을 자극해 맛에 대한 기억 하나를 불러냈다. 테트로도톡신(Tetrodotoxin)의 톡 쏘는 맛에 홀려, 목숨 걸고 복어를 즐긴다는, 내가 아는 중년의 사내가 떠올랐다. 진짜 황홀한 복어의 맛을 위해, 노련한 주방장은 먹는 이가 죽지 않을 만큼의 테트로도톡신을 살짝 묻혀 내놓을 줄 안다고 말했다. 찌릿하게 신경을 슬쩍 마비시켜, 아랫입술 밑으로 ‘주룩’ 침이 흘러도 복어의 독이 좋다는 약골의 중년 사내가 남긴 말이라, 떫다. 그의 말처럼 떫고 쓰고 짭짜름한 애물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동안, 메추리에 6가지 소스를 얹은 ‘카이유 엉 사르코파주’와 캐비어를 얹은 블러디 드미로프, 여기에 곁들여지는 뵈브 클리코 샴페인의 섹시한 거품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날려버리는 바베트가 떠올랐다. 한때는 파리의 카페 엥겔레 요리사였던 그녀가 만들어준 별난 요리의 황홀경에 빠진 칼뱅적 엄숙주의자들이 마녀의 음식이라는 경계를 거뜬히 물리칠 정도로 매혹적인 낯선 만찬을 통해, 지금껏 스스로를 옮아 맨 금기의 허리끈을 풀어버렸다. <바베트의 만찬>은 ‘카이유 엉 사르코파주’의 맛을 기억하는 아킬 파핀과 그와의 사랑을 추억하게 된 필리파를 통해, 치유로서의 음식, 사랑의 매개체로서의 식사를 보여준다. 북유럽 특유의 우중충하고 근엄한 분위기에 서늘했던 목사관은 바베트의 요리상을 통해 부드러움이 넘실거리고, 심지어 농담과 웃음이 넘쳐나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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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픽사의 디지털효과로 선보인 애니메이션에서 진정한 요리사는 인간이 혐오하는 동물 중 하나인, 비위생의 대표격인 쥐 레미다. 토마토, 호박, 양파, 가지 등을 끓인 가장 평범한 야채 스튜인 ‘라따뚜이(ratatouille)’로 위기에 놓인 구스토 식당의 명성을 회복한다. ‘누구나 요리할 수 있다‘는 전 식당 주인 구스토의 모토를 요리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긴 최고의 음식비평가 안톤 이고는 신랄한 악평과 함께 구스토의 식당을 문 닫게 하려던 속셈이었지만, 쥐 레미의 총 지휘 하에 만들어진 가장 평범한 음식 ’라따뚜이‘에서 어린 시절 맛본 그 맛을 기억해내고 단골이 된다. 구스토의 친아들 링기니는, 배고프다며 아무것이나 집어 먹지 않는 타고난 요리사 쥐 덕분에 최고의 요리사로 등극하고, 식당 주인이 되고, 사랑하는 연인까지 얻는 전형적인 해피엔딩 스토리다.
‘누구나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옛 식당 주인 구스토의 모토에 심기 불편한 최고의 음식비평가 안톤 이고의 이미지는 뮈리엘 바르베르 소설 속 주인공과 유사하다. ‘먹는 것은 쾌락의 행위이고 이 쾌락을 글로 쓰는 것은 예술 활동이’(88쪽)라고 믿는 두 음식비평가들은 진정한 요리사란 ‘보통 사람이 경험과 숙고를 통해 아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61쪽)’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둘은 진정한 요리사라 할지라도 ‘그의 오감을 동원할 때에만 온전한 요리가일 수 있다’고 보며 ‘하나의 요리는 시각, 후각 그리고 미각에서 기쁨을 주어야 하지만, 요리사의 선택을 좌우하고 요리의 향연에서 큰 역할을 하는 촉각에서도 기쁨을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라따뚜이>는 비록 애니메이션이지만, 애니메이션이기에 바쁘게 돌아가는 고급 식당의 부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분주함 속의 기계적일 만큼 잘 조직된 역할 분담, 도제 분위기 속에서 권력의 분담, 모든 창의성은 오로지 쉐프만이 발휘할 수 있는 비인간적인 속성 등등은 오히려 배우들이 연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노골적으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펠리시티 브룩스와 키이스 뉴웰이 글을 쓰고 조 리치필드가 그림을 그린 그림책 『요리사가 되고 싶어』가 떠올랐던 것도 고급 식당의 부엌 모습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 속의 쉐프 샘 아저씨는 구스토나 레미처럼 손님들에게 대접할 요리를 만들고 연구하는 노련한 주방장이다. 그의 지휘 아래 일하는 네 명의 요리사는 채소를 썰고, 닭고기를 손질하고, 생선 수프를 끓이고, 후식을 만드는 일을 분담받았지만, 가끔 실수를 저지른다. 그런 이들의 미숙함을 메우는 사람이 바로 쉐프 샘 아저씨니, 주방장이란 본능적으로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능력만으로는 될 수 없는 위치임이 분명하다. “이제 두 시간밖에 안 남았어요. 다들 자기가 맡은 일을 잘 알고 있죠?”라는 지시로 시작되는 부엌일은 손님을 맞이하기까지, 팬에 달달 볶고, 저미고 다지고, 잘 저어 섞고, 삶고, 체로 치고, 굽고, 바쁘게 들어 나르는 일로 연속된다.
손님들의 주문을 실수 없이 제때 제공하는 일, 거기에다 까다로운 손님들의 입맛을 눈치껏 맞춰주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타고난 요리사라도 누구나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늘 내어놓을 수는 없을 테니까. 오늘 강변 식당에는 시장과 인기가수 판도라가 와서, 샐러드와 생선 수프를 주문했다. 그런데 생선 수프에 칠리 가루가 쏟아졌는지…… 맵다. 유명인사에게 내놓을 수프 맛이 매우니, 쉐프 샘 아저씨의 입에서 “이제 정말 끝이군!”이란 한숨이 나올 만도 하다. 그런데 내게는 밥맛인 남자가 남들에게는 훈남일 수 있듯, 끝장날 각오로 내어놓은 생선 수프 맛에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판도라는 최고의 찬사를 늘어놓는다. 어쩌면 운명의 여신이 미소를 짓는 순간은 이처럼 최악이라고 걱정하는 바로 그때일 확률도 있다. <라따뚜이>에서처럼 레미의 존재가 알려진 순간, 또는 『요리사가 되고 싶어』에서 칠리 가루가 쏟아진 생선 수프를 고스란히 손님상에 내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가장 인간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그 순간의 염려가 결과적으로는 펜대를 잡은 음식비평가의 입맛에 따라 다분히 주관적인 판정으로 ’맛의 천국‘이란 극찬과 함께 반전될 수도 있으니 ’누구나 음식을 할 수 있다‘는 구스토의 믿음을 애초 의심했던 당사자들이 결국 시인한 꼴이다. 내게 ’누구나 음식을 할 수 있다‘는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려 흐뭇하기도 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더 이상 요리하지도, 누군가의 까탈까지 포용하며 사랑하려 하지도 않는다.
사실 나는 이제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힘겨워졌다. 그 많은 요구 사항들, 까탈을 부리는 어리광을 어떻게 받아준다는 말인가? 대강 적당히 해두라고 꽥 소리치고 싶고, 아무거나 주는 대로 먹으라고 으름장을 놓고 싶다.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날 때>를 보며, 식당에서 샌드위치 하나 주문하면서도 웨이트리스와 해리를 달달 볶는 샐리의 태도에 화가 솟구친 적이 있다. 결국 해리를 선택하는 데 십 몇 년 까탈을 부린 거나, 샌드위치 주문 하나 하면서 한 시간이 걸린 거나 진짜 짜증나는 행동이다. 요즈음처럼 배짱이 있다면, 나는 이런 상대의 태도에 해줄 말이 있다. “네가 해 먹어.”가 바로 그거다. 『주문이 많은 요리점』을 읽을 때면, 과연 미야가와 겐지가 어린이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덕담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엽기적인 반전이 돋보이는 이 단편동화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는데, 자못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니, 선뜻 나이 어린 조카들에게까지 읽어줄 마음이 생기지는 않는다.
배고픈 사냥꾼이 숲 속에서 발견한 음식점. 그 음식점은 입구부터 배고파 찾아온 손님들에게 주문이 많다. 손님이 주문이 많은 게 아니라, 식당 주인의 요구 사항이 과하다. “우리 회관은 주문이 많은 요리점이니, 부디 그 점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정중하게 손님들의 혜량을 바라는 메모를 붙여놓았지만, 식탁은 보이지도 않고, “제발 모자와 외투, 구두를 벗어 주십시오.” “항아리 속의 크림을 얼굴과 손발에 빈틈없이 발라 주세요.” 등등의 주문투성이다. 이런 것을 점입가경이라고 해야 하나? 손님들의 점점 불안해진다. 배가 고파본 사람들은 이 불안감이 배고픔의 충족을 지연시키는 욕구불만에서 가속된다는 것쯤은 경험상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들을 약 올라 쓰러지게 할 속셈도 아니라면, “여러모로 주문이 많아 귀찮으셨을 테죠? 미안합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제발 온몸에 항아리 안에 든 소금을 잘 비벼서 뿌려 주십시오.”라는 메모는 무엇을 뜻하는가?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일이 잘되었습니다. 자아, 뱃속으로 들어와 주시지요.”라는 마지막 메모에 간이 콩알만 해진 사냥꾼들은 구겨진 휴지처럼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 되어 그만 주저앉고 만다. 다행히 그들이 이 음식점에 들어간 것을 뒤쫓던 그들의 사냥개가 들이닥쳐 저쪽 어둠 속에서 입맛을 다시며 그르렁거리는 괴물들을 물리쳤으니 정신이 돌아왔지, 하마터면 자신들 몸에 우유를 골고루 바르고 소금 간과 양념까지 직접 한 채, 괴물의 접시 위에 오를 뻔했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난해한 책 목록 상단에 꽂아두어야 했던 책이 하필이면 동화고 하필이면 음식을 소재로 하고 있다. 마침 얼마 전에 읽었던 『그림으로 본 음식의 문화사』에 소개된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의 <세속적 쾌락의 동산>에 등장하는 반인반조의 악마가 먹는 것과, 연속되는 행위로 사람들을 꿀꺽 삼킨 뒤 깊은 구멍 속으로 배설해버리는 그림의 상징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과 그 끝이 닿아있는 듯 심오하다. 동화는 알고 보면, 무척이나 심오한 인간의 원시심성을 건드린다. 마치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읽은 성서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평화가 깨어진 것이 금단의 열매를 탐했기 때문이라는, 그리하여 인간의 타락이 먹는 행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섬뜩하게 느껴졌던 공포감처럼, 내 무의식에 뿌리 깊게 박힌 ‘성욕의 메타포로서의 식욕’이 ‘너를 먹고 싶어(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라는 노골적 표현을 위장하고 ‘널 위해 요리해 줄게.’라는 주체와 대상의 자리바꿈으로 얌전해진 것임을 알아버렸으니. 나, 이제는 음식에 대한 상이한 기호를 핑계로 ‘이 사람과 함께 살 수 없지.’라는 변명 또한 늘어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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