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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불안으로 가득한 삶 안에 숨어 있는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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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란 걸 생각하면서 정이현의 문장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불안으로 가득한 삶 안에 공개되지 못한 열정이 숨어 있단 걸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칫솔과 장난감 곰으로 항해를 준비한다. 세계 일주 여행을 위해 짝이 맞지 않는 양말 한 켤레, 소라껍질 하나, 온도계 하나로 무장하는 것이다. 책들과 돌멩이들, 공작새의 깃털, 막대사탕, 테니스 공, 더러워진 손수건, 그리고 낡은 실타래 같은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여행에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에이미도 그날 오후에 저 나름대로의 충동으로 짐을 쌌다. 점심을 길게 끌다 집으로 늦게 왔고 그래서 출발이 지연되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늦은 오후의 교외선 열차들, 요리사들이 타는 열차들 중 하나를 잡아타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 아이의 아버지는 골프를 치고 있었고 어머니는 어디론가 외출 중이었다. 시간제 파출부가 거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짐을 다 싸고 나자 에이미는 부모 침실로 들어가 화장실 변기 물을 흘려보냈고 물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제 엄마의 화장대에서 25달러짜리 지폐를 한 장 꺼냈다. 그리고 다음에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집을 나와서 블렌할로우 써클을 돌아 에일와이브스 샛길을 따라 기차역으로 갔다. 아이의 마음속에서는 그 어떤 후회도, 작별 인사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는 박물관에서 밤을 보내지 않기로 할 경우에 대비해서 뉴욕에 있는 제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짚어보았다. 아이가 대합실 문을 열었을 때 역장인 플래네이건 씨는 석탄불을 쑤석이고 있었다.」 (「진의 슬픔」 중에서)

감기 걸린 새벽, 맨발로 욕실에 서 있다가 화장실 변기의 물이 내려가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 전 나의 번역가 친구가 “너랑 너무 닮아서 번역하면서 허허허 웃었어.”란 말을 하며 보내준 이 문장이 생각난 날이 있었다. 나는 이 글의 제목이 ‘진의 슬픔’인 게 좋았다. 이 글에서 진은 진토닉의 진, 즉 술이다. 이 글에서 어른들의 슬픔과 아이들의 슬픔은 연결은 되어 있어도 서로 만나지는 못한다. 「진의 슬픔」은 어른과 아이 각각의 몫의 슬픔에 관한 글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짝이 맞지 않는 장갑이나 종이로 만든 목걸이 같은 것을 집어넣는 여행 가방을 꾸릴 수 있다. 화장실 변기의 물소리는 그날 밤 나에게 천진한 슬픔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다시 화장실 소용돌이를 묵묵히 지켜보게 되었다. 그날은 술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진 누군가를 찾아 헤매다가 돌아왔던 날이다. 변기물이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것은 이번엔 망각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어떤 존재, 혼란도 결점도 없이 완전히 차갑게 소멸해 버린 어떤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그 소용돌이는 바로 블랙홀과도 같이 예측 불가능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블랙홀의 전문가이자 『우주의 점』의 저자인 재너 레빈에게 소용돌이는 훨씬 더 따뜻했다. 그녀는 갓 뽑은 에스프레스 커피잔의 소용돌이를 보면서 우리 자신이 다름 아닌 별들의 찌꺼기로 이뤄졌단 것을 생각해 낸다. 그녀는 컬럼비아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교수의 이런 설명 ‘우리 몸이 별에서 합성된 원소들로 이뤄져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잠이 확 깨버리는 경험을 한다. 우주에 대한 그녀의 가장 인간적인 설명은 이렇다.

 「마침내 팽창을 멈추고 붕괴를 시작하는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는 다시 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주가 붕괴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처음 시작되었던 지구의 먼지 속으로 밀치고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죽어가는 별에서 태양과 지구,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훔쳐냈던 원자는 다시 우주 공간으로 되돌아가 그보다 훨씬 작은 입자들로 분해된 후, 중력과 물질, 빛이 희미하게 합쳐지는 순수한 에너지의 상태로 바뀔 겁니다. 우주의 재탄생 속에서 공간이 팽창하고 우리의 전체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이지요. 결국 똑같은 은하, 똑같은 별, 똑같은 행성들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 생명체를 품고 있는 행성이 적어도 하나는 존재하겠죠. 그 위에서 어머니가 태어나고 저도 태어나는 겁니다. 아무리 자유 의지를 지지하는 사람이더라도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몇 가지 선택들 속에 우리 스스로 갇히게 되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우리는 똑같은 삶을 살아낼 것이며 똑같은 선택과 똑같은 실수를 하게 될 것입니다. … 그러나 공평하게도 우리의 이야기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에 의해 수정됩니다. … 우주의 양자 창조 과정에서 서로 다른 별들과 새로운 행성들로 이루어진 서로 다른 은하들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형성될 것입니다. 어머니와 제가 여기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가 여기에 존재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들 역시 우주 공간에서 자신들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까요?」 (『우주의 점』 중에서)

지난 9월 28일, 작가 강연회 모습
(작가 강연회 후기는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낭만적 사랑과 사회』『오늘의 거짓말』『달콤한 나의 도시』의 작가 정이현과 함께하는 오늘의 이야기 역시 그런 이야기가 될 것 같다. 똑같은 선택, 똑같은 불안, 똑같은 실수, 그런데도 내가 여기 당신 앞에 있다는 것의 경이로움. 결국 흘러가는 모든 것(변기물까지 포함해서)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조심성이 아니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세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 우리 삶은 단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 더하기 나 자신’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옛날 중국 소주의 수로를 봤을 때처럼, 캄보디아 톤레샵 호수를 봤을 때처럼, 메콩강의 흙덩어리 물을 보았을 때처럼, 흘러가는 모든 것들은 아직도 우리가 경험하고 알고 해석해야 할 세계와 감정이 얼마나 많은지를 말해주는 형식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저희 아빠는 좀 늦게 결혼한 편이라서 첫 딸인 저를 어느 정도는 과보호를 했었죠. 이를테면, 저쪽에서 차가 지나가면 백 미터 앞에서부터 ‘피해!’라고 소리치거나 아니면 가위질도 혼자 못 하게 한다거나. 그래서 제가 지금도 종이인형을 오리면 삐뚤빼뚤 엉망이에요. 그런데 일상생활은 이렇게 어리버리한데 자의식만은 말도 안 되게 강했어요. 인정받고 싶은 욕망도 강해서 세 살 때 이미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다 외워버리고는 혼자서 한글을 깨친 것처럼 굴었었죠. 어리버리함과 조숙함 사이의 불안은 제 평생을 따라다니게 돼요. 어려서 기억나는 책은 에이브 전집 88권짜리였어요. 그중 제일 좋아했던 것은 「엄마 아빠 나」란 글과 『바이킹 소녀 헬가』란 책이었죠. 인디언 소년 이야기도 있었고요. 「엄마 아빠 나」의 내용은 저보다 한두 살 많은 소녀가 주인공이었는데 글 속에서 엄마 아빠가 이혼을 하게 돼요. 그러자 소녀는 동생만은 자기가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하는 한편 엄마 아빠를 다시 이어주려고 애쓰는데 그게 잘 안되죠. 자기가 뭔가 좋은 일을 하거나 뭘 잘하면 엄마 아빠가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 안 된 거죠. 엄마, 아빠, 나가 사실은 따로 따로 객체인걸 알게 되는 거예요. 일종의 성장소설인 셈인데요. 저희 가정은 불화가 심한 가정도 아닌데 은근히 부모가 이혼을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불행 속에 놓여서 뭔가 평범한 가정의 애가 아닌 다른 세계에 놓이게 되는 경험 같은 것도 해보고 싶었고요.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나는 어떻게 하리라는 계획도 다 세워놨죠. ‘아빠는 용돈을 많이 줄 텐데 그럼 그 돈을 어떻게 쓸까? 살기는 엄마랑 살 건데 아파트가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부모는 전혀 이혼할 계획이 없는데 나 혼자 계획을 세워놨죠.”

정이현은 “앗! 이거 엄마가 들으면 큰일이다. 쓰지 마세요.”라고 웃음을 터트렸지만 쓸 수밖에 없다. 정이현처럼 월 역시 성장소설에는 늘 매료된다. 아니, 모든 좋은 소설은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첫사랑』이나 『마이 잉글리쉬 보이』나 스티븐 킹의 『사계』나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성장소설에 매료되는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면, 쉽게 찾아온 것은 결코 우리의 일부분이 될 수 없어서라고 인정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생에서 어렵게 얻은 게 바로 우리일지 모른다는 것이 성장소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일지 모른다.

 “우리 엄마가 깔끔한 전업주부였는데 이를테면 선생님들이 날 좀 예뻐하는 것 같으면 ‘엄마가 왔다 가서 예뻐하나? 너무 예뻐하면 곤란한데.’ 이렇게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저에게는 남들과 다른 걸 못 견뎌하고 내가 잘 못 어울릴까 걱정하는 그런 공포가 늘 있었어요. 큰이모 딸들이 입던 아주 예쁜 하얀 프릴 달린 원피스 같은 걸 물려 입곤 했는데 그때 그런 옷을 입고 학교 갈 때마다 왕따당하면 어쩌나 고민했어요. 정말 많이 고독했어요. (‘고독’이란 말을 아주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강조했다.) 고독과 불안이 나의 지배적인 정서였어요. ‘남들과 다르면 어떡하지?’와 ‘아냐, 사실은 나는 남들과 달라.’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했죠. 그래서 솔직하거나 당당하지 못했죠. 이를테면 여자애들이랑 같이 노는 게 유치하고 고무줄놀이도 하기 싫고 나는 책을 읽으면서 보내고 싶은데 그렇게 말을 하면 내가 왕따가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을 안 하는 거죠. 애들이 연극 연습하느라 몰려다니는 걸 보면 뭐 하는 짓인가 싶으면서도 입으로는 ‘그래, 애들아, 우리 집에 가서 놀자!’라고 말해버리는 거예요.”

이 고백은 그녀의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의 남자 김영수의 모습을 얼핏 떠오르게 한다. 보통의 키, 보통의 학벌, 보통의 머리 모양,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패션감각, 모나지 않고 눈에 띄어서 괜히 상처받을 일을 만들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유일한 인생의 목표인 남자. “뭐 하러 불필요한 상처를 받니? 평범한 게 얼마나 안전한데.” 이렇게 말을 할 것 같은 입을 가진 남자. 자신의 존재를 적절하게 즐기지 못한다는 점에서 유죄인 남자. 불행을 통해 풍성해지는 대신 안전을 통해 빈약해져버린 걸 택한 남자. 그러나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그와 피를 나누고 있는 남자.

“어린 시절의 나는 활자중독증에 걸린 소녀였어요. 아침에는 조간신문이 나를 지배했어요. 《조선일보》를 구독했는데 아빠보다 먼저 일어나서 읽었죠. 한자는 때려 맞히고 특히 사회면에 열광했어요. 그중에서도 살인사건과 치정사건이 너무 명료하게 기억나요. 윤 노파 살인 사건 같은 게 기억나요. 빈집에 사는 부유한 노파가 살해당한 사건인데 일 다니던 조카며느리가 혐의를 받게 되죠. 그런데 나중에 조카며느리가 사실은 자기가 고문당해서 자백했다고 해서 논란이 돼요. 피해자 이름도 지금 기억이 나는 것 같아요. 아마 이름은 숙종이었을 거예요. 또 여대생 살인사건도 있었어요. 부산에 사는 미모의 여대생 살인사건이었는데. 원래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딴 남자가 있었어요. 그건 아직도 미스터리 사건으로 남아 있을 거예요. 그런 여러 가지 사건들을 두고 기자들이 방담도 많이 했어요. 이를테면 ‘희대의 요부’인가 ‘독부’인가 이런 제목을 달고 기사화된 걸 읽고 또 읽었어요. 또 하나 신문에서 열광한 것은 스포츠 면이었어요. 저는 프로야구에 열광했었어요. 프로야구가 제 4학년 때 시작되었는데 저는 OB bears의 광팬이었어요. 6학년까지는 모든 프로선수들의 타율을 다 외우고 다녔어요. 딱지 사서 동생이랑 오후 내내 맞추고 놀았어요. 삼미의 듣도 보도 못한 선수들의 타율까지 외웠어요. 박철순을 아주 좋아해서 결혼하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 겉으로는 멀쩡한 중산층 집 아이인데 하루하루가 불안했단 거예요. 여자아이라는 자의식이 많아서 성추행당할까 걱정했었고요. 엄마는 나를 밝고 건강한 아이로 기억하지만 나는 딱 내가 말하고 싶은 것까지만 말했었죠. 저희 엄마는 이상문학상이나 현대문학상 수상집을 빼놓지 않고 사는데 거기서 서영은의 「먼 그대」나 이문열의 「익명의 섬」 같은 단편을 읽으면서 사회와 관계를 맺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이 왜 「먼 그대」를 읽으면서 ‘문자’ 같은 여자(문자는 자신을 낙타라고 생각하면서 못된 유부남의 모든 박해를 참아낸다)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싶어요. 그러다가 5학년 때인가 처음으로 교보문고에 갔어요. 그런데 가서 혼자서 울기 시작한 거예요. ‘이 세상에 이렇게 책이 많구나!’라는 놀라움이 ‘나는 참 미미한 존재구나.’란 생각으로 이어진 거죠. ‘언젠가 내 책을 여기에 못 꽂아놓고 죽는다면 나는 아무 존재도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죠. 최근에 아무 생각 없이 광화문 교보에 갔는데 그때 감정이 생각나서 약간 소름끼쳤어요. 행복한 느낌이 아니라 복잡했어요.”

야구! 그 시절의 땀방울 튀기는 젊은 남성들. 나에게도 김성한의 엉덩이나 박철순의 늠름함, 이순철의 웃음, 이만수의 짖궂음, 선동렬의 무뚝뚝함을 빼놓고는 남자를 말할 수 없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야구에 관한 한 가장 아름다운 책을 나더러 한 권만 뽑으라면 『박사가 사랑한 수식』『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중에서 끝까지 고민할 것 같지만 오늘은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밤에 오이 귀신이 밭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을 메뚜기의 망령이 뛰어넘었다. - 이건 휘트먼이라고 하는 사람이 2루를 견제할 때의 마음가짐을 쓴 것이야. 2루를 견제할 때의 스텝이란 매우 어려워서 말이야. 프로에 들어와서 4년이나 5년 된 선수는 도저히 익힐 수 없어. 내 팀의 코치도 곧잘 말하곤 했지. 왜 풍뎅이처럼 움직이지? 메뚜기의 망령처럼 움직이지 않고.」

「철학자 라이프니츠 선생은 『실체의 본성 및 실체의 교통 및 정신적 물체 간에 존재하는 결합에 관해서의 신설』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현상은 전혀 가공의 것이 아니라 어딘가 사상적인 것을 갖는다. 그러나 이 사상성이 의거하는 근거를 구하면 현상 속에는 없다. 그렇지만 그 근거는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실체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 그것을 읽자 느낌이 팍 왔지. 이놈은 야구를 알고 있다고 말할 거야. 내가 감독이라면 라이프니츠 선생을 피칭 코치로 할 거야. 즉, 야구에는 단순한 실체가 있다는 것이지. 그것이 야구공이야. 라이프니츠 선생은 공이 변화하는 것은 그 내적 원리 탓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놀랐어.」

(뒷부분은 슬럼프에 빠진 야구선수가 너스레를 떠는 대목인데 철학을 전공하는 여학생이 헤겔을 들어서 자신의 매춘 행위를 설명하던 『해변의 카프카』만큼 재미있었다. 앞부분은 지구상의 멋진 문장들을 다 야구광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부분이다. 나 역시 이글을 읽고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두야 간다.’란 박용철의 시를 도루 동작중인 선수들에게 바쳤었다.)

“어려서 제가 진짜 갖고 싶어 했던 것은 마이마이였어요. 중학교 일 학년 때인가 빨간색 소니 마이마이를 갖기 전부터도 저는 자타가 공인하는 라디오 소녀였어요. 라디오에 가짜로 엽서 보내서 읽힌 것도 부지기수예요. 이문세 씨의 <별밤>이나 배종옥 씨가 진행하던 <밤을 잊은 그대에게>로 엽서를 보냈어요. 내용은 이런 거죠. ‘저는 평범한 소녀입니다. 늘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는 우리 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일단 읽히는 게 중요하니까 ‘사실대로 저는 밤마다 잠을 잘 못 자고 죽을 생각도 하는 소녀입니다.’라고는 말 못 하는 거죠. 많이 가짜로 썼어요. 과장이었죠. 언젠가는 김창완 아저씨랑 생방송 심야프로 전화 연결한 적도 있어요. (그건 내가 지금 근무하는 CBS프로그램이었다.) 그때 김창완 아저씨가 뭘 읽었느냐고 물어보기에 조금 생각하다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더니 아저씨가 ‘그건 너 같은 학생이 읽긴 너무 어려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읽으렴.’ 해서 생방송 중에도 발끈 했었어요. 그때 맘에 ‘어리다는 건 이렇게 쉽게 무시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었죠. 그리고 백일장 대회 나가서 일등 하는 바람에 배종옥 씨의 프로그램 공개방송에 초청받은 적도 있었죠. 그때쯤에는 이문세와 허재의 광팬이었어요. 스포츠 기자가 되어서 운동선수랑 사귀는 것이 꿈이었어요.”

백일장 대회, 그거야말로 그녀의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배하는 중요한 행사일지 모른다. 중학교 1학년 때 시 동인지 활동을 하던 선생님을 만난 그녀는 ‘내 꿈이 네모난 상자 속에 박제되어 있다.’라는 문장을 씀으로써 명실 공히 ‘시 잘 쓰는 학생’으로 선생님의 과보호를 받으며 온갖 백일장을 휩쓸며 스타가 되고 그 덕에 고교 졸업 무렵엔 교장선생님의 공로상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그 시절이 그녀에게는 말 못 하는 비밀이 생기는 시기이기도 했다. 역시 한 사람의 영혼을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비밀이다.

“어떻게 하면 어른들이 좋아하는 시인지 나는 다 알고 있었어요. 나는 나 자신이 카피라이터라고 생각했어요. 모든 게 짜깁기였죠. ‘가을, 하늘, 창공’ 이런 게 주어지면 아무 상관없이 나는 내가 준비한 시구들을 쓰고 거기에 가을의 이미지를 살짝 얹어주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어른들이 원하는 걸 간파했어요. 거기엔 학교 대표로 백일장 대회에 나가니 어른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도 강하게 작용했어요. 좋은 시구를 살짝 이미지만 바꾸면 정말 잘 썼다는 칭찬을 들었는데 속으로는 알고 있었죠. ‘나는 가짜다. 나는 정말은 시인이 될 수 없다.’ 고등학교 때는 그게 힘들었어요.”

그녀가 택한 전공은 정외과였는데 사람들은 그녀에게 왜 문창과에 진학하지 않느냐 물어보았고 그녀는 다소 도도한 말투로 “나는 사회를 좀 더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라고 대답했다. 물론 마음 속 깊은 비밀은 ‘나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문학할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인지 대학에 들어가서는 책 한 권 안 읽고 문학이랑은 거리가 먼 생활을 아무 고통 없이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읽었던 것은 아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딱 한 권 정도였을 것 같아요. 너무 너무 화제가 되는 장편 한 편 정도 읽은 것 말고는 90년대의 전형적인 여대생으로 살았죠. 학교 잘 안 가고 미팅과 연애로 날밤 새우고 3학년 4학년 되니까 가장 괴로웠던 것은 ‘나는 왜 하고 싶은 게 없을까?’ 하는 거였어요. 매일 남자친구를 괴롭히면서 살았죠.”

그녀는 90년대 초반의 정서를 ‘이도 저도 아닌 정서’라고 표현했다. 남자친구는 거추장스러워하면서도 떠날까 두려워했고 그녀와 동갑내기인 서태지에게서는 자긍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열패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시절의 우리들은 속물적인 동시에 민주적이었고, 약삭빠른 동시에 순박했고, 현실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이었고, 경멸하는 동시에 닮고 싶어 했고, 무거운 동시에 가벼웠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 그녀는 사회를 가르치는 학원강사(그때도 ‘나는 왜 국어를 가르치지 못할까?’ 고민했다 한다.), 방송작가. 대학원생 신분을 유지했다. 그 와중에도 변함없이 인생은 늘 괴로웠고 현실은 늘 불안했고 실제로 20대 후반이 되자 아주 많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었다.

“20대 후반에 이대로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이 잘 안 되었어요. 대학원 논문도 좌절되고 지도교수는 돌아가셨지요. 어느 날 내가 나온 고등학교가 있던 남산순환도로를 지나가는데 뭉클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서울예대 신입생 모집한다는 공고였어요. 그때 문득 ‘저거 한 번 해볼까?’ 생각한 거죠. 한 학기 다닐 등록금 정도는 있으니까 만약 된다면 열심히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때 시가 쓰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합격하니까 정말로 너무 좋아서 눈을 반짝이며 죽을힘을 다해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김혜순 선생님 수업을 들었는데 첫 합평 시간에 제가 보기엔 제 시가 제일 낫다고 뿌듯해하는데 선생님은 ‘저게 시야?’라고 생각했던 애를 칭찬하는 거예요. 저한테는 ‘중하’ 정도의 평가를 했어요. 저는 그냥 스쳐 지나가셨죠. 그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학교 진짜 열심히 나갔는데 이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선생님이 여름방학 숙제를 내줬어요. 일종의 관찰일기였는데 ‘한여름 자동차가 있는 골목풍경’ 이런 걸 관찰해서 산문으로 써오고 시로도 써오란 거였어요. 마지막이란 결심으로 또 죽을힘을 다해 썼죠.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 그걸 보고 평가를 해서 돌려주는 날이 되었어요.”

그때 다른 과 친구들의 시는 붉은 표시, 붉은 각주가 달려 있었는데 정이현의 시에는 놀랍게도 단 하나의 코멘트도 붙어있지 않았다. 맨 마지막 페이지에 딱 한마디가 붙어있었다. ‘시보다는 산문에 훨씬 재능이 많은 사람으로 보임.’

“제가 귀가 얇잖아요.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시를 확 포기했어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죠. 산문에 훨씬 재능이 많은 사람이란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어요. 왜냐하면 저는 산문을 쓸 수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야기를 완결시킬 자신이 없었고 그럴 바엔 시작하지 않는 게 낫다고 오랫동안 생각했으니까요. 어쨌든 그 다음 날부터 소설 스터디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해서 그녀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정이현식 소설 세계를 구축한 소설가가 되었다. 정이현식 소설 세계에선 그동안 숱한 한국 소설의 여주인공들이 못 견뎌하던 부조리한 일상의 세계가, 갖고 싶은, 이용해 먹고 싶은,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세계로 등장한다. 정이현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집요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 세계로 들어가려고 영악한 제스처들을 취한다.

이런 문장들.

「나는 날 때부터 도시인이었다. 상대방에게 칭찬을 들으면 칭찬으로 대응해 주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엔 백화점만큼 좋은 공간은 없었다. 일층에서는 화장품 진열대의 아이쉐도 신제품을 테스트했고 햅번 스타일의 알 굵은 선글라스를 만지작대다 내려놓았다.」

「동전 하나까지 정확히 나누는 더치페이가 1990년대 초반 여대생들의 일반적인 계산법이었다.

「그해 봄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온화한 중도우파의 부모, 슈퍼싱글 사이즈의 깨끗한 침대, 반투명한 초록색 모토롤라 호출기와 네 개의 핸드백.」

「새빨간 나이키 로고가 날렵하게 수놓인 가죽운동화를 살짝 꺾어 신고 앙증맞은 마두가 새겨진 조다쉬 청치마의 호주머니 깊숙이 열 장짜리 버스 회수권을 장전하는 것으로 80년대식 청소년이 될 준비를 완료하였다.」

「화목한 부부와 귀여운 자녀로 구성된 4인 가족이 포니 투 자가용의 앞뒤에 다정히 나눠 타고 외식하러 나가는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야말로 엄마의 오랜 숙원이었다.」

지난 12월 28일, 독자와 함께한 ‘작별’의 밤 행사 모습
(행사 후기는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소설가가 된 뒤론 책을 정말 많이 읽어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를 꼽기가 어려울 정도죠. 하지만 저에게 어떤 책은 그 책을 만나는 순간의 저 자신의 상황과 관련해서 의미가 있어요. 이를테면 존 치버의 단편 「다리 위의 천사」를 아주 좋아하는데 그건 제가 폴 오스터나 레이먼드 카버를 읽었을 때보다 저 자신이 더 불안했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이런 불안 때문에 누군가를 좋아할 때도 항상 70%정도만을 표현하는 것 같아요. ‘어차피’의 대구어가 저에게는 ‘차라리’예요. ‘어차피 잘 안 될걸, 차라리 조금만 상처받자.’인 셈이죠. 그래서 저에게 일상은 덜 불안한 날과 더 불안한 날로 나뉘는 것 같아요. 저는 설명받고 설명하기를 원해요. 그래서 점도 많이 봐요. 친해지고 싶으면 별자리를 물어보죠.”

솔직히 나에겐 ‘어차피’의 대구어는 ‘하여튼’이나 ‘여하튼’이다. 존 치버의 단편 「다리 위의 천사」는 지금 새로 번역 작업 중인데 번역자에게 직접 원문과 번역본을 받아서 읽어보았다.

「여러분도 어쩌면 우리 어머니가 록펠러 센터의 스케이트장에서 왈츠를 추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지금 일흔여덟이지만 아주 강단이 있어서 짧은 스커트가 달린 빨간 벨벳 스케이팅 복을 입고, 다리에다는 살색 타이츠를 신고, 얼굴에다는 안경을 끼고, 백발인 머리에다는 빨간 리본을 꼽고서 스케이트장 안내원들 중 하나와 왈츠를 춘다. 나는 어머니가 스케이트장에서 왈츠를 춘다는 그 사실에 내가 왜 그렇게도 당황스러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실이 그래서 겨울 몇 달 동안에는 그럴 수만 있으면 언제나 그 근처로 가기를 피하고 스케이트장에 있는 레스토랑들에서는 절대로 점심을 먹지 않는다. 그런데 한 번은 내가 그 길을 지나가고 있었을 때 생판 낯모르는 사람이 내 팔을 잡더니 어머니를 가리키면서 이러는 것이었다. “저 미친 늙은 여자를 좀 보시오.” 그때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스스로 즐김으로써 내게 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마워해야 마땅하지만 그렇더라도 정말로 어머니가 눈에 좀 덜 띄는 다른 어떤 레크리에이션을 찾아냈으면 싶다.」 (존 치버, 「다리 위의 천사」)

이렇게 시작하는 글 속에서 엄마는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형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그들을 부끄러워하고 비웃던 주인공 남자는 어느 날 다리를 건너지 못하게 된다. 정이현이 이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짐작이 된다. 삶이 불가해하다는 것, 그것이 어느 날 일상에서 툭 튀어나온다는 것, 그래도 삶은 어떻게든 계속 이어진다는 것. 그는 어떻게 다리를 건너게 되었을까? 다리 위의 천사는 누구일까? 천사는 계속 나타나줄 것인가? 천사를 믿고 살 건가 나를 믿고 살 건가?

숭례문에 불이 난 다음 날 만난 우리는 최고의 책은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란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헤어졌다. ‘숭례문에 불이 났다. 그 뒤로 수십 년간 사람들은 몇 시간씩 타오르던 그 불빛을 잊지 못한다.’란 문장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를 우리는 모두 그 날 느꼈으니까.

어쨌든 지난주에 내가 사랑했던 이야기가 되는 문장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파스칼 키냐르의 『세상의 모든 아침』의 문장. “제 몸이 탐나나요? 우리 언니는 지금 굉장히 말랐어요.”

이를테면 “어느 초저녁 집에서 한 추기경의 서류를 정리하면서 주제 씨는 그것이 그의 삶을 뒤바꿔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주제 사라마구,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이를테면 “1889년 봄 오스카 와일드는 가끔씩 아틀리에에 나타났다. 내 모델의 한사람으로 친구들이 빛나는 청춘이라는 별명으로 부를 정도로 한층 돋보이는 미모의 청년이 있었다. 언제나 오후가 되면 와일드는 그림 제작의 진행 과정을 바라보았다. 도리안 그레이의 미모는 뭐니 뭐니 해도 색채와 표정에 매력이 있다고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이야기란 걸 생각하면서 정이현의 문장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불안으로 가득한 삶 안에 공개되지 못한 열정이 숨어 있단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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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런던을 속삭여줄게』,『고전읽기-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이후 쭉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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