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사진 속의 시간 그리고 우리의 추억

소중한 순간에 새긴 애틋한 시간들이 켜켜이 정리되어 있는 앨범을 들춰볼 때, 사진 속에 머무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는 손을 건네고 싶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이처럼 나는 옛 사진들을 이따금 들여다본다. 내 주변의 사람들의 옛 모습을 통해 내 과거 속으로, 혹은 내가 살아보지도 못했던 그들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사각모를 쓴 젊은 아버지의 꼭 다문 입술과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며, 지금의 남정네 그 누구보다 내 아버지가 미남인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된다.

 


만 레이(Man Ray)의 <앵그리의 바이올린,Le Violon d'Ingres)>,1924. 모델 키키의 허리와 둔부의 곡선을 이용해서, 악기 표시를 해둔 이 작품을 통해 사진을 예술로 승격시켰다는 평을 듣지만, 나는 키키 외에도 리 밀러가 모델로 자주 등장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 예술가의 여성편력을 그의 사진들을 통해 읽어버린 그런 꺼림칙한 느낌이랄까?

누렇게 바랜 사진 속에는 마고자 차림에 하얀 중산모를 쓰고 콧수염을 기른 양반이 있다. 그 옆에는 버선이 보이도록 껑충한 광목 소재의 흰 한복을 입고 앞가르마에 쪽진 머리를 한 여인이 있다. 또 그 옆에는 제법 멋들어지게 양복을 차려입고 포마드로 머리칼을 정리한 하이칼라의 청년이 있다. 솟을대문 앞에 서 있는 세 사람 모두 바짝 긴장한 표정이다. 나는 일전에 엄마가 이모할머니 댁에서 가져온 사진 속 주인공들을 보고 또 보았다. 허나, 아무리 뚫어지게 본들 도무지 그들의 정체를 알아낼 요량이 없었다. 하여, 기어이 누구냐고 물었고, 엄마는 목구멍에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던 소리를 겨우 달래가며 설명해 주셨다. 그러니까, 중산모의 양반은 6.25전쟁 때 사라지셨다는 외할아버지고, 그 옆이 이 사진을 보관해 오시던 이모할머니, 청년은 데카당 청춘을 소비하고 쓸쓸한 말년을 서둘러 접어버린 나의 외삼촌이란다. 다시 말해, 한눈에 보기에도 겉멋이 잔뜩 든 청년은 룸펜으로 영원히 살 수 있으리라 착각했던 내 큰외삼촌이다.

그는 처녀 적 엄마의 사진첩 속에도, 내 어릴 때의 사진을 모아둔 가족 사진첩 속에도 가끔씩 등장한다. 늘 다림질이 잘된 양복을 입고, 넥타이까지 한 그의 모습이지만, 애석하게도 내 키가 점점 커질수록 추레해져갔다. 사진을 볼 때면 각인하게 되는 내 룸펜 외삼촌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그의 허랑했던 말년을 곱게 보지 않는 내게, 엄마는 그가 얼마나 예술적이었는지, 다정다감했는지 애써 두둔하곤 했다. 그럴 때 나는 사진만으로도 그가 한량이었음을, 실패한 낭만주의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피붙이의 심정을 이해해주자는 아량으로 번번이 속아주었다.

이처럼 나는 옛 사진들을 이따금 들여다본다. 내 주변의 사람들의 옛 모습을 통해 내 과거 속으로, 혹은 내가 살아보지도 못했던 그들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사각모를 쓴 젊은 아버지의 꼭 다문 입술과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며, 지금의 남정네 그 누구보다 내 아버지가 미남인 것에 자부심을 갖게 된다. 또한 자전거 핸들을 붙잡고 친구들과 나란하게 서 있는 늘씬하고 싱싱했던 엄마의 학창 시절을 꺼내 보며, 세월의 주름을 펴보려 애써 본다. 내가 지금의 식구들을 이해하는 방식은, 내가 겪어온 그들의 모습에다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과거의 시간 속에서도 엄연히 존재했던 그들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이다. 그들과 부대낄 때마다 내가 알 수 없던 그들만의 시간이 있었음을 사진들은 환기시켜 준다. 그래서 나는 내 어릴 적 사진이 아니더라도, 내 식구들의 옛 사진 보기를 즐긴다.

앨런 세이(Allen Say)는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 가서 활동한 그림책 작가이다. 그의 작품 『할아버지의 긴 여행』에는 사진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수채물감으로 그려진 28장의 그림은 화자의 할아버지의 인생 유전을 담은 사진을 은유한다. 그림책 작가 이전에 광고 사진작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앨런 세이는 사진첩을 넘겨보는 듯한 효과를 미리 계산해 넣었다. 고향 일본을 떠나 미국행 증기선에 오른 할아버지가 도착한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의 새 출발은 증기기관차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 광활하고 막연한 심정을 석양빛으로 물든 그랜드캐년과 사막, 황금빛 갈대가 끝도 없이 펼쳐진 벌판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이어 나오는 공장과 높다란 건물을 배경으로 고개 숙인 남자의 모습은 막노동에 시달린 고난기를 상징한다. 앨런 세이는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만나 엄마를 낳고, 엄마가 소녀로 예쁘게 성장하던 시절을 사진으로 박았다. 그리고는 엄마가 시집을 가, 화자인 주인공 소년을 낳고, 그 소년이 성장해 할아버지의 삶을 되짚어보기 위해 여행하는 모습까지도 사진으로 표현했다.

내지의 마지막에서는, 어른이 된 화자가 고백한다. “이제야 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무척이나 그립습니다.”라고. 그 위로는 사진관에서 찍은 증명사진이 타원형의 종이틀 속에 고정되어 있다. 종이와 사진의 빛깔이 바랜 것으로 미뤄 짐작하건대, 이미 고인이 된 할아버지의 청년 시절 사진이다. 그런데 화자의 감정이 고스란히 내 것처럼 느껴진다. 나도 내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내 할아버지의 사진을 볼 때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 내가 그 사진의 틀 바깥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에.

존 버거(John Berger)의 사진. 나는 이 사람의 수필집 혹은 비평집을 읽을 때면, 주름 가득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버릇이 있다. 쟌 모르(Jean Mohr)가 찍은 그의 모습은 철인(哲人)의 그것이다. 필시 만져보면 보드라운 감촉일 흰 머리털, 지성미 풍기는 넓은 이마의 가로 주름살들, 사물의 본령까지 투사하느라 잔뜩 찌푸린 눈이 만들어낸 미간의 세로 주름과 코 양 끝점에서 시작되어 입술 끝점으로 이어지는 팔(八)자의 깊숙한 주름. 나는 감히 누구나 흉내 내지 못할 그의 표정에서 세상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그의 문체와의 유사성을 읽는다. 특히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에서 묘사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일반적으로 사진이 요구하지 않던 촉각과 후각의 기능까지 총동원하게 해줘서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나는 그를 쳐다본다. 여든여섯인데도 마치 흐르는 세월과 특별한 계약을 맺은 것처럼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찌를 듯한 연푸른 눈이었는데, 마치 냄새를 탐색하는 개가 코를 찡그리듯 이따금씩 눈을 찌푸렸다. 그 눈을 바라보는 사람은 스스로가 얼마나 무딘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숨김없이 드러나 있는 눈이지만, 순결하다기보다는 관찰에 중독된 눈이다. 눈이 영혼의 창이라면, 그의 창에는 유리도 커튼도 없으며, 그는 늘 창틀 곁에 서 있고 어느 누구도 그이 시선이 미치는 곳 너머를 볼 수 없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61쪽)

1946년 파리에서 브레송이 찍은 알베르 까뮈. 늘 사라져 버리고 마는 순간을 사진 속에 포착할 때, 브레송은 카메라의 셔터가 대상의 본질에 가닿는 순간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이방인>보다는 제임스 딘이 주연으로 등장했던 <이유없는 반항>이 더 쉽게 연상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내게 묻는다.

사진은 우리처럼 나이를 먹지 않으니 늙지도 않는다. 흘러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지만, 사진 속에 박제된 시간은 고정되어 있다. 소중한 순간에 새긴 애틋한 시간들이 켜켜이 정리되어 있는 앨범을 들춰볼 때, 사진 속에 머무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는 손을 건네고 싶다. 소설가와 시인, 모두 스물아홉 명의 작가들이 저마다의 가슴속에 묻어둔 사진을 한 장씩 내걸고, 그에 얽힌 사연들을 풀어쓴 『내 마음 속 사진첩에서 꺼낸 이 한 장의 사진』(샘터, 2004) 역시 박제된 시간들을 되돌리고픈, 이들의 과거 속에서 체온을 느끼고 싶은 바람으로 펼쳐본다. 특히, 산골 초등학교 사택으로 이사를 간 날 찍은 채호기의 가족사진에서는 누구에게나 시간의 원형이랄 수 있는 유년기의 결정적 순간이 담겨있어 각별하다. 그가 말했다. “누구에게나 시간의 원형이란 게 있다”고. 그리하여 “모든 지나간 과거의 시간들이 그곳으로 고이고, 일어날 미래의 시간들이 그곳에서 시작되는 오래된 우물 같은 시간의 처소”가 있다고. 그 시점이란 다름 아닌 “다른 것들하고는 다른 ‘나’를 자각하게 되는 그 순간이”이 아니겠냐고 자문자답한다.(모두 75쪽에서) 그는 방 두 칸짜리 작은 한옥으로 이사 온 날, 엉거주춤하게 마당에 서서 찍은 그 사진이 모조리 담아내지 못한 그날의 마을 신작로와 낯선 동네의 풍경을 “눈으로 본 풍경이라기보다 육체가 흡인한 풍경이”라고 설명했다.(77쪽) 아마도 카메라 옵스쿠라처럼 생긴 대형 구식 사진기에 딸린 아보카도 모양의 고무 셔터기를 누르는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 터지는 찰나에, 주변의 사물들이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 테다. 그 순간을 기다리며 ’얼음땡‘ 놀이에 열중하는 어린이들처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의 가족들은 전부 표정까지 얼어버렸을 게다. 그들이 거기 서 있는 동안의 시간들은 되비춘 빛을 따라 카메라의 검은 구멍을 지나 어두운 상자 속으로 들어가 버렸을 테다. 사진사 앞에서 웃을 줄도 몰랐던 촌스러운 시대의 한 순간을 박은 사진들을 보는 심정은 서글프다. 공선옥이 1969년 겨울철, 동생과 함께 쾅쾅 언 텃밭에서 찍은 사진은 그날의 체감온도까지 느끼게 해준다. 다시 말해 마음 시리다. 아버지가 청계천 복개공사를 해서 번 돈으로 사서 부쳐준 반코트가 촌 동네의 배경과 어우러지지 못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왜들 사진을 찍어두려고 할까? 더더욱 그 피사체가 스스로에게 직접적 의미를 갖지 못하는데도, 일정한 시간이면 카메라를 들고 나와, 자신의 가게 앞을 지나는 행인들을 찍어대는 습관이 있다면, 그의 행동의 원인을 추적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지! 나는 웨인 왕(Wayne Wang) 감독의 영화 <스모크Smoke, 1995>의 오기 렌를 떠올릴 때면, 14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찍어 모은 사진들을 보물 1호라며, 소설가 폴에게 보여주던 장면을 동시에 기억한다. 폴의 반응, “뭐야, 모두 같은 사진이잖아.” 와 오기의 대답, “아냐, 하나하나가 다른 사진들이지. 없어지는 사람도 있고, 새로 온 사람도 있고, 궂은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어. 이 거리에서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죽음을 보내기도 해.”라는 문장은 잊히질 않는다. 이처럼 사진은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모티프이다. 담배연기 속에서 지난날의 향수와 삶의 허무를 날려 보내는 장면들 중에서도 압권은, 폴이 자신의 담배를 사러 갔다가 은행 강도의 유탄에 맞아 죽은 아내의 사진을 오기의 앨범 속에서 발견하는 대목이다. 그의 눈물이, 담배 연기 때문이 아님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사진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기에, 우리는 사진을 찍는가? 나는 이 정답에 근접한 대답을 커트리샤 맥라클란이 쓴 『사진이 말해 주는 것들』에서 찾았다. 이 소년 소설의 첫 장면은 ‘숨 막히는 밤과 책 곰팡이를 거느리고 여름이 덧문을 살짝 두드리기 전에’ 엄마가 떠나게 될 줄은 까맣게 눈치 못 챈 열한 살 소년 저니의 그날에서 시작된다. 그날, “저니, 곧 돌아올게.”라는 부드러운 목소리의 잔음만 남긴 채 떠난 엄마 탓에, 저니와 누나를 돌보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네 엄마는 안 돌아올 게야.”라며 단언한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무수히 많은 사진을 찍어댄다. 싫다는데도, 저니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찰칵 소리를 내는 카메라. 저니는 화난 얼굴로 쳐다보지만 할아버지는 아랑곳 않는다. “환한 빛과 다른 식구들의 웃음 사이에서 몹시 화난 표정으로 사진기를 쏘아보는” 저니를 제외하고 모두들 태연하다. 아직 세상은 제대로 잘 돌아가고 있다는 양.

어느 날 저니는 엄마의 침대 밑에서 수백 장이 찢긴 사진들이 들어있는 상자를 찾아내고, 실망한다. 저니의 아빠가 어디론가 떠나버린 뒤로 시간을 거슬러 돌아보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엄마는 늘 모퉁이를 돌면,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여기며, 지난 시간들을 ‘쫙쫙’ 찢어버렸다. 얼굴, 팔, 몸이 찢어지고, 하늘, 꽃, 문, 현관 등등의 배경 역시 난도질당한 채로 저니의 어린 시절은 조각나버렸다. 누나와 함께 저니는 조각난 사진들을 하나하나 이어붙이지만, 아기의 손까지 되찾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살인자.’ 누나가 외쳤다. 그렇다. 저니의 누나에게 그런 만행을 저지른 엄마는 ‘살인자’나 다름없을 정도로 냉혹하게 비췄을 게다. 비단 자신에게는 치욕스런 과거일지라도, 한때의 사랑이나마 확인하고 싶어 하는 저니와 누나에게 엄마란 존재가 몹쓸 짓을 했다. 이어 붙였지만 끝내 하나의 완성된 가족사진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자니를 위해, 할아버지는 숨겨두었던 원판 사진을 꺼내 새로 인화한다. 어린 자니를 안고 웃고 있는 아빠와 엄마를 보여주기 위해. ‘안개 속에서 불쑥 나타나는 것처럼‘ 형상이 드러나는 얼굴들. 자니는 금세 아기인 자신을 알아본다. 하지만 온전하게 다 드러난 사진 속 아빠의 얼굴은 자니가 모르는 얼굴이다.

자니는, 사진이 진실을 보여줄 때가 있다는 할아버지의 말과 진실은 사진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사진 뒤에 있다는 이웃 아줌마의 말 사이에서 어느 쪽이 맞는지 아직은 모른다. 허나, 할아버지에게 있어서만큼 사진이란 행복했던 추억을 망상이 아닌 사실로 입증해 보여주는 것임이 자명하다. 남겨있던 사진이 없었더라면, 자니는 사랑받았던 존재로 자신을 긍정할 수 없었을 테니까, 할아버지가 고이 보관해 둔 원판 사진들이 있음은 참으로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 정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마음이 헛헛한 날, 그와 함께 갔던 군산에 갔다. 혹시 월명동에 ‘초원 사진관’이 있으면 다시금 우리 사랑도 이어질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고. 그곳에 ‘초원 사진관’은 있었지만 우리의 사랑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림의 사진을 남기고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난 정원처럼, 그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영상과 음악만으로 이어지던 17분을 견뎌내며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영화의 말미에서처럼 애써 참았던 울음이 ‘꾸룩꾸룩’ 소리를 내며 갈매기처럼 날아오르던 그날 이후, 내가 지켜야 할 것은 그와의 사랑이 아니라 추억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와 함께 만든 추억이 담긴 10통의 필름들을 현상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감히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아직은 증발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행여 원망으로 변할까 두려워서이다. 내 친구들은 사랑이 떠나가면, 그와의 사랑을 정리하기 위해 사진들을 버린다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내 자신마저도 배반하는 행위라 생각한다. 인생에 몇 차례나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세상 어느 것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사랑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가? 아직은 들여다볼 용기가 없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는 내 풋풋한 열정을 되돌아보며 웃음 지을 수 있을 텐데. 나는 사진을 버림으로서 억지로 그를 지우고 싶지도, 그와의 소중했던 추억들을 팽개쳐 버리고 싶지 않다. 사실 영화 속 정원에게만 유한한 운명의 굴레가 씌워져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 모두의 삶이란 것도 시한부일진데, 언젠가 되돌아볼 추억의 증거물이 있는 것은 행운이다.

한석규가 부른 주제가가 슬픈 이유는, 그의 죽음도 모른 채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문 닫힌 사진관을 기웃대던 다림의 순수한 행동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손을 잡아달라’고 혼잣말하며 스스로 영정 사진을 찍은 정원의 타인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은 성숙한 행동 때문이다. ‘꾸룩꾸룩’ 소리 내어 울며, 월명동 골목을 서성이던 갈매기였던 그날, 나는 강소천의 『꿈을 찍는 사진관』을 떠올리며 애써 나를 달랬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물리적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에게 그리운 이들의 사진조차 없을 때, 그들의 꿈속을 찍어주는 사진관이 있다면, 그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것이다. 12살 순이와 전쟁 통에 헤어지게 된 청년이 숲 속에서 발견한 ‘꿈을 찍는 사진관’에서 청년을 첫사랑 순이를 만나는 단꿈을 꾸게 되고, 그 꿈의 한 장면이 사진 속에 담긴다. 다만 헤어진 그때 그대로 순이는 성숙하지 않은 채로. 팔 년 세월이 흘렀지만, 청년이 기억하는 모습은 노란 저고리가 잘 어울리던 열두 살 순이이기에, 청년의 꿈에서 조차 순이는 여직 소녀이다. 사랑하는 이의 사진 한 장을 얻고 보물을 얻은 양 들뜬 청년이 가슴속 깊이 간직했던 사진을 꺼내 보았을 때, 사진은 온 데 간 데 없이 노란 민들레꽃 카드가 나오더라는 이야기.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옛사랑은 역시 처절하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에 실린 총 29편의 에세이는 마리사 카미노와 함께 자두나무 숲에서 찍은 존 버거의 사진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테이블이 놓여 있는 풀밭으로 나가 자두나무 곁에 섰다. 그녀는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출 시간, 이 분에서 삼 분 사이. 크게 외치듯 말하더니 테이블 위에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놓았다. …… 우리 둘은 카메라를 마주하고 거기 서 있었다. 물론 우린 조금씩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람에 흔들리는 자두나무보다야 덜했다. 이삼 분은 그렇게 흘러갔다. 우리가 거기 서 있는 동안 우리는 빛을 되비췄고 우리가 되비춘 빛은 저 검은 구멍을 통해 어두운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15쪽)

마리사는 ‘우리 모습이 나올 거예요.’라며 속삭였고, 존 버거는 기다렸다. 한편 오래 전 사진을 보며 미소 짓는 내 버릇은 여전하다. 아직 현상하지 않은 열 통의 필름들을 언제 현상하게 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열 통의 필름들이 온전한 사랑의 모습을 지켜줄지도 알 수 없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수많은 사랑의 사건들에 관하여

청춘이란 단어와 가장 가까운 시인 이병률의 일곱번째 시집. 이번 신작은 ‘생의 암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사랑에 관한 단상이다. 언어화되기 전, 시제조차 결정할 수 없는 사랑의 사건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아름답고 처연한 봄, 시인의 고백에 기대어 소란한 나의 마음을 살펴보시기를.

청춘의 거울, 정영욱의 단단한 위로

70만 독자의 마음을 해석해준 에세이스트 정영욱의 신작. 관계와 자존감에 대한 불안을 짚어내며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결국 현명한 선택임을 일깨운다. 청춘앓이를 겪고 있는 모든 이에게, 결국 해내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전하는 작가의 문장들을 마주해보자.

내 마음을 좀먹는 질투를 날려 버려!

어린이가 지닌 마음의 힘을 믿는 유설화 작가의 <장갑 초등학교> 시리즈 신작! 장갑 초등학교에 새로 전학 온 발가락 양말! 야구 장갑은 운동을 좋아하는 발가락 양말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호감은 곧 질투로 바뀌게 된다. 과연 야구 장갑은 질투심을 떨쳐 버리고, 발가락 양말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위기는 최고의 기회다!

『내일의 부』, 『부의 체인저』로 남다른 통찰과 새로운 투자 매뉴얼을 전한 조던 김장섭의 신간이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되며 찾아오는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저자만의 새로운 투자 해법을 담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 삼아 부의 길로 들어서는 조던식 매뉴얼을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