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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나만의 일기 쓰기

일상에 치여 지내며, 별다른 반성 없이 잠자리에 드는데 익숙해진 나는 이제부터라도 가끔 솔직하게 내면 일기를 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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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하게 그의 일기를 잊고 지내던 서른 후반의 어느 날,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부제를 달고 세상에 던져진 그녀의 일기를 또다시 손에 넣었다. 그녀 나이 스물다섯부터 죽기 1년 전까지를 기록한 육 년간의 일기들은 고교 시절 이후로 일기 쓰기를 뚝 끊고 지낸 나에게 나태했던 청춘의 죗값을 스스로에게 묻게 했다.

산다는 것이 기다림이라는 것을 더욱더 느낀다. 매일 눈을 뜨면 하루를 기다리게 된다. 무엇이 꼭 일어날 것만 같고 기적같이 눈이 환히 뜨이는 정오가 올 것만 같고 마술의 지팡이로 나의 일상생활이 전연 다른 맛ㅡ좀더 긴장된, 풍요하고 충일한, 가득하고 뒤끓는 맛ㅡ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매일 아침 기다리고 있다. 꼭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고 무엇이 일어날 것만 같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줄은 미리부터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전혜린의 1961년 1월 4일 일기 중에서)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면서 그의 일상을 동경하고 그의 치열함을 사랑하고 그의 삶으로부터 대리만족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일기를 비추는 형광등 불빛이 그가 말한 노란 가스등보다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던 도서실 구석 자리에 앉아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던 학창 시절이 있었다. 비라기보다 젖은 공기가 내린다는 뮌헨의 거리들을 상상하며, 언젠가는 저녁 박무 속 슈바빙 어느 모퉁이에 이르러 내 명패를 단 작은 집도 있으리라 기대하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 전혜린의 일상을 통째로 훔치려던 고등학생 시절이 있었다.

Norman Rockwell(1894~1978) 의 <Diary>. 미국의 통속 화가이자 삽화가인 노만 록웰은 어린이, 가정, 애국심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세속적 느낌이 강한 위 그림에서 록웰은 젊은 아가씨가 신발까지 한 짝 벗어두고 편한 자세로 일기를 쓰는 모습을 그려냈다.


까마득하게 그의 일기를 잊고 지내던 서른 후반의 어느 날,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부제를 달고 세상에 던져진 그녀의 일기를 또다시 손에 넣었다. 그녀 나이 스물다섯부터 죽기 1년 전까지를 기록한 육 년간의 일기들은 고교 시절 이후로 일기 쓰기를 뚝 끊고 지낸 나에게 나태했던 청춘의 죗값을 스스로에게 묻게 했다. “모든 철면피한 것, 둔한 것, 무례한 것, 조야한 것, 소란하고 시끄러운 것 등등을 나는 증오한다. 사랑이란 두 영혼 사이의 지속적인 대화이어야 한다. 전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정신적인 것, 순수한 정신을 나는 추구한다. 창백하고 순수한 달의 그 무감각한 냉정을 나는 갈망한다. 나는 끈끈한 것, 숨이 뜨거운 것, 야비한 것, 친숙한 것을 증오한다. 나는 평범한 것을 증오한다.” (1959년 1월 7일 일기) 이처럼 그의 단단한 각오 앞에서, 지난 세월 상식과 타협했던 나의 나약한 의지는 비루한 변명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한 번 밖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현재’를 채우지 못하고 살아가는 일상을 견뎌내지 못한 그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도 1월 10일이면 마흔두 해가 된다. 그러고 보니 새털같이 가벼운 한 순간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하루하루를 기록하며 살았던 목숨들이 보여준 지상에서의 마지막 모습들은 또 하나의 기록으로 타인들의 일기장 속에 새겨졌다. 오븐 속에 자신의 몸통을 처넣고 죽은 ‘거울(mirror)’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 스페인 국경을 넘다 검거되어 호텔방에서 몰핀 자살인지 타살인지 해명 곤란한 죽음의 수수께끼를 남긴 발터 벤야민, 그리고 베르겐 베르젠 수용소에서 열여섯 해의 짧은 생을 마감한 안네 프랑크가 그랬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자신들의 일기장에 삶의 흔적을 남겼다는 것 외에도 자신들의 삶의 마침표에 얽힌 사건과 사연들이 모두 타자에 의해 기록됨으로서 요란해졌다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아샤 라시스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두 달여를 머물었지만, 정작 사랑은 구하지 못하고 일기를 기록하며 물리칠 수 없는 자기검열로 애써 덤덤한 척 이별의 아픔을 여과해 냈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만큼은 그 누구도 숨길 수도 감출 수도 없다는 보편진리를 살짝 드러내며, 『모스크바 일기』의 한 대목은 그가 외로움과 조우할 때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했는지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이 비록 나와 닿지 못하는 서로 다른 장소에 있더라도 나와 같은 시간에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면 우리에겐 어떤 외로움도 존재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외로움이란 감정은 근본적으로 그렇게 반향적인 것 같다. (106쪽)

한편 왜 전혜린이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라는 질문은 부질없겠지만, 안네에게서 자신의 분신을 본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답답한 은신처의 생활을 스스로 ‘키티’라고 이름 붙인 일기장에 옮겨 적으며 견뎌냈던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에게 전혜린이 관심을 둔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번역한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국내 출판되리라는 소식에 기뻐하던 모습이 1959년 3월 11일자 일기에는 담겨 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짧은 삶이 투영된 두 여인의 일기가 겹치고 호기심과 총기로 가득했던 그들의 눈동자가 어른댄다.

조지 스티븐슨이 밀리 퍼킨슨을 주연으로 감독한 1959년작 <안네의 일기The diary of Anne Frank>. 안네는 일상의 위기로부터 곧잘 상상 속으로 탈출하는데, ‘키티’라 부른 일기장 속에 녹아들었다.


권정생의 『몽실 언니』의 거의 끝부분에는 폐결핵이 걸린 비실한 난남이가 몽실이에게 『안네의 일기』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 몸이 약해 방구석에 처박혀 지냈다는 안네와 난남이의 병약한 상태가, 게다가 평생을 병치레를 달고 사신 권정생의 실존적 고민이, 많고 많은 책 중에서 『안네의 일기』를 지목했으리라 믿고 싶다. 유감스럽게도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발견된 이후 유일한 생존자인 아버지 오토 프랑크는 딸의 일기에서 성장기 소녀의 성적 호기심과 가족사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덜어내고 출판했다고 전한다. 게다가 독일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또 다시 일부가 덜어내졌다는데, 그 부분은 미국 시오니스트들이 관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사적인 글쓰기의 권리가 보장된 개인의 비밀 노트가 일반에 공개될 때는 제3자의 삶 혹은 일반 대중에게 미칠 영향 때문에 이미 사라진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더러 윤색되고 누락되어 전해진다. 그런 일기의 운명을 보며 과연 일기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곰곰 생각해본다.

그런데 일단 내 답은 ‘아니다’ 쪽으로 기운다. 황선미의 『일기 감추는 날』의 주인공인 동민의 일기가 그 해답의 단초다. 동민의 일기장은 집에서는 엄마로부터, 학교에서는 담임선생으로부터 철저히 감독당한다. 일기 쓰기를 통해 자신을 반성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지도하며, 꼬박꼬박 일기를 검사하는 담임선생의 요구가 동민에게는 버겁다. 억지로 일기를 잘 쓸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신나거나 특별한 일 같은 것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동민은 다른 아이가 일기에서 밝힌 내용 때문에 오해를 사고,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친구 경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기에 이른다. 게다가 매일 밤 자신의 일기를 훔쳐보는 엄마는 부부 싸움에 대해서 쓴 동민의 일기 내용을 검열하며, 그 부분을 삭제하고 새롭게 일기를 쓰라며 강요한다. 이쯤 되자, 동민도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차라리 머리에 담아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일기 쓰기를 거부한다.

동민의 일상은 일기 때문에 엉망으로 꼬여 이제 쓰고 싶은 내용이 넘치지만, 솔직한 일기를 쓸 수는 없는 형편이다. “집안일은 엄마 때문에 안 되고, 경수 일은 선생님 때문에 안 된다.”(68쪽) 애초에 자신을 반성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일기 쓰기를 권장했던 담임선생의 의도로부터 완전히 멀어져버렸다. 그때 수연이란 친구가 동민의 번민을 알아내고, 자신의 언니가 쓰는 방법이라며 두 개의 일기장을 만들라고 가르쳐 준다. “사실은 우리 언니 방법인데 일기장을 두 개 만드는 거야. 검사 받는 거 하나, 나만 아는 거 하나.”(88쪽) 그렇지만 동민의 입장에서는 한 번 쓰는 일기도 귀찮은데 두 번 쓰는 짓은 멍청할 뿐이다.

내 경우만 해도 진짜 비밀은 나만의 일기장에 적어 두고 자물쇠를 걸어둔다. 가짜 일기, 남들이 봐도 무방한 수준을 넘어, 차라리 남들이 봐주길 바라며 쓴 가짜 비밀들은 누구나 찾아 볼 수 있게끔 블로그에 기록한다. 일기가 ‘내면의 기록’이라고 한들 가끔은 아예 의도적으로 ‘외면 일기’를 쓰고 있는 셈이다. 타인의 일기를 훔쳐보고 싶은 관음증의 욕망에 상응하는 나를 드러내고 싶은 노출증의 욕망은, 미셀 투르니에 덕분에 대단한 뒷심을 갖게 되었다. 완두콩 색 띠를 두른 표지인 『외면일기』에서 대작가의 자질구레한 일상의 비밀 무더기를 기대했다면, 제목부터 다시 눈여겨봐야 한다. 작가가 아예 의도적으로 내면의 일기와는 정반대로 ‘외면 일기journal extime’라 이름 붙이고, “여행을 하는 동안의 여정과 그때그때 있었던 일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날씨, 철따라 변하는 우리 집 정원의 모습,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 운명의 모진 타격, 흐뭇한 충격 따위를 노트에 적어”(5쪽) 두었던 것을 모은 수필집이기 때문이다. 뻔뻔스럽게도 미셀 투르니에는 ‘거의 반세기 동안 시골에서 살아와서 자신의 내면적 상태 같은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수공업자 농사꾼이 다 된 터’라고 너스레를 떤다.

하지만 꼼꼼히 읽다 보면 그의 『외면일기』 속에 비춘 내면의 그림자가 없지는 않다. 외연과 내면이란 기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데 엮여 있는 것이니까, 집요하게 말꼬리를 붙잡고 읽다 보면 어느 대목에서 그의 속내가 딱 걸려들게 된다. 이런 대목을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에 내가 노벨상을 받게 된다면, 나는 이 사제관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그 안에 밀랍으로 만든 투르니에 인형을 앉혀놓고 나 자신은 이사를 가버리겠다. 나는 가명으로 살아가고 가명으로 글을 쓰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내게 그것은 어떤 완전한 변신의 시작이 될 것이다. 나는 에밀 아자르가 되어버린 로맹 가리의 변신에 온통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 사실이다. 그토록 멋지게 시작했지만 그토록 비극적으로 중단되어버린 그 변신 말이다. 노벨문학상의 기막힌 에너지는 로맹 가리가 실패한 바로 그 일을 어쩌면 내가 성공하도록 도와줄지도 모른다. (236쪽)

혹은 이런 말들도 되새겨보거나 그의 경험에서 나온 문구가 아닌지 의심해 볼 만하다.

육체적인 면에서 서로 잘 맞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주 사소한 기벽이 애정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지만, 그 반대인 경우에는 폭발적인 노여움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145쪽)

섹스에 있어서 성가신 것은 그걸 일단 만족시키면 그만 싫증이 나는 것 아니라 성교는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고 싶어지도록 자극된다는 점이다.(192쪽)


셍 레미 레 슈브뢰즈의 한적한 시골에 있는 슈와젤의 사제관에서 홀로 살아가는 여든 노인의 미셀 투르니에의 수필들은 언제나 ‘외면 일기’이며 ‘내면 일기’이다. 정작 서품을 받은 가톨릭 신부도 아닌 그의 한적한 삶을 동경하며 일기를 훔쳐보다 보면, 이상야릇하게도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의 영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Journal Dun Cure de Compagne, 1951>를 떠올리게 된다. 시골로 부임한 젊은 사제가 써 나가는 일기 형식으로 꾸며진 흑백영화는 속과 성의 갈등을 종교인의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주인공인 시골 교구의 젊은 신부는 자신의 종교적 신앙심으로 경직된 태도 때문인지 아니면 촌사람들의 악의 때문인지, 현지 사람들과 융화하지 못한다. 때로는 인간적 갈등과 환멸을 느끼면서도 단호하게 마음을 고쳐먹고 신의 은총을 설교하려 노력하고, 일상에 지칠수록 자신을 위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진창을 함께 구르며 그를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시골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격리될 뿐이었다. 게다가 결핵이줄 알았던 병이 위암으로 판정되고 죽음에 이르게 된 시골 사제의 일기는 회색이다. 마치 ‘죄인을 기독교 신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자에게 이 세상에는 천국 이외의 것이 있다는 것이 소설의 과제다.’라는 프랑소아 모리악의 명언을 로베르 브레송이 영상으로 실험한 것 듯, 무겁고 어둡다.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의 영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Journal Dun Cure de Compagne>. 시골 교구로 부임한 젊은 신부가 위암으로 죽을 때까지 신과 신앙에 대한 처절한 탐구를 기록한 일기를 보여준다.


젊은 사제의 죽음, 그리고 젊은 사제의 일기를 다루다 보니, 내 청소년기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이름 석 자가 묵은 기억 속에서 호명되었다. 사실 너무 오래 전에 읽어 정확한 책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책장을 뒤지고 인터넷을 검색해 간신히 제목을 기억하게 되었지만.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라는 제목의 일기는 사제서품을 3개월 앞두고 인스부르크에서 사고사한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이다. 유연한 신앙심으로 살아 가고팠던 한 젊은 신앙인의 구도적 삶에 대한 애정 가득한 일기가 그가 직접 스케치한 인스부르크의 봉오리와 수채화로 표현한 소박한 동네의 그림들과 나란하게 담겨 있다. 신학교 시절, 신앙의 선택에 따라 사랑하던 여인에게 이별의 편지를 전할 수밖에 미안함과 아쉬움, 그 밖의 인간적인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일상의 노력들이 담백하게 표현된 그의 일기는 순하고 맑은 청년의 영혼을 만나게 해준다. 이곳에 옮기고 싶은 구절도 많았는데, 책이 내게서 사라지고 없다(e-book을 구입했으나, 어쩐 영문인지 내 컴퓨터로 리더기가 열리지를 않는다).

고등학생 시절로 기억된다.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은 『山,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를 욕심내지 않고 아주 조금씩 읽는 동안 내 마음에 떠오른 인물은 에밀 싱크레어와 데미안이었다. 이 두 이미지를 동시에 간직한 그는 꿈이나 소설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여전히 소년의 순수함을 간직한 청년이었다. 당시 내가 전혜린을 먼 훗날의 내 모습을 투영하여 동경했다면, 김정훈 부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이성 이상의 이성으로서 흠모했던 것 같다. 이제 그들은 일기를 남기고 이곳을 떠났지만, 오래된 내 삶의 일부처럼 아련한 그리움으로 느껴진다. 일상에 치여 지내며, 별다른 반성 없이 잠자리에 드는 데 익숙해진 나는 이제부터라도 가끔 솔직하게 내면 일기를 쓸 필요가 있다. 시간이 훌쩍 흘러 언젠가 머리로는 도무지 나의 과거를 기억할 수 없을 때를 위해, 또한 내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나만의 비밀일기장 속에서만이라도 스스로 벌거벗어야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스스로 검열하지 않는 일기 쓰기를 통해 글 속에서만이라도 나를 놓아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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