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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원과의 산책

사이 몽고메리가 쓴 『유인원과의 산책』을 읽었는데 지병이 또 도졌다. 감동, 감동의 도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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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판단하고 평가해야 하는 사람이 가장 피해야 할 일은 지나친 감격과 그에 따른 감정이입이다. 자칫하면 객관성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 무엇보다 감동이 잦으면 신뢰감을 잃는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감동 과잉(?)이 나의 지병인 것 같다.

무얼 판단하고 평가해야 하는 사람이 가장 피해야 할 일은 지나친 감격과 그에 따른 감정이입이다. 자칫하면 객관성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 무엇보다 감동이 잦으면 신뢰감을 잃는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감동 과잉(?)이 나의 지병인 것 같다.

사이 몽고메리가 쓴 『유인원과의 산책』을 읽었는데 지병이 또 도졌다. 감동, 감동의 도가니다. 출간되어 별 반응 없이 조용히 사라져버린 책이다. 서고 한 귀퉁이에 조용히 잠들 뻔한 책을 평소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은 아내가 우연히 읽게 되었던 모양이다. 며칠 동안 아내는 그 얘기만 했다. 냉정한 아내가 그토록 흥분하는 걸 보면 뭐가 있나 보다 하는 생각에 책장을 넘기다가 아, 벅차오르는 감동과 놀라움. 두고두고 마음속 연인을 삼을 만한 세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제인 구달, 다이안 포시, 비루테 골디카스이다.

내용을 재구성해보자. 루이스 리키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백인 인류학자가 있다. 그는 최초의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했다는 가설을 세워 화석자료로 입증한 대학자이다. 그러나 리키의 평소 지론대로 “화석은 말을 하지 않는다.” 원시 상태의 인류가 어떻게 행동하고 발전해왔는지 궁금했다. 대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 리키는 인간과 가장 닮은 동물 즉, 유인원의 행동을 관찰해보자는 데 착안했다. 그것도 실험실의 조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연 상태의 모습 그대로를. 그런데 그런 장구한 프로젝트를 누가 해낸단 말인가.

리키는 여성의 특성에 주목했다. 여성만이 갖는 직관력 그리고 동일한 사물에서 더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세심한 관찰력. 아울러 근 20년 가까운 자녀 양육기간을 치러야 하는 태생적인 끈기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발탁된 첫 번째 제자가 제인 구달. 당년 26세의 아름다운 금발머리 영국인으로, 인류학과는 관계가 없는 자신의 비서 출신이었다. 괴짜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엉뚱한 선택이었다.

타잔의 연인과 이름이 같은 제인 구달은 스승의 명을 받고 타잔이 살았음직한 아프리카 탄자니아 곰베 지역에 들어가 침팬지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가 별다른 게 아니다. 밀림 속에 들어가 무한정 그들을 지켜보면서 친구가 되는 일이었다. 여기서 잠시 건너뛰어 가자. 비서 노릇을 하던 금발 미녀가 밀림 속에서 얼마간을 침팬지와 살았는가. 한 3개월? 3년? 놀라지 마시라, 30년이다! 조금 더 건너뛰어 보자면, 그렇게 해서 제인 구달은 인간만이 도구와 언어를 사용한다는, 소위 ‘만물의 영장’론을 불식시킬 만한 대발견을 이루어낸다. 책에 보니, 서구에서 가장 저명한 과학자를 설문조사하면 첫손가락 꼽히는 존재가 스티븐 호킹이 아니라 바로 제인 구달이라고 한다. 상상을 뛰어넘는 헌신을 하기도 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업적과 영예를 제인은 이룩했다.

리키가 두 번째로 발탁한 현장연구가 역시 여성이고 역시 미인인데, 그녀는 전직 물리치료사였다. 제인 구달의 스토리가 과정상의 고통을 잊게 만들 만큼 ‘해피’한 데 반해 두 번째 이야기는 비극으로 점철된다. 미국인인 그녀의 이름은 다이안 포시. 르완다에 들어가 산악 고릴라를 연구하는 과제를 맡았다. 다이안은 불행하게 성장했다. 야비하고 탐욕스러운 계부는 어린 다이안을 식탁에도 앉히지 않아, 다이안은 부엌에서 따로 식사를 해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다이안의 공격적 성향이 길러졌던 것 같다.

연구차 아프리카에 들어가 그녀가 목격한 것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밀렵꾼들의 횡포였다. 그것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그네들의 생존방식이라는 걸 ‘문명인’ 다이안은 이해도 용납도 할 수 없었다. 다이안은 연구자가 아니라 전사로 변신했다. 밀렵꾼들을 체포해 응징하고 심지어 고문까지 벌이는 한편 ‘야만국’ 관리들과 밀렵금지 문제로 투쟁을 벌이는 게 그녀의 주된 활동이었다. 1985년, 아프리카 생활 18년 만에 그녀는 손도끼로 두개골이 파괴된 처참한 시체로 발견된다. 밀렵꾼에 의해 먼저 희생된, 그녀가 너무도 사랑한 고릴라 ‘디지트’의 뒤를 따라간 것이다.

캐나다 출신 비루테 골디카스는 스승 리키가 죽기 3년 전에 발탁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제자이다. 인류학과 대학원생으로 리키의 제자 중 ‘가장 많이 공부한’ 23세의 비루테는 인도네시아에서만 발견되는 오랑우탄을 선택했다. 가장 험난한 길을 자처한 거였다. 제인과 다이안의 연구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비루테의 오랑우탄은 도대체 대책이 서지 않았다. 연뢱를 하려 해도 도무지 오랑우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인데, 무리를 짓지 않고 혼자 떠돌아다니는 오랑우탄의 습성 때문이었다. 어쩌다 한 놈 발견해도 이렇다 할 행동 특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온몸에 거머리가 달라붙는 늪지대를 8년이나 헤매고서야 비로소 나뭇가지로 엉덩이를 긁는 행동, 다시 말해 오랑우탄의 ‘도구 사용’을 발견하는 정도였다. 함께 간 남편도 5년여 만에 달아나버리고 혼자가 된 그녀는 순진짜 토종 원주민과 결혼하여 아예 인도네시아 사람이 돼버렸다. 제인은 서방권으로 귀환하고 다이안은 이승을 떠났지만 비루테만이 지금까지 보루네오 섬 탕중 푸팅 캠프를 지키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어떻게 서술했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이 책은 저자 몽고메리의 필력 이상으로 그 진솔성이 두드러진다. 좀 과하다 싶게 까발린 것인데, 제인은 성공 이후 그 열매를 지나치게 즐기는 모습으로, 비루테의 경우는 업적의 빈약함과 인도네시아에서 취하는 그녀의 처신을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으로 각각 묘사하고 있다. 특히 다이안에 대해서는 그런 것까지 들추어내야 했나 싶다. 밀림에서 성욕을 감당할 수 없었던 다이안이 마스터베이션 기계를 사용했던 사실이나 유부남들과의 불행한 관계는 안쓰럽게만 다가온다.

내게 이 책은 휴먼 다큐멘터리로 읽힌다. 도시에서 성공에 몸부림치는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 이 이야기만큼 강렬하게 다가온 경우가 없었다. 혹시 읽을 의향이 있다면 2부부터 읽으시라. 서방권에서는 워낙 유명한 존재들이어서인지, 친절한 안내 없이 앞 대목에 대뜸 학술적 성과가 나와 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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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나의 레종 데트르>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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