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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고 매혹적인 21세기 마녀들

마녀를 소재로 한 소설,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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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마녀’가 자주 눈에 띈다. 올 초 안방극장에 선보인 <마녀유희>부터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포르토벨로의 마녀』, 그리고 최근 극장가에서 다시 상영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에 이르기까지.

최근 들어 ‘마녀’가 자주 눈에 띈다. 올 초 안방극장에 선보인 <마녀유희>부터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포르토벨로의 마녀』, 그리고 최근 극장가에서 다시 상영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이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마유희, 아테나, 키키의 공통점을 몇 개의 단어로 압축해 보는 일은 쉽지가 않다. ‘자신에게 충실하고 자신의 욕망에 정직하고 자신의 일에 열심인 여인들’로 단순하게 정리하자니 어딘지 석연치 않다.

고야(Francisco Jose de Goya)의 <위대한 산양 악마 혹은 마녀집회(The Great He-Goat or Witches Sabbath>, c. 1821-1823, 140x438cm, Oil on plaster remounted on canvas, Museo del Prado, Madrid

중세 사람들은 사바트(마녀집회)에 모인 마녀들이 산양 모습을 한 악마의 항문에 입을 맞추며 복종을 맹세했다고 믿었다. 스페인의 궁정화가이자 풍자화가였던 고야는 후기로 갈수록 병든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이 작품 역시 마녀사냥에 열을 올리던 마녀재판관들을 조롱하기 위해 그렸다.

지난 6백 년 동안 천대받고 핍박받던 이 주변부 인생들을 새천년이 되었다며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려는 각종 매체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저 ‘흥밋거리’?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아니어야 한다). 그들만의 매력이 뭇사람들의 시선을 묶어두는, 고작 ‘흥행거리’의 조건에 충족되고 이들에 얽힌 역사가 ‘이야깃거리’의 조건에 충분하다는 이유라면 경박하다(그럴 리 없다). 나는 여전히 마녀들의 전복을 두려워하는 민심을 읽는다. 연애나 결혼보다는 자아성취에 더욱 열정적이고 아름답고 야무진 여인들을 ‘21세기 마녀’라고 부르며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의 속내를 읽는다.

‘마녀’란 누구였나? 신비한 직관력으로 미래를 예언했던 여성주술사이자 약간의 의학적 지식으로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다른 여성들의 다산과 낙태를 돕기도 했던 여성조력자였다. 이들은 사람들의 일상적 요구를 들어주며 늘 사회 중심부로부터 멀찍이 존재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이 ‘마녀’로 낙인찍히게 된 계기는 정통적 그리스도 교회가 이들을 사단으로 규정한 14세기를 지나면서였다. 권력을 쥔 엘리트들은, 사람들이 빈궁한 이 여인들에게 자신들의 병든 몸을 내맡기고 고민을 털어놓자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들이 이교의 그릇된 교리로 주민을 물들이고 사회의 기본 질서를 위협한다며, 마녀감별사를 두고 마녀재판을 하고 마녀사냥을 벌였다.

당시 마녀로 찍히는 대상은 점이나 굿을 생업으로 하거나 산파 역할을 하는, 마을의 나이 들고 혼자 사는 여자들이었다. 혹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않는 여자들이거나 다른 남자를 탐했다는 이유로 마을 공동체에서 쫓겨난 여자들이었다. 이케가미 슌이치는 자신의 재미난 책 『마녀와 성녀』에서, 중?근세 유럽 사회가 악마학을 통해 어떻게 마녀를 규정하고 색출하기 시작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악마학이 탄생한 시기는 농촌 사회가 변모하는 시대였다. 인구의 증가와 화폐 경제의 발전으로 농촌 내부의 계층이 분화되고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어 사람들이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농민들이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아웃사이더인 여성들이었다.」(53쪽)

이 힘없는 여인들에 대한 박해는 대대적이었다. 프랑스 보르도 고등법원에서 1577년에만 400명의 마녀를 사형에 처했고, 로렌 지방의 재판관 니콜라 레미는 1576년에 2~3천 명의 마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고 한다. 마녀 색출을 위해 만든 마녀감별법은 터무니없지만, 군중집회에 대한 기득권자들의 두려움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에 따르면 마녀들은 반드시 사바트, 즉 마녀 집회에 참석한다는 것인데, 사실 이 집회 역시 알고 보면 풍작을 기원하는 샤머니즘적 요소로 이해된다. 아주 오래전부터 농촌 사회에서 주술을 행하는 여인은 곡식의 생명력을 회복시켜주는 신비한 행렬에 참가하기 위해, 동물을 타거나 동물로 변해 죽은 자들의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제각각 흩어져 있던 소수의 마녀들이 한곳에 모이면 도전적’이라는 사고방식은 선악과로 아담을 유혹한 이브를 인류 최초의 악마 하수인으로 간주하는 여성에 대한 적대감과 결합했다.

영화 <크루서블, Crucible>. 1692년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사냥을 바탕으로 한 아서 밀러의 동명 희곡을 각색해서 니콜라스 하이트너 감독이 1996년에 발표한 영화다. 친구들과 벌거벗고 숲 속에서 춤추는 모습을 들킨 소녀 에버게일은 악마에 들렸다고 거짓 고백을 한다. 한편 농부 존 프록터와 불륜의 사랑을 맺고 질투에 눈이 먼 그녀는 마녀 재판에서 진실을 밝히려 하는 프록터와 그의 아내를 위기에 빠뜨린다.

사회의 속죄양으로 이용된 마녀들. 집단적 사디즘의 전형이던 마녀재판은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존속했다. 헬렌 던컨이라는 영국 할머니는 교회 부흥회에서 영국 전함의 침몰과 프랑스 상륙작전 날짜를 정확하게 예언하여 독일 스파이로 의심받고 9개월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영구 정부는 그녀의 스파이 행위 증거가 드러나지 않자, ‘마녀’라는 죄명을 씌웠다고 한다. 이 사건이 불거져 나온 계기는 마녀의 손녀라고 평생 손가락질을 당하며 살았다는 그녀의 손녀 메리 마틴이 영국 정부에 할머니에 대한 공식 사면을 요청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니콜 키드먼과 산드라 블록이 오웬스 가의 마녀로 등장한 영화 <프랙티컬 매직>은 마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보여준다. 마녀로 태어난 질리안(니콜 키드먼)과 샐리(산드라 블록)는 어린 시절부터 따돌림당한다.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못하도록 아이들의 고개를 돌려버리는 엄마들, 마녀라고 놀려대며 계란을 집어던지는 아이들의 편견과 오해를 견디며 살 수밖에 없는 꼬마 마녀다.

마녀 아니라, 마녀의 딸 혹은 손녀로 살아가는 일은 지금 이 시대에도 버겁다. 마녀답게 살아가는 삶의 어려움은 초등학교 고학년들을 위한 동화책인 『우리집은 마녀집안』(마리 데스플르섕 글)에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마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평범한 모습의 삶을 살 수 없다고 믿는 마녀 3대가 등장한다.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홀로 딸을 키운 1대 마녀 아나스타보트 할머니, 남자는 지긋지긋하다며 임신을 하고는 남자를 차버린 2대 마녀 위르질, 그런 엄마를 둔 덕분에 아버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11살짜리 소녀 베르트. 이들의 마녀다움은 타고난 마법 능력 때문이고, 이 능력은 첫 번째 딸을 통해 아래 세대로 전수된다. 그러나 이 역시 갈고 닦지 않으면 제대로 쓸 수가 없다. 그렇지만 베르트는 멋진 마녀가 되기를 바라는 할머니, 엄마와는 달리, 호감 가는 남자 친구 수피와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평범한 여자애로 살고 싶어 한다. 베르트는 할머니, 엄마처럼 마녀가 되어 혹독하게 외로운 삶을 사느니 평범한 가정 속에서 편안한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

크리핀 던 감독의 <프랙티컬 매직>. 200년 전, 동네 남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 아낙네들의 질투의 대상이 된 마리아 할머니를, 사람들은 공동의 적으로 몰아간다. 마을의 나쁜 일을 모두 그녀의 마법 탓으로 돌린 마을 사람들은 결국 그녀를 공개 처형한다. 그러나 마법의 힘으로 목숨을 부지한 할머니는 살아남고, 바닷가에서 연인을 기다렸지만 배신당한다. 그 후 오웬스 가의 마녀를 사랑한 남자들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는 저주가 내리고, 그 저주는 대를 물려 오웬스 마녀들의 남자들을 때 이른 죽음으로 몰아간다.

사실 마법의 힘도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할머니, 엄마 마녀의 주장은 끊임없이 책을 읽고, 열심히 갈고 닦아 당당한 직업을 가지라는 비유다. 베르트의 엄마 위르질은 오로지 딸에게만 전수되는 마녀의 재능을 썩히는 위르질을 다그친다. 진정한 마녀는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이 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10쪽)기 때문에 특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위르질은 베르트에게 “치마를 입혀본 적도, 인형을 사준 적도, 얌전이나 빼고 착해빠진 별 볼일 없는 여자가 되도록 키운 게 아님”(19쪽)을 강조한다. 한편 아나스타보트 할머니의 태도는 베르트의 엄마보다는 부드럽지만, 마녀로 태어난 이상 결국 마녀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너는 마녀로 태어났고, 언젠가는 마법의 힘을 발휘하게 되어 있어. 그래서 그 마법의 힘을 제어하는 법을 꼭 알아야 하지.”(59쪽) 이쯤 되면 이 동화책에서 중세의 마녀처럼 빗자루를 타고 사바트에 참석하는 존재로서의 ‘마녀’, 사악한 마술을 부리는 ‘마녀’가 아님이 확실해진다. 여기서 마녀는 ‘여성’의 유사어고, 마법의 힘이란 ‘자기 확신, 직관, 모험정신’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를 역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세계적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말을 인용해 본다. “마녀란, 직관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여성,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 대화를 나누는 여성,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성이다.” 동화책 『우리집은 마녀집안』에서 아나스타보트 할머니의 말대로, 모든 여자들의 마음에는 작은 마녀가 살고 있다. 그리고 진작부터 이를 알고 있었을 코엘료는 새 소설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통해 새로운 마녀상과 여성성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그의 주인공 아테나는 자유롭고 용기 있는 삶을 살았지만 그 대가로 참혹하게 살해당하고만 여인이다. 그녀는 “마녀가 되는 전형적인 수순을 밟았고 천상과 지하세계를 접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파괴해버리는 마녀. 타인에게 에너지를 전하는 능력이 있되 그 보답으로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마녀”(150쪽)였다.

작가 후기에서 밝힌 바처럼, 그는 소설을 통해 이 시대 새로운 마녀들이 직면한 사회적 편견에 도전하고 있다. 또한 자비로움의 또 다른 이름인 ‘여성성’을 소설 속에서 다루면서 C. G. 융의 ‘여성성(아니마)’의 면면을 소설로 형상화한 셈이다. 더러는 융의 이론이 직?간접적으로 인용되기도 하는 이 새 소설은 중세 마녀들의 주술만큼이나 매혹적인 언어로 가득하고 고대 인도 철학의 신비감으로 몽롱하다.

그런데 여기서 ‘여성성’이란 잘못 오해되기 쉽다. ‘여성성(아니마)’은 남녀 모두의 내면에 있는 여성적 자질을 의미하는 것이지 여성들만의 고유한 성정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테나는 중세의 마녀처럼 집회를 열고 춤을 추고 예언을 하였고, 그녀들처럼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 몇 세기가 지났지만 마녀들이 겪어야 하는 혹독한 시련은 기실은 여전한 것이다. 코엘료가 생각하기에 사회와 기득권 남성들에게 아테나처럼 자비로움이 있다면, 자신 내면의 밝은 그림자와 어두운 그림자 모두를 직시할 진정한 능력이 있다면, 즉 여성성(아니마)이 있다면 소설 속 아테나는 말짱하게 살아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아이들이 보는 책에는 마녀가 단골로 등장한다. 전통적으로는 사악한 이미지가 주로 부각되었지만, 요즈음 나오는 책에서는 호기심 많고 자립심 강하고 좌충우돌 실수도 잦은, 친근감 있는 이미지로 자주 등장한다. 벨기에의 작가 리베르 바에튼 글, 그림의 그림책 『호기심쟁이 꼬마 마녀』에서도 마찬가지로, 마녀는 각자 전문 분야에 열심이고 선량하다. 이야기는 호기심 많은 꼬마 마녀 리스벳이 빗자루를 타고 불 켜진 집의 창문으로 들어가다 만난 고양이에 놀라 빗자루를 부러뜨린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겁 없는 리스벳은 빗자루를 고치기 위해 방방을 돌아다니며 마녀들을 만나는데, 음악의 마녀는 음악 외에는 모르고, 음식 마녀는 요리밖에 모르고, 마취 마녀는 잠을 재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리스벳은 지하실까지 내려가 뭐든지 고칠 수 있다는 수선 마녀를 만나 마침내 빗자루를 고친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고쳐진 빗자루는 로켓 엔진이 달린 새 모델 빗자루다.

고야(Francisco Jose de Goya)의 <변덕 연작 No. 28: 멋진 여선생!(Caprichos, no. 68: Linda maestra!)>, 1796-1797, Etching, 사바트에 참석하기 위해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는 고참 마녀와 신참 마녀


이 그림책의 이야기 구조는 어린아이들의 인지 수준에 맞춰 반복되는 패턴을 취하고 그림 또한 아기자기하고 귀여워서 아이들의 정서 수준이 잘 반영하고 있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때에는 한쪽 면이 잘려나간 그림면이 책갈피에 끼어 있어 당황했다. 파본이라 생각하고 출판사에 전화할까 생각했는데, 끝까지 맞춰 보면서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을 알고 얼마나 웃었는지!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 속의 마녀 캐릭터가 친근해진 이유는 마녀를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각도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편안한 질서 안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모험을 하며 자신의 삶에 발랄한 전복을 꿈꾸는 새로운 마녀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불편하다. 동경하면서도 힐난하는 이중심리의 대상. 욕망의 주체로 살아가고자 하는 마녀들에게는 욕망의 대상으로 살아가 주기를 바라는 시선들이 여전히 힘겹다. 그래서 최근 들어 여기저기에서 ‘마녀’를 주연으로 내세우는 콘텐츠가 늘어나고 있지만, 그런 콘텐츠에 내재한 이중심리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관전하는 내 시각은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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