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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파괴를 의미하는 예측들은 늘 섬뜩하죠. 우린 발전을 원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인 양적 발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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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제메키스의 <베오울프>를 보고 주연 배우 레이 윈스턴의 사진을 본다면 실망하는 사람들 많을 겁니다. 레이 윈스턴은 요새 그냥 배 나온 중년 아저씨예요. 하지만 <베오울프> 전반부에 나오는 레이 윈스턴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스무 살은 젊고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인 데가 엄청 근육질이죠. 특별한 특수효과의 도움 없이도 거의 날아다니고요. 하긴 영화 전체가 특수효과라고 하면 할 말 없죠. <베오울프>는 모션캡처를 사용한 컴퓨터 그래픽 영화니까요. 그 때문에 “안젤리나 졸리 전라 출연” 어쩌고 하는 광고가 웃기는 거죠. 이 영화에서 거의 나체로 나오는 배우는 안젤리나 졸리가 아니라 안젤리나 졸리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안젤리나 졸리와 아주 닮은 컴퓨터 그래픽 모델이거든요.

영화 <베오울프>의 한 장면

컴퓨터 그래픽 배우들에 대해 배우들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심지어 시위까지 했던 적이 있었죠. <시몬><파이널 판타지> 영화들이 나올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소란이 잠잠해졌던 건 당시의 특수효과가 인간 배우들을 대체할 정도로 발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다면 <베오울프>가 나온 지금은 걱정해도 될까요? 아직은요. 영화의 CG 캐릭터들은 종종 섬뜩할 정도로 인간과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늘 그렇지는 않아요. 이 방법이 실용화되어 요새 컴퓨터 그래픽 스턴트 더블처럼 보편화되려면 세월이 조금 더 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날이 오기는 오겠죠. 중간에 지구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과연 그것이 배우들에게 악몽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많은 배우들, 특히 스타의 위치에 오른 배우들이 이 기술을 반길지도 모르겠어요. 제메키스가 <베오울프>에서 젊은 레이 윈스턴을 만든 건 순전히 영화를 위해서였지만, 나이 든 할리우드 배우들이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고 미모를 부풀리기 위해 컴퓨터 그래픽 캐릭터를 택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심지어 이 기술을 사용한다면 그들은 죽은 뒤에도 계속 영화에 출연할 수 있습니다. 평생 동안 <블론디>와 같은 히트 장수 만화를 그리던 만화가가 죽기 전에 뒤를 이을 다른 만화가를 선택하듯, 스타들도 자신의 뒤를 이을 배우들을 선택해 영화에 출연시킬 수도 있지요. 섬뜩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전 이게 꽤 매력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요.

이런 식의 컴퓨터 그래픽 영화는 영화에 괴상한 사실주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실사영화에선 니콜 키드먼이 버지니아 울프를 연기하려면 가발을 쓰고 가짜 코를 붙여야죠. 하지만 이런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오는 모델 캐릭터들은 진짜 코와 진짜 머리칼을 가지고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팔다리가 잘리는 끔찍한 장면에 나오려면 특수효과와 특수분장을 동원해야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들은 존재 자체가 가짜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게 진짜인 겁니다. 이 아이러니를 조금 확장시켜 놀고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공간 여유가 별로 없군요.

이런 기술이 조금만 더 발전한다면 연기는 전혀 다른 기술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연기는 바이올린 연주와 같이 극시적인 테크닉이 중요시되는 예술이죠. 하지만 컴퓨터 그래픽 연기는 노래를 작곡하거나 시를 짓는 것처럼 꼼꼼하게 개별 요소들을 다듬는 것이 될 수도 있어요. 지금 애니메이터들이 하는 게 바로 그런 것이 아니냐고요? 하긴 그렇죠. 하지만 이걸 조금만 더 보편화시켜보세요. 이건 꼭 연기에만 대입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무용이나 음악 연주에도 대입될 수 있지요. 아마 미래의 음악애호가들은 푸르트뱅글러가 몇십 명의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을 동원해서 만든 베토벤의 5번을 능가하는 작품을 자기 집 거실에서 그림 그리듯 꼼꼼하게 다듬어 내놓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음악 애호’란 단어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겠죠. 그리고 과연 이게 예술작품의 향유에만 그치겠습니까? 이런 변화는 순식간에 연쇄반응을 일으켜 삶의 의미나 도덕적 기준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미래는 섬뜩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파괴를 의미하는 예측들은 늘 섬뜩하죠. 우린 발전을 원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건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인 양적 발전입니다. 더 돈을 많이 벌고 더 편하게 살고 싶지만, 우리가 사는 것과 전혀 다른 시스템이 그 모두를 약속한다면 우린 일단 거부하고 보죠. 하지만 아무리 겁이 나도 그런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가 갑자기 좁아진 18세기나 19세기 무렵엔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가 그런 입장에 있었죠. 그 뒤에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던가요?

아마 18세기의 조선 사람들이 지금의 이 나라를 본다면 그들이 살던 세계가 멸망했다고 단언할 겁니다. 같은 이유로 우린 25세기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변화를 인류 멸망으로 인식할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우린 그런 변화를 거부해야 할까요, 아니면 공포감과 상실감을 무릅쓰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 선택의 날이 그렇게 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미래 예측 능력은 정말 형편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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