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마녀의 어린이책 요리하기
나무 이야기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무와 숲이 담긴 그림책
우리 시골에 가면 밤이 지천이다. 가을이면 까칠한 밤톨들이 산언덕을 덮어 버린다고 한다. 너무 멀리 있어 관리할 수 없는데도 밤나무들은 쑥쑥 잘 자라 토실토실한 알밤들을 풍덩풍덩 잘도 낳아준다. 이순원 씨가 동화 같은 소설을 썼다.
이맘때는 방의 쪽창만 열어도 눈이 부시다. 창 밖 새빨간 당단풍은 스무 살 여인의 싱싱한 손가락 끝에 발린 매니큐어 같고, 샛노란 은행잎은 그 여인이 신은 둥근 코의 에나멜 구두 같다. 또한 새파란 하늘까지 그 여인이 두른 시스루 치맛자락 같으니 창 너머 저편은 원색의 희롱으로 가득하다. 누군가 내게 자신은 가을 숲을 코로 먼저 느낀다 했다. 계수나무의 달콤한 향내로 가을의 다가섬을 느끼고, 낙엽이 켜켜이 쌓여갈 때 구수한 냄새 끄트머리 싸늘한 잔향에서 가을의 저묾을 느낀다고 했다. 그 사람의 말에 나 역시 코를 킁킁거리며 가을의 추이를 탐색해보지만, 허사다. 만성비염으로 시달리는 내 코로는 조향사가 마술로 빚어낸 인위적 향기를 제외하고는 나무 향내니 낙엽 냄새를 구분키 어렵다.
|
절집을 뒤로하고 바람 타고 내려오는 길에 감을 따는 노파들을 만났다. 이미 딴 감들은 광주리에 수북하게 담겨있지만, 기다란 장대로 감을 따는 노파들은 한눈팔 새 없이 분주하다. 그런데 나무 한 그루마다 감이 한두 개씩 가지 끝에 고스란히 매달려 있다. 썩은 감인가? 아니란다. 산새들 먹으라며 남겨두는 배려의 감이란다. 민소매가 되어버린 감나무 가지에 한두 개 매달린 홍시는 광주리에 담긴 수북한 감들보다 훨씬 탐스럽다. 산새 눈에도 탐스러울 게다. 그러고 보니, 나무란 아낌없이 뭐든 전부 내어주고 헐벗은 채 겨울을 맞이한다.
쉘 실버스타인의 삽화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나무도 그러했다. 한 소년을 사랑했던 어떤 나무는 자신의 전부를 내주는 사랑을 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주워 모으던 소년이,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 숲 속의 왕 노릇을 하던 소년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던 소년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줬다. 다디단 사과를 주고, 쉴 수 있는 그늘도 주고, 소년의 고민도 들어주었다. 그런데 소년에게 소녀가 생기자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많아졌다.
청년이 되어 모처럼 찾아온 소년에게 나무가 말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올라오렴.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사과도 따 먹고, 그늘에서 놀면서 즐겁게 지내자.” 그러나 소년은 요구했다. “난 이제 나무에 올라가 놀기에는 너무 커 버렸는걸. 난 물건을 사고 싶고, 신나게 놀고 싶단 말이야. 그래서 돈이 필요해. 내게 돈을 좀 줄 수 없겠어?” 나무는 돈이 없지만, 사과를 건네준다. 사과가 돈이 되리란 걸 알고 있기에. 돈이 다 떨어진 소년은 또다시 요구한다. 이제 소년에게는 집이 필요했고, 나무는 기꺼이 가지를 베어가 집을 짓도록 한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다. 소년이 행복하다면 오랫동안 자신을 찾지 않아도 외로움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소년은 또다시 나무에게 요구한다. 이제 소년에게는 배가 한 척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무를 통째 베어내야 했다. 나무는 소년의 행복을 위해 이번에도 기꺼이 자신을 내주었다. 밑동만 남은 나무는 그러고도 행복한 척 했지만,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소년이 늙은이가 되어 찾아왔을 때, 이제 나무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나무는 ‘미안하다’는 말을 소년에게 해주었다. 늙어 철이 든, 혹은 지친 소년에게는 앉아 쉴 곳이면 족했다. 나무는 행복했다. 아직 자신에게는 밑동이 남아 있었기에. 끝까지 주기만 한 나무의 사랑은 끝까지 받기만 한 소년의 이기심에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래도 그 나무는 뿌리까지 뽑히지 않았으니 다 내준 건 아니지 않으냐고 말하는 사악한 독자들이 있다면 나무 대신 내가 당장 쫓아가 매질을 해주고 싶다.
간결한 펜 하나로 단색의 삽화를 통해 아낌없이 주는 사랑의 소중함을 그려낸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1964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니까 거의 50년 전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아직까지 생명을 갖고 있다. 뿌리까지 뽑히지 않은 나무처럼 말이다. 그리고 당시 소년이었던 독자들의 아이들과도 아낌없는 사랑을 교감하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과도 나무의 아낌없는 사랑을 소통하려 한다. 그런데 내심 걱정이다. 요즈음처럼 영악한 아이들 독자들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바보 나무’ 아니냐며 항변할 것만 같아 솔직히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저 혼자 아끼고 싶다.
|
그런데 할아버지 밤나무하고 손자 밤나무가 산에 있느냐고? 아니다. 할아버지 밤나무는, 그러니까 어린 소년의 각시가 부엌 옆에 심은 나무다. 어린 신랑이 산에 심은 밤나무에서 충분한 밤이 수확되자, 신랑은 고생을 함께해준 어린 각시를 위해 다섯 말의 밤을 따로 내주었다. 그런데 어린 각시는 각시대로 생각이 깊어 그 밤을 부엌 옆에 심었던 것이다. 한 자리에서 백 년 가까이 어린 신랑과 각시가 살아가고 애를 낳고 대를 물리는 것을 봐온 할아버지 나무는 손자 밤나무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정이 있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 우정이 있듯, 나무와 사람 사이에도 그런 우정이 있는 게”란다.(35쪽)
소설 『나무』 이야기는 더 하지 않으련다. 더 했다간 이순원 씨의 소설이 가진 아우라를 망쳐버릴 것 같으니까. 그런데 읽으면서 문득문득 올 초여름 안동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폐교를 살려 청소년 수련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마음씨 좋은 주인장은 그곳에 밤나무를 많이 심으셨다. 때가 초여름이라 밤꽃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난생처음으로 밤꽃 향이 숨 막힐 정도로 짙은 줄 알게 되었다. 뒤쪽 언덕배기에는 복숭아나무가 가득했는데, 후덥지근한 밤꽃 향이 어지러웠다. 일행 중 유일한 남성인 《어린이와 문학》 편집주간은 “햐아, 밤꽃 냄새 진짜 좋다.” 하며 진심으로 즐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함께 있던 열 명가량의 여자 편집부원 그 누구도 그분의 말을 이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무렴 어떠랴. 나무 소중한 줄 알고 베어내지 않고 잘 가꿔준 주인장님께 감사할 뿐이다. 만일 그분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릭직톤처럼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아끼는 나무를 베어내었다면 운치 있는 여름 추억은 없었을 테다.
에릭직톤은 테미테르가 아끼는 참나무를 베어내고 끊임없이 허기를 느끼는 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곤 종래에는 자신의 몸뚱이까지 먹어 치우게 되었다. 무시무시하다고? 설마. 현대에는 에릭직톤이 실로 많다. 산림 남벌의 문제는 이제 저개발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구 온난화, 희귀동물의 위기화 등등과 맞물려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체의 목숨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현대판 에릭직톤의 욕망은 참나무 한 그루에서 그치지 않고, 보르네오의 열대림과 탄자니아와 우간다의 밀림을 남벌하고 있다.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 영향권에서 우리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무시무시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멀리 있어 막연할 뿐이다.
정하섭 작가가 글을 쓰고, 한성옥 씨가 그림을 그린 『나무는 알고 있지』는 나무의 소중함을 낮은 목소리로 일갈하는 그림책이다. 서정적인 시처럼 자분자분하게 나무의 입장에서 나무의 세상살이를 들려주는 정하섭 작가의 글은 교환가치로 모든 것을 가치 판단하는 요즈음 세태의 삶의 방식을 나무라고 있다. 한성옥 씨의 그림은 낮은 톤으로 묵직하다.
그들은 말한다. “나무는 알아. 동물처럼 보고 듣고 냄새 맡지는 못하지만, 나무는 동물보다 더 잘 알아.”라고. 그들은 나무 저마다 미리 정해진 대로 꽃을 피우고 새잎을 내고 동물들의 먹이를 내어주고 보금자리를 챙겨주는 이치를 차분하게 들려주고 보여준다. 동양화 같다가도 서양화의 수채화 같기도 한 한성옥 씨의 그림은 질리지 않는다. 원경으로 근경으로 숲과 나무를 조망하는 관조적 태도가 고스란히 그림에도 드러나 있다. 엄청난 여백, 그 여백에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다.
노란 생강나무의 꽃 빛깔이 화사하지만은 않다. 사색의 빛깔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무 위에서 내려다본 나무는 흔하지 않은 나무관찰법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를 각성토록 도와준다. 흔히 우리들은 일어선 키에서, 가끔은 앉은키에서 가까이 혹은 멀리 거리만 맞춰 나무들을 볼 뿐이다. 나무를 보는 방법은 나무를 타고 올라간 자리에서, 나무 우듬지 가지 끄트머리에서 내려다볼 수도, 혹은 밑동의 불거진 뿌리 즈음에 누워 올려다볼 수도 있음을 오랫동안 망각하고 있었다.
이 그림책을 펼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무와 숲이 눈에 들어온다. 활엽수와 수렵수가, 따듯함과 서늘함이 스친다. 개인적으로 이 그림책의 압권은 시린 겨울 하늘을 후경에 두고 벌거벗은 자작나무 혹은 은사시나무 숲이 사락거리는 마른 겨울 숲 그림과 그다음 장면에 따라온 말이라 생각한다. “나무는 사람이나 동물과 달리 나무답게 살아, 이 세상에 나무가 있어서, 우리가 나무와 같이 살 수 있어서, 참 다행이야. 그렇지 않니?” 생각해 봤던가? 내게 묻는다. 솔직히 ‘나무답게’ 존재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달밤에 술렁이는 자작나무 숲을 본 사람이라면 우윳빛 달빛처럼 하얀 껍질을 벗은 자작나무의 수줍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나무는 알고 있지』를 좋아할 것이다. 휘산 작용이 있는 그림책이니까.
관련태그: 나무
10,800원(10% + 5%)
6,300원(10% + 5%)
15,300원(10% + 5%)
8,100원(10% + 5%)
11,700원(10%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