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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야기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무와 숲이 담긴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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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골에 가면 밤이 지천이다. 가을이면 까칠한 밤톨들이 산언덕을 덮어 버린다고 한다. 너무 멀리 있어 관리할 수 없는데도 밤나무들은 쑥쑥 잘 자라 토실토실한 알밤들을 풍덩풍덩 잘도 낳아준다. 이순원 씨가 동화 같은 소설을 썼다.

이맘때는 방의 쪽창만 열어도 눈이 부시다. 창 밖 새빨간 당단풍은 스무 살 여인의 싱싱한 손가락 끝에 발린 매니큐어 같고, 샛노란 은행잎은 그 여인이 신은 둥근 코의 에나멜 구두 같다. 또한 새파란 하늘까지 그 여인이 두른 시스루 치맛자락 같으니 창 너머 저편은 원색의 희롱으로 가득하다. 누군가 내게 자신은 가을 숲을 코로 먼저 느낀다 했다. 계수나무의 달콤한 향내로 가을의 다가섬을 느끼고, 낙엽이 켜켜이 쌓여갈 때 구수한 냄새 끄트머리 싸늘한 잔향에서 가을의 저묾을 느낀다고 했다. 그 사람의 말에 나 역시 코를 킁킁거리며 가을의 추이를 탐색해보지만, 허사다. 만성비염으로 시달리는 내 코로는 조향사가 마술로 빚어낸 인위적 향기를 제외하고는 나무 향내니 낙엽 냄새를 구분키 어렵다.


Egon Schiele, <Little Tree, 1912>
Watercolor and pencil on paper, 18 x 11 5/8 inch
Private collection, New York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추이를 온몸으로 알려주는 나무가 가장 현란한 시절은 엽록소들이 제각각 다른 색소로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으로 치장할 이즈음이다. 나무가 더욱 고맙게 느껴질 때 역시 각양각색의 열매를 생산하는 이즈음이다. 또한 혼잣말 잘하는 내가 말벗 삼아 나무에게 말을 자주 건넬 때도 이즈음이고 나들이 좋아하지 않는 내가 볼거리 찾아 분주해질 때도 이즈음이다. 아직 잿빛 우울이 다가서지 않은, 그래서 더욱 형형하게 빛나는 나무의 아름다움, 그리고 덩달아 내 마음이 부산해지는 이즈음이다.

얼마 전, 광릉의 수목원에 갔었다. ‘숲’과 ‘빛’을 느끼기 위해. 김훈이었던가? ‘숲’이란 단어를 발음할 때 자음과 모음이 부딪히며 원시적 쾌감을 느끼게 한다던 이가? 『자전거 여행』에서였던가? 하여튼 누군가의 표현이었든 숲에 들어 ‘숲’을 발음해 본다. 나무와 나무 사이로, 가지와 가지 사이로 뿌리는 ‘빛’도 발음해 본다. ‘숲’이라 발음하기 위해서는 입을 동그랗게 모으게 된다. 주변의 공기를 폐부에 빨아들이듯 숨을 모은다. ‘빛’이라 발음할 때 두 입술은 재빨리 떨어진다. 그 사이로 소리가 빠르게 파열된다.

그런데도 이 두 단어는 교묘하게 어울린다. ‘후르르’ 들이마셔야 제격인 숲과 ‘후’ 내뱉어야 형체가 그려지는 빛의 발성은 한 짝의 요철 같다. 소리 ‘숲’은 숲과 같이 포근하고, 소리 ‘빛’은 빛과 같이 날래다. 숲을 거닐 때는 마음의 나침반을 빛의 방향에 맞추면 된다. 숲이 우거져 빛이 잠시 끊긴 곳에서는 그루터기에라도 걸터앉아 가까운 나무 우듬지에 눈을 맞추면 된다. 초조해할 이유는 없다.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되니까.

광릉숲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환유와 정인의 슬픈 사랑이야기였다. 이곳 어딘가에서 그들은 조촐하게 결혼식을 열고 얼마간 행복했지만 환유는 불치의 병으로 죽고, 정인은 환유의 아이를 낳아 홀로 그의 사랑을 기리며 살았다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내게 영화 <편지, 이정국 감독, 1997> 이야기를 들려준 키 큰 전나무는 정인이 애틋한 사랑으로 키운 그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는 잊었다고 했다. 자신은 너무 늙어 기억이 가물거린다며 미안하다고까지 사과했다.

그의 말을 다 듣고 보니, 십 년 전 눈물 콧물 찍어가며 본 적 있는 <편지>의 마지막 장면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둘의 아이가 태어나 환유의 뼛가루가 묻힌 나무를 빙글빙글 돌던 장면이다. 또한 곰곰 생각해보니 한데 꼼짝없이 서 있기만 했을 전나무가 그 장소를 아는 것이 오히려 더 수상쩍을 거란 판단이 선다. 나는 “당신이 잘생겨서 용서해줄 생각이에요.”라고 전나무에게 말했지만, 기실은 나 역시 나이 들수록 어제 일도 가뭇가뭇하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다.

얼마 전에 만난 전나무들이 생각났다.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길을 거닐면 어느새 천왕문 앞 단풍나무 길에 다다른다는 부안 내소사로 가는 길. 그 숲길은 바람이 흐르는 길이기도 하며, 그 위로는 하늘길도 나 있다고 했다. 칠산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이 전나무 잎과 부딪치며 빗소리를 낸다고도 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시심을 가진 심인보 선생의 책 『곱게 늙은 절집』을 겨드랑이에 끼고 향했던 전나무 숲길은 아쉽게도 짧았다. 하늘길은 앞서 가는 단풍 인파가 만든 발자국길에 가려있었다. 오래전 전나무 숲은 허균과 기생 매창의 애틋하지만 탐하지 않았던 밀회도 가려주었겠지.

그런데 난데없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떠오른다. 전나무 한 그루를 눈길 위로 끌고 가는 소년의 발그레한 얼굴이 그려진 크리스마스카드가 떠오른다. 고찰로 들어서는 길 앞에서 성탄절 생각이 먼저다. 그래도 당황하지는 않았다. 내 생각 정도는 가려줄 수 있을 만큼 울창한 전나무 숲길이니까. 전나무 숲에서 빠져나오면 눈이 붉다. 아니, 세상이 붉다. 아니, 푸르다. 뻥 뚫린 파란 시야에 붉은 단풍잎이 뭉텅이로 점을 이루고 있다. 단풍이 이토록 시뻘건지, 하늘이 저토록 시린지 생뚱맞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팔짝 연화문 창살 구경은 싱겁다. 세월의 손때 묻어 꽃잎은 제 고운 빛깔을 잃은 지 오래다. 대웅보전에 삼조불 뒤편에 모셔진 백의관음보살좌상이 단풍 든 가을빛을 모르시는 게 유감스럽다. 영험한 눈빛이 된 이유도 죄다 어수선한 가을 풍경에 눈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꽃 창살 구경이 심심해질 때, 절 마당을 내다본다.

아니 어인 일로 절집 마당에 당산나무라니. 그것도 오백 년, 천 년 묵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느티나무라니. ‘부처님의 영험도 부족해 능가산 신령들, 나무 정령들 전부 모시는 넉넉한 품의 절이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천주 신앙 갖고 있는 내가 두 손 모아 마음 공양하고, 두 손 비벼 소원 성취 빌어도 개의치 않을 열린 신앙이 살아있는 곳이구나.’ 생각하니 당산나무에 꾸벅꾸벅 절하게 된다. 오백 년, 천 년을 묵으니 영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민간신앙이다.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눈 오면 눈 오는 대로 제자리 뜨지 않고 군소리 않고 긴 세월을 견뎌왔으니, 그 내공이야 오죽하겠는가?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이런 나무를 신성시했다. 우듬지는 천상에 두고 뿌리는 지하에 두고 있으니, 나무는 천계와 지하계를 모두 연결하는 신성을 갖는다. 그러니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내려온 곳도 태백산 박달나무라 하지 않았겠는가? 어쨌거나 절 마당 천 년 된 당산나무에 감탄하다 보니 오래전 보았던 <은행나무침대>가 떠올랐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미련을 갖고 은행나무로 태어난 연인들, 그러나 그저 나란히 옆자리를 지켜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운명의 은행나무처럼 천 년 세월이 지나서도 그들의 사랑은 또다시 어긋난다. 암수딴그루의 은행나무처럼. 사람의 영혼조차 머물 수 있는 것이 나무라 생각하니, 과연 저 느티나무 할아버지, 할머니는 제각기 어떤 사연을 갖고 있을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러나 어디에도 물을 곳이 없더라.

강제규 감독이 <은행나무침대> 오프닝에서 그래픽으로 보여준 두 그루의 은행나무. 천 년 전 비운의 사랑을 나누던 종문과 미단은 황장군에 의한 처절한 죽음 뒤에 은행나무 두 그루로 다시 환생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다시 황장군의 저주로 갈라서게 되고, 미단은 은행나무 침대가 되어 수현으로 환생한 한석규 앞에 나타나지만, 그들의 사랑은 나란히 서 있어야만 하는 은행나무의 운명처럼 슬픈 윤회를 거듭한다.



절집을 뒤로하고 바람 타고 내려오는 길에 감을 따는 노파들을 만났다. 이미 딴 감들은 광주리에 수북하게 담겨있지만, 기다란 장대로 감을 따는 노파들은 한눈팔 새 없이 분주하다. 그런데 나무 한 그루마다 감이 한두 개씩 가지 끝에 고스란히 매달려 있다. 썩은 감인가? 아니란다. 산새들 먹으라며 남겨두는 배려의 감이란다. 민소매가 되어버린 감나무 가지에 한두 개 매달린 홍시는 광주리에 담긴 수북한 감들보다 훨씬 탐스럽다. 산새 눈에도 탐스러울 게다. 그러고 보니, 나무란 아낌없이 뭐든 전부 내어주고 헐벗은 채 겨울을 맞이한다.

쉘 실버스타인의 삽화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나무도 그러했다. 한 소년을 사랑했던 어떤 나무는 자신의 전부를 내주는 사랑을 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주워 모으던 소년이, 나뭇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고 숲 속의 왕 노릇을 하던 소년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그네를 타던 소년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줬다. 다디단 사과를 주고, 쉴 수 있는 그늘도 주고, 소년의 고민도 들어주었다. 그런데 소년에게 소녀가 생기자 나무는 홀로 있을 때가 많아졌다.

청년이 되어 모처럼 찾아온 소년에게 나무가 말했다. “얘야, 내 줄기를 타고 올라오렴. 가지에 매달려 그네도 뛰고, 사과도 따 먹고, 그늘에서 놀면서 즐겁게 지내자.” 그러나 소년은 요구했다. “난 이제 나무에 올라가 놀기에는 너무 커 버렸는걸. 난 물건을 사고 싶고, 신나게 놀고 싶단 말이야. 그래서 돈이 필요해. 내게 돈을 좀 줄 수 없겠어?” 나무는 돈이 없지만, 사과를 건네준다. 사과가 돈이 되리란 걸 알고 있기에. 돈이 다 떨어진 소년은 또다시 요구한다. 이제 소년에게는 집이 필요했고, 나무는 기꺼이 가지를 베어가 집을 짓도록 한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다. 소년이 행복하다면 오랫동안 자신을 찾지 않아도 외로움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소년은 또다시 나무에게 요구한다. 이제 소년에게는 배가 한 척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무를 통째 베어내야 했다. 나무는 소년의 행복을 위해 이번에도 기꺼이 자신을 내주었다. 밑동만 남은 나무는 그러고도 행복한 척 했지만,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소년이 늙은이가 되어 찾아왔을 때, 이제 나무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나무는 ‘미안하다’는 말을 소년에게 해주었다. 늙어 철이 든, 혹은 지친 소년에게는 앉아 쉴 곳이면 족했다. 나무는 행복했다. 아직 자신에게는 밑동이 남아 있었기에. 끝까지 주기만 한 나무의 사랑은 끝까지 받기만 한 소년의 이기심에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래도 그 나무는 뿌리까지 뽑히지 않았으니 다 내준 건 아니지 않으냐고 말하는 사악한 독자들이 있다면 나무 대신 내가 당장 쫓아가 매질을 해주고 싶다.

간결한 펜 하나로 단색의 삽화를 통해 아낌없이 주는 사랑의 소중함을 그려낸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1964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니까 거의 50년 전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아직까지 생명을 갖고 있다. 뿌리까지 뽑히지 않은 나무처럼 말이다. 그리고 당시 소년이었던 독자들의 아이들과도 아낌없는 사랑을 교감하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과도 나무의 아낌없는 사랑을 소통하려 한다. 그런데 내심 걱정이다. 요즈음처럼 영악한 아이들 독자들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바보 나무’ 아니냐며 항변할 것만 같아 솔직히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저 혼자 아끼고 싶다.



Vincent Van Gogh, <Lane with Poplar Trees, 1884>
Pensil and ink on wove paper, 54 x 39 cm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우리 시골에 가면 밤이 지천이다. 가을이면 까칠한 밤톨들이 산언덕을 덮어 버린다고 한다. 너무 멀리 있어 관리할 수 없는데도 밤나무들은 쑥쑥 잘 자라 토실토실한 알밤들을 풍덩풍덩 잘도 낳아준다. 이순원 씨가 동화 같은 소설을 썼다. 제목이 『나무』다. 소록소록 내리는 눈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어린 밤나무에게 크고 늙은 밤나무 할아버지가 눈 내리는 밤새 들려주는 지난 세월의 이야기이다. 아포리즘이 적힌 부채처럼 마음 훈훈한 경구들이 펼쳐지는 한 장 한 장이 이순원 씨의 소설 『은비령』에서처럼 아름답다. 잠깐이라도 들어보자.

열세 살 소년과 열두 살 소녀가 결혼을 했다. 물려받은 전답이 없는 가난한 소년에게는 민둥산이 달랑 재산이었다. 소년은 몇 그루뿐인 밤나무에서 얻은 밤알을 내다 팔아 허기를 달래는 대신 부엌 바닥에 묻는다. 그리고 밤알을 민둥산에 심고 산짐승이 파내 먹지 못하게 정성껏 관리한다. 한 해 두 해 지나지만 산에서는 기별이 없고 가난은 여전하다. 동네 사람들은 어린 신랑, 각시를 비웃었지만 십 년이 지나자 마침내 민둥산을 가득 채운 어린 밤나무에서 밤송이가 달리기 시작했고 세월이 흐를수록 수확량은 많아졌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도 더 이상은 어리지 않았다. 여기까지 읽을 때, 이순원 씨가 그린 저 민둥산에 밤나무를 심었다는 어린 신랑이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아닐까 하는 착각도 잠시 했었다. 그런데 우리 고향은 하동이니 그럴 리는 만무하다.

이란의 국민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나무 사이로> 중에서. 올리브 나무 사이로 테헤레를 따라가던 호세를 쫓아가는 롱테이크를 선보인 영화 후반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치마로사의 오보에 협주곡의 소리에 올리브나뭇잎이 살랑대는 듯한 느낌.


그런데 할아버지 밤나무하고 손자 밤나무가 산에 있느냐고? 아니다. 할아버지 밤나무는, 그러니까 어린 소년의 각시가 부엌 옆에 심은 나무다. 어린 신랑이 산에 심은 밤나무에서 충분한 밤이 수확되자, 신랑은 고생을 함께해준 어린 각시를 위해 다섯 말의 밤을 따로 내주었다. 그런데 어린 각시는 각시대로 생각이 깊어 그 밤을 부엌 옆에 심었던 것이다. 한 자리에서 백 년 가까이 어린 신랑과 각시가 살아가고 애를 낳고 대를 물리는 것을 봐온 할아버지 나무는 손자 밤나무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정이 있고, 나무와 나무 사이에 우정이 있듯, 나무와 사람 사이에도 그런 우정이 있는 게”란다.(35쪽)

소설 『나무』 이야기는 더 하지 않으련다. 더 했다간 이순원 씨의 소설이 가진 아우라를 망쳐버릴 것 같으니까. 그런데 읽으면서 문득문득 올 초여름 안동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폐교를 살려 청소년 수련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마음씨 좋은 주인장은 그곳에 밤나무를 많이 심으셨다. 때가 초여름이라 밤꽃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난생처음으로 밤꽃 향이 숨 막힐 정도로 짙은 줄 알게 되었다. 뒤쪽 언덕배기에는 복숭아나무가 가득했는데, 후덥지근한 밤꽃 향이 어지러웠다. 일행 중 유일한 남성인 《어린이와 문학》 편집주간은 “햐아, 밤꽃 냄새 진짜 좋다.” 하며 진심으로 즐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함께 있던 열 명가량의 여자 편집부원 그 누구도 그분의 말을 이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무렴 어떠랴. 나무 소중한 줄 알고 베어내지 않고 잘 가꿔준 주인장님께 감사할 뿐이다. 만일 그분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릭직톤처럼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아끼는 나무를 베어내었다면 운치 있는 여름 추억은 없었을 테다.

에릭직톤은 테미테르가 아끼는 참나무를 베어내고 끊임없이 허기를 느끼는 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곤 종래에는 자신의 몸뚱이까지 먹어 치우게 되었다. 무시무시하다고? 설마. 현대에는 에릭직톤이 실로 많다. 산림 남벌의 문제는 이제 저개발국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구 온난화, 희귀동물의 위기화 등등과 맞물려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체의 목숨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현대판 에릭직톤의 욕망은 참나무 한 그루에서 그치지 않고, 보르네오의 열대림과 탄자니아와 우간다의 밀림을 남벌하고 있다.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 영향권에서 우리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무시무시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멀리 있어 막연할 뿐이다.

정하섭 작가가 글을 쓰고, 한성옥 씨가 그림을 그린 『나무는 알고 있지』는 나무의 소중함을 낮은 목소리로 일갈하는 그림책이다. 서정적인 시처럼 자분자분하게 나무의 입장에서 나무의 세상살이를 들려주는 정하섭 작가의 글은 교환가치로 모든 것을 가치 판단하는 요즈음 세태의 삶의 방식을 나무라고 있다. 한성옥 씨의 그림은 낮은 톤으로 묵직하다.

그들은 말한다. “나무는 알아. 동물처럼 보고 듣고 냄새 맡지는 못하지만, 나무는 동물보다 더 잘 알아.”라고. 그들은 나무 저마다 미리 정해진 대로 꽃을 피우고 새잎을 내고 동물들의 먹이를 내어주고 보금자리를 챙겨주는 이치를 차분하게 들려주고 보여준다. 동양화 같다가도 서양화의 수채화 같기도 한 한성옥 씨의 그림은 질리지 않는다. 원경으로 근경으로 숲과 나무를 조망하는 관조적 태도가 고스란히 그림에도 드러나 있다. 엄청난 여백, 그 여백에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다.

노란 생강나무의 꽃 빛깔이 화사하지만은 않다. 사색의 빛깔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무 위에서 내려다본 나무는 흔하지 않은 나무관찰법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를 각성토록 도와준다. 흔히 우리들은 일어선 키에서, 가끔은 앉은키에서 가까이 혹은 멀리 거리만 맞춰 나무들을 볼 뿐이다. 나무를 보는 방법은 나무를 타고 올라간 자리에서, 나무 우듬지 가지 끄트머리에서 내려다볼 수도, 혹은 밑동의 불거진 뿌리 즈음에 누워 올려다볼 수도 있음을 오랫동안 망각하고 있었다.

이 그림책을 펼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무와 숲이 눈에 들어온다. 활엽수와 수렵수가, 따듯함과 서늘함이 스친다. 개인적으로 이 그림책의 압권은 시린 겨울 하늘을 후경에 두고 벌거벗은 자작나무 혹은 은사시나무 숲이 사락거리는 마른 겨울 숲 그림과 그다음 장면에 따라온 말이라 생각한다. “나무는 사람이나 동물과 달리 나무답게 살아, 이 세상에 나무가 있어서, 우리가 나무와 같이 살 수 있어서, 참 다행이야. 그렇지 않니?” 생각해 봤던가? 내게 묻는다. 솔직히 ‘나무답게’ 존재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달밤에 술렁이는 자작나무 숲을 본 사람이라면 우윳빛 달빛처럼 하얀 껍질을 벗은 자작나무의 수줍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나무는 알고 있지』를 좋아할 것이다. 휘산 작용이 있는 그림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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