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부랑 이야기

지금 쓰고 있는 어떤 글 때문에 관련 자료들을 뒤지다가 부랑(夫娘)이라는 평안도 여자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인조시대 사람이에요. 원래 목축하는 집안 출신이라 말을 잘 탔고 어렸을 때 남자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는 늘 우두머리였다고 하더군요.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지금 쓰고 있는 어떤 글 때문에 관련 자료들을 뒤지다가 부랑(夫娘)이라는 평안도 여자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인조시대 사람이에요. 원래 목축하는 집안 출신이라 말을 잘 탔고 어렸을 때 남자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는 늘 우두머리였다고 하더군요. 어디서 많이 들은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실제로 부랑의 이야기도 익숙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모병령이 떨어지자 부랑은 병약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남장 하고 군대로 갔지요. 군대가 체질이었는지 순식간에 초장(哨長)의 위치에 올랐다고도 하고요. 결말은? 역시 공식을 따릅니다. 군대를 모았던 사람은 바로 이괄(李适)이었고 우연히 반란의 음모를 알아차린 부랑은 몰래 군대에서 빠져나와 안주목사 정충신(鄭忠信)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의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답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위에서는 부랑에게 상으로 벼슬을 주겠다고 했고 그때서야 부랑은 자신이 여자라는 걸 밝혔습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가 좀 걸리죠. 인조는 부랑에게 상을 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어떤 상을 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죠. 위에서 머리를 짜서 내놓은 상이라는 건 부랑을 정충신의 소실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부랑의 이야기는 장지연의 『일사유사逸士遺事』 이외에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 책이 대체적으로 사실을 이야기했다고 해도 세부사항을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죠. 정충신이 인조 14년에 죽었으니, 10여 년을 그 사람의 소실로 살았던 모양인데, 전 그동안 부랑의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들이 돌아가고 있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장지연이 그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처리한 건 그 사람이 그걸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소실’이라는 단어가 좀 걸려서 그렇지, 전 이 이야기를 전통적인 로맨스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정충신은 전쟁 중 가장 신임했던 부하를 소실로 맞았던 것이죠. 조선시대에 그런 경험을 한 남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경험 때문에 부랑에 대한 정이 더 깊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전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부랑이 정충신의 집에서 행복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일단 부랑에게 말 타고 평안도 벌판을 뛰놀던 시기는 끝났습니다. 정충신과 결혼함으로써, 부랑은 다른 조선시대 여자들이 견뎌내야 했던 갑갑하고 억압되고 제한된 삶으로 만족해야 했겠지요.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했을까요? 아버지 대신 이괄의 부대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부랑에게는 삶의 목표가 있어 보였습니다. 병든 아버지 대신 나갔다고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아빠 대신 군대에 가겠다고 떠들고 다녔다니 이건 분명 처음부터 계획된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집안 다른 여자들과 정충신의 집에서 살 무렵엔 더 이상 그런 목표를 유지할 수 없었겠지요. 게다가 전 정충신이 과연 부랑을 여자로 보긴 했는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 전 비교적 현대적인 로맨스의 관점에서 둘의 관계를 보았지만, 그게 당시 사람들에게도 통했을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전 부랑이 요새 무협 영화에 나오는 나긋나긋한 남장미녀였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부랑은 바깥일로 잔뼈가 굵은 건장하고 몸집도 큰 시골처녀였을 겁니다. 그런 촌아가씨가 양반집 여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정충신의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상상해보세요. 민망해 죽을 지경입니다. 위에서는 자기네들이 준 상에 대해 의기양양해하고 있었겠지만 과연 이게 상이긴 했을까요? 부랑의 이야기는 종종 한국판 <화목란> 이야기로 소개되고 있지만 제가 그 이야기를 다시 한다면 앞의 액션 장면들을 다 잘라버리고 그 이후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화목란>보다 <홍등>에 훨씬 더 가까울 것 같아요.

장지연은 정충신이 죽은 뒤 부랑이 겪은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충신이 죽자 부랑은 3년상을 치르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어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다른 전설에 따르면 병자호란 때 적군에게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던데, 어느 쪽이건 부랑의 후일담은 도주처럼 보입니다. 의리와 책임 때문에 그 집에서 십여 년 동안 살았지만 정충신이 죽은 뒤에도 그 감옥 같은 곳에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겠죠. 정충신의 죽음 전후로 부랑의 심리가 변해갔는지 따라가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 부랑이 진심으로 자신을 붙잡고 있는 정충신의 죽음을 원했을지도 모른다고 믿습니다. 죽은 뒤에 묘를 보존하고 묘향산의 절로 들어간 행동은 도주일 수도 있지만 그런 죄책감에 대한 자기 처벌일 수도 있겠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어느 쪽의 해석을 택해도 부랑의 이야기는 장지연이 생각했던 것만큼 단순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위로와 희망을 노래하는 시 그림책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SNS에 게재한 시 한 편이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어 다양한 예술 형태로 확산된 이 시는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을 만나 마침내 우리 곁을 찾아왔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험과 희망적인 미래를 기록한 시 그림책이다.

마음을 위로하는 시인 김용택의 시편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열세 번째 시집.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에 실린 시들은 계절의 색과 자연의 빛을 머금고 시인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우리 보편의 삶으로 확장한다. “누구의 행복도 깔보지 않았을, 강물을 건너가는 한 줄기 바람(「내 눈에 보이는 것들」)”같은 시들이 가득 담긴 책

구글 수석 디자이너, 천재들과 일하며 배운 것들

영어 한 마디 못 하는 채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저자가 25년 뒤 구글 본사 수석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세계 최고의 인재들과 함께 일하며 배운 것들을 담은 책이다. 그녀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들에게 말한다.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나답게 걸어가라고.

삶의 품위를 일깨운 스무 권의 책, 스무 명의 여성

19년차 기자이자 출판팀장, 싱글여성이자 작가, 단단한 한 사람으로서의 곽아람을 만든 여성들을 만난다. 스무 권의 책에서 만난 스무 명의 여성. 그리고 이들에게 배운 '삶의 존엄을 지탱하는 법'. 『소공녀』 세라부터 『배움의 발견』 타라까지 그의 삶을 비추며 우리의 품위를 깨운다.

.

주목! 투데이 포커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