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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속 캐릭터의 삶과 죽음

나중에 조이와 말다툼을 하게 된 레이첼은 한참 책에 빠진 조이에게 엄청난 스포일러를 폭로합니다. “베스가 죽어!” 충격을 받은 조이는 공포에 떨며 말합니다. “정말이야? 내가 책을 계속 읽으면 베스가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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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즈> 3시즌 13번째 에피소드인 ‘The One Where Monica and Richard are Just Friends’를 보면 조이가 레이첼의 소개로 『작은 아씨들』을 읽는 이야기가 나오죠. 나중에 조이와 말다툼을 하게 된 레이첼은 한참 책에 빠진 조이에게 엄청난 스포일러를 폭로합니다. “베스가 죽어!” 충격을 받은 조이는 공포에 떨며 말합니다. “정말이야? 내가 책을 계속 읽으면 베스가 죽어?” 챈들러는, 베스는 죽지 않는다며 조이를 위로하지만, 그래도 책을 읽다 보면 결말을 모를 수가 없는 거죠. 막판에 베스가 죽는다는 게 확실해지자 조이는 책 읽는 걸 멈추고 읽다 만 책을 냉장고 안에 넣습니다.

베스는 죽은 걸까요? 조이에겐 아니죠. 조이가 『작은 아씨들』을 계속 읽지 않는 한, 베스의 시간은 멈추어 있습니다. 베스에겐 조이가 넘기지 못한 페이지만큼의 시간이 남아 있는 거죠. 그러나 그렇다고 베스가 살아 있다는 말도 되지 않습니다. 베스가 살아 있다면 그 살아 있는 순간순간을 체험하고 느껴야 하지요. 하지만 조이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한, 베스의 삶은 그냥 특정 시간대에 고정되어 있을 뿐입니다. 조이는 이미 읽은 책의 앞부분을 회상할 수 있을 거고 베스가 병을 이기고 회복하는 다른 결말을 상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가 아는 베스는 여전히 살아 있지 않아요. 베스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가 계속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베스의 생명은 조금씩 단축되겠지만, 그러는 동안 베스는 살아 있는 캐릭터로서 조와 눈물겨운 대화를 나눌 수 있고 가족의 사랑을 느낄 수도 있는 거죠. 그게 삶이라는 겁니다. 우린 조금씩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까먹으며 살아가죠. 베스의 경우, 그게 더 두드러지는 건 그 아이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는 모든 소설은 다 시한부 소설이에요.

베스에겐 내세가 있을까요? 그건 의미 없는 질문입니다. 물론 이성적으로 따지면 없지요. 저자인 루이자 메이 올콧은 베스의 사후세계를 다룬 글을 쓴 적이 없어요. 모든 허구 속 캐릭터는 작가가 펜을 놓는 순간 (또는 자판 두드리기를 멈추는 순간) 존재하기를 멈춥니다. 그러니 베스의 미래는 소설 속에서 죽지 않은 조의 미래와 특별히 다를 게 없죠. 단지 조가 그 뒤로도 나온 (덜 재미있는) 책을 통해 조금 더 오래 살았을 뿐입니다.

이야기하다 보니 제가 전에 했던 ‘심즈’ 캐릭터들이 생각나는군요. 몇 개월 동안 전 한 심즈 커플을 열심히 키워서 심즈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에 가져다 놨죠. 그러다 컴퓨터와 하드를 바꾸는 통에 더 이상 게임을 이어서 할 수 없게 되었어요. 사랑과 직업 모두에서 정점에 달해 행복한 삶을 살던 그들에게 갑자기 미래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것이죠.

그건 우리가 아는 죽음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언젠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집에서 그 다음 날 그냥 텔레비전이 꺼지듯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잠자리에서 그에 대해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평소처럼 그대로 잠이 들죠. 하긴 그걸 안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소멸된 뒤에는 죽음을 느끼지 못하죠. 죽음은 오로지 삶 속에서만 간접적으로 체험될 수 있습니다. 전쟁이나 폭력처럼 노골적으로 그 존재를 삶 속에 새기는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음 날 죽건, 죽지 않건 다를 게 없죠. 전 아직도 컴퓨터를 바꿀 때와 아주 정확한 조건을 재현할 수 있다면 그 심즈 커플도 전에 잠시 중지되었던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건 의미 없는 상상이지요. 우리가 품은 사후 세계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래도 현실적이지만.

그래요. 독자에게 중요한 건 캐릭터에게 주어진 삶의 길이가 아니라 ‘주어진 시간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느냐’일 겁니다. 세상엔 15페이지짜리 단편에서 찬란하게 불타 사라지는 캐릭터도 있고 몇십 년 동안 끄는 연속극에서 진부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사는 캐릭터도 있죠. 하지만 독자에게 중요한 것이 과연 캐릭터에게도 중요할까요? 엠마 보바리는 그 불쾌하고 짧은 인생을 통해 문학사에 불멸의 명성을 쌓았지만 과연 누가 엠마 보바리가 되고 싶겠어요? 그리고 그들이 엠마 보바리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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