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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우리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나라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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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에 있는 신문의 사회면 단신 속 이야기들은 어쩌면 아직 건져지지 않았지만 누군가에 의해 난파선 밖으로 던져진 병 속에 든 메시지일지 모른다.

호치민에 살았던 베트남 여성 후인마이가 대한민국 천안시 문화동의 한 방에서 전과 6범의 남편에게 구타당해 늑골 18개가 부러져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쉼보르스카의 <베트남>이란 시가 생각이 났다.

여인이여, 그대 이름은 무엇이냐?-몰라요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 출신인가?-몰라요
왜 땅굴을 팠느냐?-몰라요
언제부터 여기에 숨어 있었느냐?-몰라요
왜 내 약지를 물어뜯었느냐?-몰라요
우리가 당신에게 절대로 해로운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가?-몰라요
당신은 누구 편이지?-몰라요
지금은 전쟁 중이므로 어느 편인지 선택해야만 한다-몰라요
당신의 마을은 존재하는가?-몰라요
이 아이들이 당신 아이들인가?-맞아요


인용된 시는 쉼보르스카가 베트남 전쟁 때 구찌 땅굴에 살았던 베트콩 여인을 생각하며 쓴 시겠지만 이 시대의 후인마이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수많은 질문에 도리도리 고갯짓을 하며 ‘몰라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그녀는 죽어서 한국 땅에서 화장됐다. 천안의 여성단체들은 호치민시의 가족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전화기 너머 연결된 나이 어린 여동생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엄마 아빠는 아픕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여성단체들은 그녀를 위해 장례식을 치러 주려 모금 활동을 했지만 모금액은 190만 원에 불과했다. 후인마이는 죽기 전날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는 그 편지가 유언장이 될 줄은 추호도 생각을 못 했었다.

“나는 당신에게 무슨 음식 먹어? 물먹어? 라고 물으며 식모처럼 잘해주고 싶었어. 나는 결혼하기 전에 호치민에서 일했어. 우리 가족에게 어려움 있었어. 가족을 위해 고생스러운 일 많이 했지만 월급은 적었어. 어느 해는 냉동식품 회사에서 일하고 어느 때는 가구 공장에서 일하고 어느 때는 고무 농장에서 일했어. 일 없으면 남의 논밭에서 일했어. 나는 힘든 일과 고생스런 일을 잘 알아. 나는 한국에 와서 당신에게 이야기 많이 하고 싶었지만 잘 안 되었다. 하느님은 나에게 장난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신을 잘 모를 거다.” (베트남어로 썼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은 하나님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의 죽음에 대한 기사는 아주 짧았다. 베트남 여성 사망 기사의 뒷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나는 천안에 전화를 걸어보아야 했다. 그리고 처음 알았다. 결혼한 지 2년 안에 이혼하는 이주여성은 불법체류자 신분이 된다는 것, 국제결혼 중개업체는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로 운영된다는 것, 지방자치단체들은 결혼 건당 지원금을 지불한다는 것.

‘베트남 새댁, 남편에게 맞아 죽다’ 같은 사회면 기사, 소위 말하는 단신이란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런 단신에 사진 처리를 해준다면 어떤 배경을 써야 하나? 많은 경우 그런 단신은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 영화를 닮았다.

“(<위대한 독재자> <시티라이트> 같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의 살기 위한 필사적인 투쟁을 코미디언의 연기로 알고 박장대소한다. 즉, 코미디의 기원은 그런 잔인한 맹목성, 상황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무지에서 찾아야 한다.” (지젝,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중에서)

우스꽝스럽다는 것은 어느 경우엔 아주 슬프다.

백가흠의 『조대리의 트렁크』에 나오는 한 젊은 남자. 그는 우스꽝스러움과 슬픔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려준다. 그는 전방부대에서 태권도 훈련을 받다가 가랑이가 찢어져 평생 엉덩이를 뒤로 빼고 펭귄처럼 걸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느린 보폭으로, 남들은 한 걸음에 걸을 거리를 열 걸음으로 나눠 걸어갈 때 그의 등 뒤엔 코흘리개들의 얼레리 꼴레리 소리가 따라붙는다. 그의 애인 루시는 자위용 인형이다, 입은 기괴하게 크고 다리는 벌린 루시에게 그는 속삭인다. 너만 사랑해, 믿어줘.

백가흠 소설의 다른 주인공들도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한 어린아이가 대낮 여관의 옷장에 숨어서 남녀의 정사신을 눈 하나 꼼짝 않고 ?펴본다. 그 아이의 아빠는 죽으면서 자신의 재산을 가족이 아니라 동성의 애인에게 남긴다. 그 아이의 엄마는 분노해서 아이를 여관의 주인이기도 한 남편의 동성 애인에게 던져놓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아이는 학교 대신 모텔방을 전전한다.

-고아원 동기인 젊은 부부는 애를 낳자마자 족족 고아원에 넘긴다. 만삭의 아내는 변기에 앉아 힘을 주다가 그만 변기 속에 풍덩 아이를 낳게 된다. 그런데 그 아이를 꺼내서 닦아 놓고 보니 눈과 코가 없었다.

-평생 가정을 가져본 적 없이 무료 급식으로 연명하는 폐품팔이 할아버지는 어느 날 가출 소녀를 만나게 된다. 노인은 마냥 좋아 십대의 가출 소녀를 ‘아가’라 부르며 집안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족이라 생각하며 가출 소녀를 매일 기다린다.

신문 단신 속 인물들의 바탕화면 같은 이야기를 쓴 백가흠은 그래도 자신의 소설보다 현실이 더 가혹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 실제로 신문의 사회면을 자주 본다는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허구라기보다는 의사소통할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내키지 않는 고백이나 회고처럼 읽힌다.

백가흠 소설 속의 하잘것없고 우스꽝스러운 주인공들이 우리 곁에 온다면 우리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단박에 알게 될 것이며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만 사랑하려는 경향이 얼마나 편리한 경향인지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란 말을 실천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은 그 이웃이 좀 떨어져 있을 때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사람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그가 놓인 배경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제5도살장』의 작가 커트 보네거트는 『나라 없는 사람』에서 「레퀴엠」이란 제목의 이런 글을 썼다.

십자가에 못 박힌 지구가
목소리를 갖게 되고
아이러니가 무언지 알게 된다면
우리가 저지른 학대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는 게 바로 아이러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속으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를 더 흰색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남들을 더 검은색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을 종종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오늘날의 적은 근본주의자들이라기보다는 쿨한, 거리두기를 아주 능수능란하게 해낸 결과, 결국 뭐든지 복종하게 만드는 냉소주의자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 “이론에 있어서만큼은 네가 원하는 만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체하라, 그러나 네 일상생활에서는 지배적인 사회적 게임에 참여하라!”라는 말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멋진 인간이 되라고 촉구하는 것 같다. 시니컬한 줄 알았더니 뜨거운, 안 할 줄로 알았는데 하는, 관심 없는 줄 알았지만 관심 있는, 쿨한 척하지만 찐득찐득한, 무정한 줄 알았더니 껴안아주는, 다른 줄 알았는데 닮은, 혼자인 줄 알았는데 옆에 있어주는,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호통치면서도 존중하고, 경멸하면서도 끌어안고….

쉼보르스카가 『끝과 시작』에서 쓴 <우화>란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부들이 바다 깊은 곳에서 유리병을 낚아 올렸어요. 그 병에는 작은 쪽지가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써있었답니다.

“사람들이여, 나 좀 구해주세요! 나 여기 있어요. 대양이 나를 파도에 싣고서 무인도에 갖다 버렸답니다. 모래사장에 나와 도움을 기다리고 있어요. 서둘러 주세요, 나 여기 있을게요.”

“이 쪽지에는 날짜가 누락되어 있군, 틀림없이 이미 늦었을 거야. 유리병이 얼마나 오랫동안 바다를 떠다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첫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게다가 장소도 적혀 있질 않군, 대양이 한둘도 아니고, 어디를 말하는지 통 알 수가 없어.”
두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늦은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야. 여기라는 섬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세 번째 어부가 말했습니다.

불현듯 어색한 분위기와 함께 침묵이 흘렀습니다. 원래 다 그런 법,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병 속에 든 메시지는 언제 생명력을 갖게 되는가? 누군가 주워서 병뚜껑을 따고 읽어볼 때라기보다는 바다에 던져진 바로,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우리 주위에 있는 신문의 사회면 단신 속 이야기들은 어쩌면 아직 건져지지 않았지만 누군가에 의해 난파선 밖으로 던져진 병 속에 든 메시지일지 모른다.

*덧붙이는 말 :
방송사 가을 개편으로 <침대와 책> 연재를 마칩니다.
저는 다음 기회에 곧 빨리, 당장 만났으면 좋겠지만….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안녕 안녕.
목이 메이는 안녕 안녕.
커튼 콜을 기다리며, 뒤돌아보며 안녕 안녕.
여러분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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