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개인의 삶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역할

세상의 수많은 범죄는 종교가 있는, 그것도 아주 신심 깊은 신자가 저지릅니다. 타락한 세상의 최근 경향이 아니라 늘 그랬죠. 사람들은 필요와 믿음에 따라 종교를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종교는 그들의 행동을 그렇게까지 효율적으로 제어하지는 못합니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브리치>를 보면서, 전 로버트 핸슨의 지금 심정이 어떨지 생각해 봤습니다. 그가 누구냐고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이중 스파이라고 불리는 전직 FBI 요원입니다. 20년 넘게 소련과 러시아에 미국의 기밀 정보를 골라 팔고 그 값으로 개인 재산을 불린 인물이죠. <브리치>는 그를 검거하려는 작전에 말려든 풋내기 FBI 훈련생과 그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영화를 평가하는 건 지금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죠. 아까 전 그의 심정이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왜일까요? 그건 검거 작전 중 폭로된 게 그의 배반 행위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더 사적인 다른 일도 덤으로 폭로되었죠. 예를 들어, 그는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었고 스트리퍼와 놀아난 적도 있었습니다. 더 질이 낮은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어요. 아내와 자신의 섹스 장면을 몰래카메라로 찍어서 실명으로 인터넷에 올리거나 친구들과 몰래 돌려보기도 했지요. 참, 그는 캐서린 제타 존스의 팬이었답니다. 제타 존스가 나오는 모든 영화의 DVD를 구입해서 사무실에서 반복해 보기도 했대요. 그가 사무실에서 혼자 컴퓨터로 <앤트랩먼트>의 DVD를 보면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몽땅 폭로되었다니 난감하죠? 그의 취미는 그냥 뉴스의 한구석을 장식한 것으로 그치지 않았어요. 그의 생애를 옮긴 미니시리즈 한 편과 영화에 그대로 투영되었지요.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은 결코 그의 취미를 무시할 수 없었죠. 그는 체포될 때까지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고 오푸스 데이(네,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그 재수 없는 단체 말입니다)의 회원이었으며 보수적인 남성우월주의자에 게이 혐오자였어요. 그런 인물이 뒤로는 요런 짓을 하고 있었으니, (1) 일단 쌤통이고 (2) 재미있잖아요.

로버트 핸슨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반역죄였으니 사형 선고를 받아도 마땅했지만 수사에 협조를 잘해서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네요. 지금 그는 남은 인생을 독방에서 보내는 중입니다. 하루에 단 한 시간만 독방에서 나올 수 있다는데, 그는 차라리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할 것 같습니다. 창피하지 않겠어요? 최악의 스파이로 불리는 건 괜찮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최악의 스파이 겸 음흉한 변태였다고 이름을 남기는 건 사정이 다르죠. 세상엔 자신이 최악의 변태임을 자랑스럽게 과시하면서도 여전히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이스 브뉴엘이나 사드 후작 같은 사람 말이죠. 하지만 핸슨은 그런 부류도 아니에요. 전 그의 가톨릭 신앙이 가짜였다고 믿지 않아요. 그가 반역 행위를 하면서 직장에서 지껄였던 신과 종교에 대한 선언도 몽땅 진심으로 한 말이었을 거라고 믿고요. 문제는 그런 그의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돈독 오른 배반자였고 자신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는 변태였다는 거죠.

이런 사람을 보다 보면 우린 개인의 삶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세상의 수많은 범죄는 종교가 있는, 그것도 아주 신심 깊은 신자가 저지릅니다. 타락한 세상의 최근 경향이 아니라 늘 그랬죠. 사람들은 필요와 믿음에 따라 종교를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종교는 그들의 행동을 그렇게까지 효율적으로 제어하지는 못합니다. 늘 뒷구멍이 있고 핑계가 있죠.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에서는 모두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곳에서 살인이 일어나지 않았나요? 믿음이 습관화되거나 익숙해져 있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한 사람들은 이런 모순적인 행동을 아주 자연스럽게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핸슨도 그랬죠. 습관화된 종교의 힘은 생각 외로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의 양심을 마취시킬 가능성이 더 커요. 그렇다고 모든 신자에게 그 이상의 긴장과 각성을 요구하는 것도 어려우니, 신자들 역시 그냥 적당히 타락한 평범한 동물 이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종교에서 원하는 건 평안함과 안정이지 바짝 긴장된 불안한 삶은 아니죠. 가톨릭 신앙이 핸슨에게 제공해주었던 것도 그런 안정이었습니다. 꼬리가 길어 밟히지만 않았다면, 그도 지금처럼 망신당하지 않고 행복한 신자로 잘 살았겠지요.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20세기 가장 위대한 시인의 대표작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이 오마주한 시집. 황유원 시인의 번역으로 국내 첫 완역 출간되었다. 미국 20세기 현대문학에 큰 획을 그은 비트 세대 문학 선구자,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스타일을 최대한 살려 번역되었다. 도시 패터슨의 역사를 토대로 한, 폭포를 닮은 대서사시.

본격적인 투자 필독서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경제/재테크 최상위 채널의 투자 자료를 책으로 엮었다. 5명의 치과 전문의로 구성된 트레이딩 팀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 최신 기술적 분석 자료까지 폭넓게 다룬다. 차트를 모르는 초보부터 중상급 투자자 모두 만족할 기술적 분석의 바이블을 만나보자.

타인과 만나는 황홀한 순간

『보보스』, 『두 번째 산』 데이비드 브룩스 신간. 날카로운 시선과 따뜻한 심장으로 세계와 인간을 꿰뚫어본 데이비드 브룩스가 이번에 시선을 모은 주제는 '관계'다.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와 만나는 순간을 황홀하게 그려냈다. 고립의 시대가 잃어버린 미덕을 되찾아줄 역작.

시는 왜 자꾸 태어나는가

등단 20주년을 맞이한 박연준 시인의 신작 시집. 돌멩이, 새 등 작은 존재를 오래 바라보고,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시선으로 가득하다. 시인의 불협화음에 맞춰 시를 소리 내어 따라 읽어보자. 죽음과 생, 사랑과 이별 사이에서 우리를 기다린 또 하나의 시가 탄생하고 있을 테니.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