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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고단함 뛰어넘은 풍운아 '리영희' -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우상과 이성』의 저자 리영희 선생의 삶은 우리 시대 민족주의적 지식인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이 책은 ‘우상’이 판을 치는 시대에 ‘이성’의 빛으로 그 어둠을 밝히는 하나의 이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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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과 이성』의 저자 리영희 선생의 삶은 우리 시대 민족주의적 지식인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었지만, 이 책은 ‘우상’이 판을 치는 시대에 ‘이성’의 빛으로 그 어둠을 밝히는 하나의 이정표였다.

책을 써낸 저자는 투옥되었지만 그 책은 한 시대의 역사로서, 새로운 역사를 전개시키는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그것은 냉전시대의 비논리를 극복하고 ‘민주주의 시대’의 논리를 여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한 권의 책’으로 상징되는 출판문화가 한 시대 한 사회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다시 그것은 그 시대 그 사회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킨다는 명제를 구체적으로 뒷받침한다. 아울러 저자와 책 수난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 국가사회 권력의 성격과 그 의식의 수준을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1974년 6월에 출간된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 비평사)에 이어 리영희 선생의 두 번째 평론집인 『우상과 이성』이 책으로서 세상에 나온 것은 1977년 11월 초순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아시아·한국·일본’이라는 부제가 말하듯이 아시아 및 극동의 현대사와 그 변전하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구조적 인식작업이라면, 『우상과 이성』은 오늘 우리들의 삶을 조건짓는 이 ‘사회’에 대한 일반적 비평작업에 비중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책이 우리의 민족적 삶과 연관되는 대외적 시각 교정작업이라면 뒤의 책은 대내적 시각교정작업을 시도한다고 하겠다.

책 제목을 어떻게 붙일까를 놓고 여러 날 고민했다. 이 시대 이 사회의 허위와 허구를 벗기고 진실을 밝힌다는 그런 뜻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결국 이 선생이 제안한 『우상과 이성』으로 정했다. 그러나 『우상과 이성』은 책 제목으로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상’(偶像)의 개념도 쉽지 않고 ‘이성’(理性)은 고도의 추상적인 논리를 갖는다.

“나의 글쓰기 목적은 진실 추구에서 시작된다”

40년 동안 고통을 무릅쓰고 글을 써온 목적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는 진실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과 이상(理想)’이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는 그때마다 “우상과 이상이 아니고 우상과 이성입니다”라고 고쳐주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제목이 호소력을 갖고 많은 독자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내용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민족적 삶을 규정하는 리얼리티를 제대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 추상성과 이론성을 뒷받침하는 상황성이 있기에 한 권의 책 제목으로서 『우상과 이성』은 마력 또는 설득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상과 이성』의 저자가 투옥당하고 책이 수난을 당함으로써, 이 책은 문제작 또는 명저로 ‘만들어지고’ ‘역사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상과 이성』은 이제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현실로서 이 시대 이 사회에 굳건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었다. ‘우상’과 ‘이성’에 대해서 저자는 책 머리말 ‘읽는 이에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잘 알려진 노신의 글 가운데,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방 속에 갇혀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벽에 구멍을 뚫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를 넣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궁리하면서 고민하는 상황의 이야기가 있다.

방 속의 사람은 감각과 의식이 마비되어 있는 ?닭에 그 상태를 고통으로 느끼지 않을 뿐더러 자연스럽게까지 생각하면서 살아(죽어)가고 있다. 그런 상태의 사람에게 진실을 보는 시력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되살려 줄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은 차라리 죄악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노신은 물론, 당시 중국의 사회와 중국인의 상태를 안타까워해서 쓴 것이다.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전환시대의 논리』의 독자 가운데 의식의 깊은 중독증 상태에서 깨어나는 괴로움을 경험한 이야기를 나는 적지 않게 들었다. 이것이 독자에게 송구스럽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져가는 괴로움의 고백이었다.

절대적인 것,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믿고 있던 그 많은 우상의 알맹이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그 잠을 깨는 괴로움을 준 것을 사과해야 하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역할을 다소나마 할 수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현실에 가려진 허위를 벗기는 이성의 빛과 공기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책의 이름을 일컬어 『우상과 이성』이라고 한 이유이다.”


『전환시대의 논리』로 이미 많은 독자를 가진 리영희 교수였지만 『우상과 이성』 역시 서점에 책이 깔리자마자 큰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상’의 시대를 파괴하는, ‘이성’의 힘을 발휘하는 한 권의 책이었다. 그러나 신문에 책이 나왔다는 소식 한 줄 실리기 전에 우상이 이성을 누르기 시작했다. 책 머리말이 예언한 것처럼 고통이 그에게 다가왔다.

1977년 11월 23일 오전 7시에 저자 리영희 교수는 연행되어 갔고 나흘 후에 리 선생의 편역서인 『8억인과의 대화』를 펴낸 창작과 비평사 대표 백낙청 교수(당시 해직교수)와 한길사의 발행인 박관순이 연행되어 갔다.(애초엔 아내의 이름으로 한길사를 등록했다. 나는 취직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책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저자와 두 출판사의 발행인에 대한 수사는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최초의 집단적 의사표시가 <조선일보>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로부터 나왔다. 12월 3일 조선투위는 성명을 내고 리 교수의 연행수사는 “언론에 대한 새로운 탄압의 일환”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는 <조선일보> 외신부장을 역임하고 자유언론의 창달을 위해 헌신해온 리영희 씨가 지난 11월 23일 오전 수사기관에 연행된 후 10여 일이 지나도록 계속 억류되어 있는 사태를 중시한다. 리영희 씨는 그간 신문·잡지에 발표한 수많은 논설과 이를 엮은 『전환시대의 논리』 등 많은 저서를 통해 우리의 낙후된 인식을 깨우치고 경직된 현실감각의 국제적 지평을 넓혀준 탁월한 식견과 지조의 언론인이다.”

‘예정된 코스’에 따라 기소되고 재판받아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온 『우상과 이성』
리영희 교수는 결국 풀려나지 않고 12월 27일 기소되었다(백낙청 교수는 불구속기소 되었고, 박관순은 불기소 처분되었다). 『우상과 이성』에 실린 수필·평론 등 24편 가운데 ‘불효자의 변’을 빼고는 이미 신문·잡지에 발표된 글이었다. 전혀 문제가 된 바 없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리영희 선생은 ‘예정된 코스’에 따라 기소되고 재판받고 만 2년 동안의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아무튼 『우상과 이성』 필화사건은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필화사건의 하나였던 것이고, 그 재판과정에서 반공법을 둘러싼 본격적인 토론이 개진되었던 점에서도 기록되어야 할 사건이었다.

경찰과 검찰이 문제를 삼았던 내용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나를 오늘의 시점에서 살펴보면서, 우리는 한 지식인의 예언적인 비판기능을 보게 되고, 이 시대의 권력 및 우상의 성격이 어떤 것이었나를 실제로 보게 된다.

우선, ‘제1부 부정의 부정:식민지시대의 극복’에 실린 글 가운데 하나인 ‘다나까 망언에 생각한다’가 문제가 되었다. 즉, 일본 수상 다나까가 의회에서 “일본의 한국 통치교육이 한국인에게 도움이 되었다”라는 망언을 보고, 그것을 말한 일본 쪽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형식’과 그 ‘문제를 보는 시각’을 비판한 글이다. 리 교수는 우리의 지도적 인사들이 일본인과의 대화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는 ‘식민지적 유산’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는데 그것이 반공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북한 대표가 처음으로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우리말로 했다는 것이 작년 겨울 한때 화제가 되었지만, 긴 눈으로 높은 차원의 ‘효능’을 생각할 때, 이데올로기의 정치를 떠나서 같은 민족으로서 이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의 경험으로도 약소국, 특히 식민지였던 민족의 대표가 구 식민모국 외교관보다 더 ‘유창’한 외국어로 연설하는 것보다 차라리 서툴기는 하지만, 긍지를 지키면서 하는 연설에 대국 외교관들이 찬사와 경의를 표하는 것을 목격한 일이 있다.”

제2부 ‘현대 중국의 이해’에 들어 있는 ‘모택동의 교육사상’ 또한 문제가 되었다. 지금은 폐간되어 없지만 1976년 12월호 <월간 대화>에 발표했던 이 논문에서 리 교수는, 외국인으로서는 모택동을 잘 안다고 하는 에드가 스노의 평을 인용했다. 물론 “각기의 사상의 입장과 현대 중국의 지식 정도에 따라서” 에드가 스노의 말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는 단서를 붙였다.

“대중 속에 있는 모택동의 오늘의 모습은 사형집행자의 그것은 아니다. 그를 위대하게 하고 있는 것은 그가 단순히 당의 보스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수 억의 중국인에게는 순수한 의미에서 교사, 정치가, 전략가, 철학자, 계관시인, 민족적 영웅, 가장, 그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방자라는 것을 합친 전부인 까닭이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모택동은 공자·노자·루소·마르크스, 게다가 석가를 합친 존재이다.”

검찰은 특히 ‘농사꾼 임 군에게 띄우는 편지’의 많은 부분을 문제 삼았다. 편지 형식으로 된 이 글을 통해 오늘의 농촌이 당하는 고통, 그 고통의 원인을 밝혀 보는 것이었다. 검찰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반공법 위반’이라고 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도시문화, 특히 농촌을 덮어버리고 있는 ‘서울문화’란 그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농민을 희생으로 해서 만들어진 문화형태이고, 조금 더 크게는 미국과 일본의 경제적 지배에 대한 이 민족 대중의 저항감을 심정·심리적 측면에서 쓰다듬는 마취적·최면술적·아편적인 문화 내용이라고 생각하네.”

“양심적인 지식인에 대한 탄압”

리영희 선생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2년 복역을 마치고, 1980년 1월 광주교도소 문을 나서고 있다.

리영희 교수에 대한 구속기소 및 백낙청 교수에 대한 불구속기소는 지식인사회로부터 잇단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12월 8일 성명을 발표하고 “일방적이고도 왜곡된 시각만을 강요해오던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국제적 시야를 넓혀준 용기 있고 양식 있는 언론인” 리영희 교수를 구속하는 것은 “양심적인 지식인에 대한 탄압”이라고 규정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77 인권선언’에서 “언론의 위축상태가 이제 출판계에까지 확대되어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구속되고 창작과 비평사, 한길사 등 양심적인 출판사의 대표들이 입건”되었음을 지적, “우리는 표현의 자유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해서만 쟁취될 ? 있는 것임을 믿고 모든 양심적인 지식인, 고난 받는 근로자, 시민, 학생들과 더불어 끝까지 분투할 것을 다짐한다”라고 선언했다.

12월 16일에는 김동길·김용준·김찬국·노명식·안병무·이계준·한완상·김병걸·김윤수·남성길·성내운·염무웅·이우정 교수 등 해직교수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활동의 자유가 제도적으로 보장될 것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학문의 연구는 오직 진리의 탐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바, 이는 결코 어떤 일개 정파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될 수 없으며, 학문적 오류는 순수한 이론적 비판에 의해서만 수정 극복될 수 있다. 따라서 연구자의 인신에 대한 구속과 입건은 연구와 저술활동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며, 나아가 학문의 존립 근거 자체를 말살하려는 처사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강단과 연구실에서 쫓겨난 교수에게 자유로운 발표와 저술의 기회마저 봉쇄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 개인의 생존권에 대한 탄압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어 학계·언론계·문단의 인사 82명이 검찰총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했다.

“리영희 씨는 조선일보사와 합동통신사에 재직하는 동안 그의 냉철한 보도정신이 높이 평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 논평, 해설, 혹은 외국문헌의 번역을 통하여 변전하는 국내외 정세를 분석하는 일에서 많은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받아왔습니다. 또 중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분야에 있어서도 이제까지 자료이용과 객관적인 문제접근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리영희 씨는 사실탐구를 위하여 힘겨운 선구역할을 담당하여 왔습니다.”

이밖에 1978년 2월초에는 기독자교수협의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한국기독학생연맹 등도 리 교수의 구속을 항의하고 석방하라는 의견을 발표했다.

리영희 교수가 연행될 때 팔순의 노모가 병석에 계셨다. 리 교수는 병석의 어머니에게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집을 나섰다. 기소되던 이튿날인 12월 28일 새벽, 그 어머니가 아들을 찾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8일 오전 면회 온 부인 윤영자 여사로부터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들은 리 교수는 망연자실했다.

자유를 차단당한 아들은 그날 저녁 서울구치소 4사상(上) 6호 감방에 빈소를 차리고 ‘감방음식’으로 예를 올렸다. 역시 구속되어 있던 김지하 시인이 사탕을 보내주었다. 그는 어머니의 영전에 바치는 편지를 써서 집으로 보냈다.

‘불효자의 변’

“어머니의 영전에 바칩니다. 평소에 불효자식이더니 끝내 세상을 떠나시는 자리에서 임종도 못한 죄인이 되었으니 한만이 앞섭니다. 어디로 간다고 말씀도 드리지 못한 채 집을 나와 지금 이곳 몸의 자유를 잃고 있는 그동안 어머니가 아들을 찾는 소리와 그 몸짓을 늘 듣고 보는 듯하였습니다. 좁은 방 속에 주어지는 음식·과일을 고여 놓고 멀리서 하루 세 번 어머니의 명복을 비오니, 부디 극락 가셔서 먼저 가신 아버지를 만나 영원히 행복하시옵소서.”


어머니가 별세하자 주위 인사들은 아들이 장례라도 치르고 다시 들어가게 해달라고 당국과 교섭했다. 송건호·이호철·임재경 선생 등이 소설가 이병주 선생을 앞세워 검찰총장을 방문하고 그 뜻을 전했다. 그렇게 될 것 같았지만 리 선생은 결국 감옥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상주 없는 장례가 친지들에 의해 치러졌다.

당초 책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나는 리 선생에게 이미 발표한 글로만 엮지 말고 새 원고를 한두 편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렸는데, 그때 새로 집필한 것이 ‘불효자의 변’이었다. ‘현대의 충효사상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는 이 글은, 이 시대에 충과 효가 어떠한 의미구조를 가지며, 권위주의 정치사회에서 그것이 어떠한 형식과 논리로 민중들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는가를 비판한 것이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도 효도를 하지 못했고 현재 살아 계시는 어머니에게도 효도를 하지 못하고 있는 불효자이다. 선친의 마지막 병고 때에는 의사 한 번 불러 대지 못한 채 돌아가시게 했다.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가족인데다가, 이름은 언론기관이라고 버젓하지만 안에서 뒷바라지하는 소위 ‘내근’인 나에게는, 쥐꼬리만한 월급밖에 없는 수입으로써는 가족의 세 끼를 보장하는 일조차 힘에 겨운 형편이었다.

이 쓰라린 경험은 나에게 효도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해방 후 내려오신 아버지를 10년쯤 모시면서 그 회갑조차 못해 드리고 이렇게 세상을 뜨게 한 뒤에야 나는 비로소 철이 들어 아버지가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럴수록 조금 살게 된 후에는 만사에 선친 생각이 앞선다.

효는 아름다운 인간감정의 행동적 표현이다. 효를 다하지 못한 필자 같은 인간은 죽는 날까지 그 못다함을 원한으로 품고 고민할 것이다. 필자도 자식들에게는 효의 도덕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 사회의 사회적 신앙, 교육의 근본정신, 인간관계의 범주로 강조하려 할 때에는 그것만이 아닌 더 중요한 근본적 사실을 아울러 생각해 보도록 권하고 싶어진다.”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단 심정으로 상고이유서 집필

리영희 선생의 저작은 한길사에서 2006년 저작집으로 묶여 나왔다.

『우상과 이성』『8억인과의 대화』의 내용을 두고 검찰과 변호인단 및 피고인들의 논전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재판정은 변호인단과 피고인들의 학문적 신념과 법적 이론들이 전개되는 토론의 장이 되었다. 이돈명·정춘용·조준희·박두환·김강영·황인철·홍성우 변호사 등이 명변론을 폈다. 변호인단은 반공법의 적용에 대해 체계적인 반격을 가하는 장문의 변론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감옥의 저자’는 200자 원고지 218매에 달하는 상고이유서를 남겼다. ‘예정된 코스’에 따라 진행되는 재판이었지만, 리 교수는 아무런 자료도 없는 면벽의 한계상황이지만, 적어도 ‘기록’이라도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이 상고이유서를 썼다고 했다. 이 상고이유서는 판결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지만, 한 진보적 지식인의 사상과 세계관을 보여주는 한 시대의 중요한 ‘문헌’이 되기에 족한 것이었다. 리 선생은 상고이유서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나라의 어려움이, 과연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민의 욕구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그 욕구를 억제하는 것으로 이익을 삼는 사람들의 권력욕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장기적 안목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은 오늘에 앞서는 30년간의 억압적 언론·출판정책의 ‘역사적 결과’입니다.

반공법의 근본적 운용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이상론’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은 역사·사회적 배경과 주·객관적 조건 변화에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한 ‘현실주의’적 요청입니다. 그 모든 희망을 충족할 수 있는 만능약은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많은 것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있습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리영희 교수는 서울형사지방법원에 의해, 검찰의 기소장과 꼭 같은, 기소장과 글자 하나 가감하지 않은 ‘판결문’을 받는 희한한 일을 당했다. 수많은 지식인들의 방청과 관심 속에 온갖 이론이 등장한 10여 차례의 재판과정이었지만, 재판부는 검찰의 기소장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처사를 남겼다.

물론 앞뒤에 붙인 형식은 다르지만. 그리하여 리 교수는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 백 교수는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아야 했다. 리 교수는 2심에서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으로 경감되었고 상고심에서는 기각당했다.

나는 『우상과 이성』의 필화사건을 계기로 하여 아내의 이름으로 되어 있던 발행인 명의를 즉시 내 앞으로 바꾸어 버렸다. 책 내는 일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계속 책은 낼 것이고 그러다 보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리영희 교수의 반공법 위반사건’은 NCC 및 교회와 사회위원회의 주최로 1979년 6월 4, 5일 성북구 상지회관에서 공식적인 토론의 주제가 되어 리 교수가 수감되어 있는 가운데 토론되었다는 사실 또한 기억될 만했다.

“나의 이야기는 상식이 될 것이다”

리 교수는 결국 1980년 1월 9일 2년 징역형이 만기되어 광주교도소로부터 출감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80년 2월 29일자로 사면법 제5조 1항 제2호 단서의 규정에 의거, 형의 언도의 효력을 상실케 하는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사면되었다.

1980년의 서울, 그 봄날에 펼쳐진 ‘자유의 물결’ 속에서 나는 판금되었던 책의 생명을 다시 살려내는 ‘작전’에 나섰다. 계엄사령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아니 모든 출판물은 계엄사의 ‘검열인’을 받아야 했다. 쳀윽고 1980년 3월 『우상과 이성』의 ‘수정증보판’이 나왔다. ‘증보판을 내면서’에서 리 교수는 그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이제, 하늘을 덮었던 짙은 먹구름의 한 모서리가 뚫리고 희미하게나마 밝은 햇빛이 내려비치기 시작했다. 여러 해 동안, 입을 다물고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던 사회생활과 인간생활의 진실에 관해서 말이 들려오고 글도 눈에 뜨인다. 이런 날을 위해서, 나름대로 몸부림쳐 왔던 필자로서는 너무도 벅찬 감격에 할말을 잃을 뿐이다.

몇 해 전에 세상에 내놓은 『전환시대의 논리』도 그렇고 이 『우상과 이성』도 그렇지만, 나의 글들이 이 사회에서 하루속히, 읽힐 필요가 없는 ‘구문’(舊聞)이거나 ‘넋두리’가 되어 버리면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이들 평론집에 수록되어 있는 글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독자들의 환영을 받고, 또 새로운 독자들에 의해서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이 사회에 가면을 벗지 않은 많은 우상이 버티고 서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그러한 까닭에, 진정한 인간해방과 진실이 지배하는 사회를 바라는 필자로서는, 이 책이 극복되는 날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리고 ‘그 정도의 이야기는 상식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필자의 기쁨은 크다는 역리(逆理)를 믿는 것이다.”

『우상과 이성』이 약간의 손질을 거치고 다른 원고를 추가하여 세상의 빛을 받고(1988년 7월에 『우상과 이성』은 제2개정판이 간행된다) 또 대학으로 ‘복직’되었지만, 10·26 이후의 신군부는 ‘5·17 광주내란음모가담’을 뒤집어 씌워 다시 구속하였고 결국은 1984년까지 해직교수가 되었다.

물론 리 교수뿐 아니라 5·17로 한길사의 많은 필자가 해직교수가 되든가 수난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10·26 이전보다 더 많은 지식인들이 수난을 당했다는 사실은 5·17의 성격, 그리고 그 이후의 정치사회의 상황을 설명해준다.

시대의 한계상황을 훌쩍 뛰어넘는 사상과 이론

한길사에서 2005년 출간된 『대화』
한길사는 리영희 교수가 ‘80년대 해직교수시절’에 집필한 글을 중심으로 1984년 10월 제3의 평론집인 『분단을 넘어서』를 ‘오늘의 사상신서’ 제82권으로 펴냈다. 이해 9월 1일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에 큰 홍수가 있었고, 북한으로부터 쌀·시멘트 등 ‘수해의연물자’가 막혔던 휴전선을 넘어서, 40년의 ‘분단을 넘어서’ 남녘으로 운송되었다. 저자는 ‘독자에게 구하는 양해’라는 부제를 붙인 책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침 책의 편집 작업이 끝나 필자의 머리말을 쓰려는 날 아침에 남쪽의 수재민을 위한 북쪽으로부터의 의연물자가 휴전선을 넘어서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얼마나 상서로운 일인가!

해방과 분단의 40년, 휴전선이 생긴 지 30여 년 만에, 민족을 갈라놓은 굳은 장벽에 통로가 열린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작은 통로에 불과하지만 민족사적으로는 큰 의미를 지닌 돌파구이다.

돌이켜보면 1972년, 남·북의 지도자가 평화·자주·외세불간섭의 정신으로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기약했었고, 최근에는 우리 사회 안에서 40년의 한 맺힌 이산가족의 대대적 재회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모두 이 겨레의 슬기를 세계 만방에 과시한 민족적 쾌사였다. 이제부터 분단된 동포 간의 장벽을 넘으려는 의지가 더욱 굳게 합쳐져야 할 것이다.

한 겨레는 갈라져서 살 수 없다. 안으로는 대립의 요소들을 해소하고, 밖으로는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조건들을 꾸준히 극복해나가야 한다. 우리 자신이 그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다른 누가 그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줄 것이며, 그 험난한 길을 대신 걸어 줄 것인가?”

이 민족분단의 진실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한 지식인으로서의 리영희 선생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지만, 때로는 그 현실의 한계상황 또는 고단함을 훌쩍 초월하는 정의와 진리의 협객 같은 사나이였다. 그의 이론과 사상은 비수같이 동시대인들의 가슴과 머리에 각인되었다. ‘스스로 공부해서’ 세계에 보편적인 이론과 사상을 창출해내는 참으로 ‘주체적이고’ ‘토종적인’ 넓이와 깊이였다.

한동안 감옥에 가 있다가, 어느 날 다시 복직되어 대학의 강단에 서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연행되고 수사받고, 때로는 권력에 의해 비판받았다. 시대를 호흡하는 풍운아의 기개였다. 그의 이론과 사상, 열정과 문제의식은 분단한국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의 것으로, 한 시대의 문제를 고뇌하는 양심적인 실천의 상징으로 지식인들이 주목하는 존재가 되었다.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의 창간 기념 방북 취재 ‘기획건’으로 안기부에 구속되었다가 160일 만에 석방되었다. 1998년에는 53년 전에 헤어진 형님과 둘째 누님의 생사확인을 위해 북한 당국의 개별초청으로 방북했는데 두 분 다 별세했고 조카만 만났다.

1995년에는 한길사가 재정한 ‘단재상’을 받았고, 1997년에는 ‘늦봄 통일상’을 받았다. 2000년에는 ‘만해상’을 받았다. 이어 2006년에는 한국기자협회로부터 ‘제1회 기자의 혼 상’을 받았으며 2007년에는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았다.

자전적인 『대화』와 저작 전집 출간

나는 리영희 선생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낳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간문화재’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한국적인 이론과 사상을 창출해낸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시대 이론과 사상의 인간문화재 리영희의 전모를 담아내는 출판기획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하나가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었다. 선생은 2000년 11월 집필 중에 뇌출혈로 우측 반신이 마비되어 글을 더 쓸 수 없게 되었다(지금은 많이 회복되었다). 나는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선생이 살아온 시대와 생애를 종합해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인간문화재’와의 대담을 비디오로 모두 찍었다. 한 시대를 진동시키고 각성시킨 한 이론가와 사상가는 당연히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46판 748쪽에 이르는 『대화』는 많은 매체와 기관으로부터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극우적인 비판’이 으레 리영희 선생을 시도 때도 없이 ‘비이성적으로’ 공격해대곤 했지만, 선생의 역사적인 삶과 사상, 그 이론과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독자들의 열띤 반향으로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선생은 『대화』에서 스스로의 삶의 자세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棄權)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또 하나의 기획은 선생의 전집 출판이었다. 선생이 남긴 글이야말로 우리 현대사가 창출해낸 탁월한 ‘문화유산’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한길사 창립 30주년 기념 기획의 일환으로 ‘리영희 저작집’ 전 12권을 작업하여 2006년 8월에 동시 간행했다. 강만길·고은·박석무·백낙청·이만열·이상희·이이화·임재경·최일남 선생이 간행위원으로, 김동춘·김주언·백영서·서중석·신학림·이삼성·임헌영·최영묵씨 등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선생의 전집은 사진작가 배병우 교수의 소나무 사진으로 커버를 장식했다. 나는 리영희 선생을 이 땅의 삶과 정신을 표상하는 늘 푸른 소나무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래, 배병우 교수의 아름답고 힘찬 소나무 사진이다!’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역시 배병우 교수의 소나무로 표지를 꾸민 ‘리영희 저작집’은 이 시대를 진지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서가를 장식하는, 살아 있는 아름다운 책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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