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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화하는 진화 -〈히어로즈〉

〈히어로즈〉의 이야기는 세상을 구한다는 임무 자체가 아니라, 그런 다양한 캐릭터들이 살아가고, 아직 제대로 제어하지도 못하는 초능력을 놓고 영웅이 될 것인지 괴물이 될 것인지 고민하고 변화해 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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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들어선 NBC에서는 이론의 여지없이 떡잎이 안 보이는 쇼도 있었지만, 다른 방송국에 갔으면 그토록 단명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쇼의 모가지가 우후죽순으로 잘려나갔습니다. 대표적으로 〈서피스〉나 〈커맨더 인 치프〉는 한 시즌을 채우지 못했지요. 프라임 중의 프라임 타임인 목요일의 저녁 시간을 장악했던 저 유명한 시트콤들과 〈ER〉〈웨스트윙〉 같은 드라마를 통해, 1990년대 대부분을 두 자릿수 성장률로 장식했던 NBC는 어느 날 갑자기 급전직하로 추락했습니다.

2006년 가을 시즌에 NBC의 오랜 슬럼프에 단비를 뿌려준 것은 뜻밖에도 SF인 〈히어로즈〉입니다. 〈미디엄〉이 약간 색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전통적인 드라마에 치중해 오던 NBC가 Sci-Fi라는 SF 전문 채널이 따로 있으면서도, 공중파 월요일 9시 프라임 타임에 이 드라마를 배치한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엉뚱하고, 뜻밖의 선택이고, 모험이었습니다. 결과는? 결과 역시 뜻밖이었습니다. 시리즈 프리미어가 18~49세 사이의 성인 1,430만 명을 월요일 밤 9시에 TV 앞으로 끌어당겼던 것입니다.

영웅들, 떼거리로 몰려오다

장르, 특히 한 번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닌 TV 연속극에서 장르 드라마는 마니아 외의 광범위한 시청자층을 모을 수 없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한창 만화책을 읽을 때인 남자 청소년들이 주 소비자층인 SF는 더욱 그렇겠지요. 구성이 아무리 탄탄하고 스토리가 흥미로워도 〈스몰빌〉은 성인 시청자층을 끌어 모으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아니지요. 역부족을 탓할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에 청소년층을 겨냥했기 때문입니다.

떼거리 영웅(초능력자) 이야기가 새로운 것도 아닙니다. 이미 말한 〈스몰빌〉이 있고, 수십 년의 시차를 두고 실종된 4,400명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씩 능력을 지니고 나타나 펼치는 USA 채널의 드라마 〈4400〉이 있고, 무엇보다도 영화 〈엑스맨〉이 새 밀레니엄의 시작을 한바탕 쓸고 지나간 터입니다. 게다가 언뜻 보기에 〈히어로즈〉는 만화적인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빌려옵니다.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초능력자가 등장하고, 주요 배역 가운데 하나를 만화가로 설정해서 그의 만화를 계속 보여주며, 타이포그래피도 만화의 그것을 연상시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목이라든지, 배우의 이름 등을 표현한 글씨는 실제 만화가인 팀 세일의 필체에 맞춘 것입니다. 그는 극 중 만화가 아이작 멘데스의 그림을 그리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화라고 황당하기만 하고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만을 다룰까요? 야구만화라는 이유만으로 『H2』가, 권투만화라는 이유만으로 『내일의 조』가, 판타지라는 이유만으로 『베르세르크』가 그 큰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만화적인 장치가 넘쳐나는 것은 〈히어로즈〉의 인기를 거의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1년에 100편이 넘는 파일럿이 제작된다는 미국 드라마, 즉 살아남는 것은 스무 편이나 될까 말까 하지만, 방영권을 따내기 위해 파일럿이 100편 이상 제작된다는 미국 드라마에는 어디에서도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소재란 이제 없습니다. 새로운 장르도 물론 없습니다. 단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소재와 장르 속에서 허를 찌르는 것이 기발함의 기준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리고 보는 사람이 설득당할 수 있는 탄탄한 이야기, 현실의 이야기와 매치해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그것도 넘칠 만큼 많아야 합니다. 2007년 가을 시즌에 시즌 2의 제작·방영을 확정한 〈히어로즈〉의 크리에이터 팀 크링이 시즌 5까지에 대해서 제작진과 다 얘기해 놓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야기를 증식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시즌 5까지 가는 것이야 크링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시청자의 호응이 따라주어야 하지만, 시즌 1이 마감한 지금 상태에서 벌여놓은(?) 것을 보면 마냥 허언만은 아닌 듯합니다. 우선 유전자 변형으로 초능력을 얻은 사람이 전 세계적으로 수백에서 수천 명은 된다고 극 중에서 못을 박아놓았거니와, 지구를 구하고자 뭉쳐야 하는 우리의 영웅들은 아직 다 한자리에 모이기도 어려운 실정이니 말입니다.

'기다려라, 미래는 내가 구한다', 히로

그들이 뭉치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그들은 어떤 유전자 변형 때문에 능력을 얻기 전까지는 모두 평범한 사람이었거든요. 그들에게는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초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곱씹어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신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데,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걱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금방 새살이 돋고 목숨이 끊어졌다가도 살아나는 치유능력의 여고생 클레어가 있습니다. 클레어는 아홉 살 때라면 비범한 능력 덕분에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어깨를 으쓱거렸을 법도 하지만,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더없이 무서운 짐이 되고 친구들에게 괴물 취급을 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춘기 소녀입니다. 그리고 제지회사 직원으로 위장한 채 초능력자들과 관련한 비밀조직 ‘컴퍼니’에서 일하는 클레어의 양아버지는 그런 딸이 실험실의 기니피그가 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비밀을 지키지요.

수배자로 쫓기는 남편 걱정에, 아이 양육에 눌려 사는 니키는 동영상 매춘을 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 하지만, 자신을 거울 속에 가둬놓고 시시때때로 제 몸에 들어가 해결사 노릇을 하고 다니는 엄청난 완력의 제시카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열 살 남짓한 어린 나이에도 곱게 자랄 사정이 못 되어 어른들의 복잡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말았고, 제시카의 존재까지 알게 된 니키의 아들 마이카는 기계를 제 뜻대로 다루는 능력을 숨깁니다.

남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경찰관 매트 파크먼도 있습니다. 범죄자를 잡게도 해주지만 아내가 바람피운 사실까지 알게 해주는 능력이라면, 그 능력이 반갑고 소중하게만 여겨질 수 있을까요? 모든 진실을 아는 사람은 결코 건전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약에 취한 상태에서 미래를 그리는 화가 아이작 멘데스는 자신을 떠난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리고 나서 망연자실합니다.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으면서도, 정치적 야망을 위해 그 사실을 숨겨야만 하는 네이선 페트렐리가 있습니다. 그에게 자신의 능력은 아직 정치가로서 가진 수많은 비밀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리고 많은 초능력자 가운데서도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할 네이선의 동생 피터 페트렐리는 자신의 능력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방황하며 해결책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합니다.

시공간을 옮겨 다니는 능력의 나카무라 히로 정도가 제 능력을 알고 나서 마냥 기뻐하는 유일한 캐릭터랄까요? 그는 어느 날 자기에게 텔레포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정말 해맑고 단순하게 기뻐합니다. 미래에 갔다가 대재앙이 터진 것을 보고,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영웅이 되어야겠다고 뭣 모르고 다짐하기도 하지요. 〈히어로즈〉에서는 가장 만화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도 제 능력으로 막지 못하는 일이 있음을 알고 의기소침해집니다. 그리고 영웅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가 달라져야 할 만큼 많은 영웅이 이 드라마에 등장하지요.

슈퍼맨이나 배트맨, 스파이더맨 같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초영웅에게도 고뇌는 있습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평범한 인간들이 부럽고, 그들과 어울리려면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만 하는 고충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베를린 천사의 시〉의 천사처럼 지상으로는 결코 내려올 수 없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요. 괴로워하면서도 임무는 완수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합니다. 그들에게 운명이란 결코 뿌리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이 능력을 얻으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꼭 생기게 마련입니다. ‘노바디’에서 ‘섬바디’가 됐다는 자각을 사악한 용도에 쓰는 인간이 나타나지 않으면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히어로즈〉에는 히로가 능력을 되찾으려고 찾아다니는 검에 새겨진 것 등, 헬릭스 상징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의 의미는 ‘신이 보낸 위대한 인재’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인간이 되려고 다른 능력자들을 살해해서 그들의 능력을 흡수하는 사일러라는 살인마도 포함됩니다.

괴력의 엄마 니키 혹은 제시카?

겹겹이 둘러싼 캐릭터와 사건에 자칫 복잡해질 수 있는 스토리를 한데 모아주는 것은 독특한 시나리오 쓰기 시스템 덕분입니다. 이 드라마의 작가들은 팀을 나누어 각각의 에피소드를 따로 쓰는 일반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전부 다른 지역에 사는 각 캐릭터를 중심으로 팀을 나누어, 한 팀이 해당 캐릭터에 관련한 장면만 쓰는 것이지요. 워낙 많은 지역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기에, 각 캐릭터의 중심을 세우고 확실한 색깔을 입히는 것은 이 드라마의 관건입니다. 모든 작가가 모든 에피소드 집필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지요.

새롭게 태어난 친근한 영웅들의 이야기로 인기 가도를 달리는 〈히어로즈〉에는 TV에 방영되지 않은 또 다른 파일럿 버전이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서 매년 열리는 코믹 콘 2006년 행사에서는 72분짜리 미방영 파일럿이 많은 관객 앞에서 상영되었습니다. 크리에이터 톰 크링은 앞으로도 TV에서는 이 버전을 방영하지 않을 것이며, 시즌 1 DVD에 포함할 것이라고 밝혔지요.

〈히어로즈〉의 이야기는 세상을 구한다는 임무 자체가 아니라, 그런 다양한 캐릭터들이 살아가고, 아직 제대로 제어하지도 못하는 초능력을 놓고 영웅이 될 것인지 괴물이 될 것인지 고민하고 변화해 가는 모습을 그립니다. 2007년 가을에 시작하는 시즌 2에서도 이 영웅들 이야기의 진화는 계속 가동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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