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영화화되는 책을 읽는 방법

영화 때문에 책을 읽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그냥 재미없는 핑계죠. 책을 읽지 않고 영화만 봐도 그보다는 훨씬 주체적인 관객이 될 수 있으니까요.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점점 전 게으른 독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몇몇 SF를 제외한다면 최근 들어 제가 읽은 소설은 모두 영화화되었거나 곧 영화화가 될 작품들입니다. 다음 주부터 읽어야 할 책은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사놓고 몇 년째 미루던 걸 지금에야 읽을 때가 된 겁니다. 더는 미룰 수가 없어요. 곧 영화가 개봉하는 걸요. 하긴 저번 편인 『해리 포터와 불의 잔』도 영화 개봉 몇 주 전에 읽었지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이 시리즈는 계속 이런 식으로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이것 말고도 읽어야 할 책은 많습니다. 『검은 집』도 원작과 비교하기 위해 읽어야 하고 필립 풀먼의 『황금 나침반』 삼부작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기억을 되살려야 하죠. 홍석중의 『황진이』는? 읽어볼까 생각했지만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얼마 전에 시사회를 보고 왔는데 영화가 저에겐 영 별로였거든요. 다행히도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는 원래 집에 있고 다행히도 단편이었어요. 할렐루야.

이런 식으로 책을 읽는 게 옳은 일일까요? 여기에 무슨 옳고 그름이 있겠습니까. 세상엔 책을 읽는 수많은 방법이 있고 심지어 그 일부는 책이라는 물리적 대상을 접하지 않고서도 이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몰리에르 공연을 무대에서 봤다면 굳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겠죠. 대부분 희곡이라는 건 무대를 목표로 하는 중간 매개체니까요. 영화를 염두에 두고 책을 읽는다면 독자의 상상의 공간이 축소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스토리나 세부 사항이 더 자세히 들어올 수도 있을 겁니다. 전 지금의 한국에 사는 제인 오스틴 독자들이 옛날 영문학도보다 오스틴의 세계에 대해 훨씬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더 좋은 번역본이 나오기도 했지만 영화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말하고 무슨 옷을 입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건 정말 중요한 정보죠. 독자들이 제인 에어처럼 차려입은 엘리자베스 베넷을 상상하며 『오만과 편견』을 읽는다면 원작의 의미 자체가 왜곡될 겁니다. 오스틴도 그걸 원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영화 <오만과 편견>의 한 장면

영화에 끌려 다니면서 책을 읽는 건 여전히 좀 맥이 풀리는 일입니다. 자꾸 영화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가 독서 즐거움을 뒤흔들지요.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영상 매체를 접하며 자란 우리 세대의 독자들은 심상을 만들어내는 습관이 훨씬 강하고 그 능력도 이전 세대보다 낫다고요. 영화화되지 않는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수많은 독자는 머릿속으로 그 소설을 영상 매체로 옮기고 있을 겁니다. 컷을 자르고 팬을 하고 심지어 자기 멋대로 캐스팅까지 할지도 모르죠. 하긴 요샌 작가들도 그렇게 하는 모양이더군요.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은 소설 속에서 그의 단골 주인공 로버트 랭든을 해리슨 포드로 캐스팅해버렸습니다. 툭하면 해리슨 포드를 닮은 외모라고 선전했죠. 영화 버전에서 그 역은 톰 행크스에게 떨어졌지만 원래 세상 일이 그렇게 맘대로 풀리는 건 아닌지라….

물론 영화를 보고 책을 안 읽을 가능성은 더 큽니다. 종종 그건 무척이나 일반 상식 수준으로 봤을 때 엄청나게 유명한 책일 수도 있어요. 로저 이버트는 아마 수십 편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 영화를 봤겠지만 아직도 원작을 안 읽은 모양이더군요. 전 그 영감이 죽기 전엔 그 소설을 읽길 바랍니다. 그 노골적이고 뻔뻔스러운 19세기 대중문화의 재미를 체험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건 아쉬운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책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습니다. 순수하게 영화를 즐기는 것도 재미지만,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영화라는 매체 안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짐작하고 영화 속에서 그 원작을 거꾸로 추출하는 것도 큰 재미죠. 이런 식으로 봤다가 나중에 책을 읽으며 자신이 얼마나 옳았는지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상상이 원작을 능가하는 때도 있겠죠. 그럴 때면 그 이야기를 직접 쓰면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 여러분은 수용자에서 창작자로 옮겨가는 거죠.

세상에는 예술작품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감상하는 수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영화는 그 가능성을 몇 배로 늘려놓았을 뿐이죠. 단지 그 다양한 길을 탐구하는 건 독자와 관객의 관심과 의지에 달렸습니다. 영화 때문에 책을 읽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그냥 재미없는 핑계죠. 책을 읽지 않고 영화만 봐도 그보다는 훨씬 주체적인 관객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3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수많은 사랑의 사건들에 관하여

청춘이란 단어와 가장 가까운 시인 이병률의 일곱번째 시집. 이번 신작은 ‘생의 암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사랑에 관한 단상이다. 언어화되기 전, 시제조차 결정할 수 없는 사랑의 사건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아름답고 처연한 봄, 시인의 고백에 기대어 소란한 나의 마음을 살펴보시기를.

청춘의 거울, 정영욱의 단단한 위로

70만 독자의 마음을 해석해준 에세이스트 정영욱의 신작. 관계와 자존감에 대한 불안을 짚어내며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결국 현명한 선택임을 일깨운다. 청춘앓이를 겪고 있는 모든 이에게, 결국 해내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전하는 작가의 문장들을 마주해보자.

내 마음을 좀먹는 질투를 날려 버려!

어린이가 지닌 마음의 힘을 믿는 유설화 작가의 <장갑 초등학교> 시리즈 신작! 장갑 초등학교에 새로 전학 온 발가락 양말! 야구 장갑은 운동을 좋아하는 발가락 양말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호감은 곧 질투로 바뀌게 된다. 과연 야구 장갑은 질투심을 떨쳐 버리고, 발가락 양말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위기는 최고의 기회다!

『내일의 부』, 『부의 체인저』로 남다른 통찰과 새로운 투자 매뉴얼을 전한 조던 김장섭의 신간이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되며 찾아오는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저자만의 새로운 투자 해법을 담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 삼아 부의 길로 들어서는 조던식 매뉴얼을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