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과학수사가 열어젖힌 TV 르네상스 - 〈CSI〉

〈CSI〉를 보는 재미는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소년탐정 김전일』을 보는 재미입니다. 바로 추리 말입니다. 그 추리는 정교한 과학적 증거에서 비롯합니다. 수사 과정이 설득력을 얻는 것이지요.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2001년이었던가, 토요일 낮에 채널을 돌리다가 MBC에서 틀어주는 〈CSI〉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히 문화적 충격이라고 할 만했지요. 그전에도 화제가 될 만한 드라마는 많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를 열어젖힌 〈트윈 픽스〉가 있었고, 말하려면 입 아픈 〈엑스 파일〉, 시트콤 〈프렌즈〉 등은 열심히 비디오를 돌리며 보았던 터였습니다.

1990년대 말에 이르러서도 〈도슨의 청춘 일기〉〈앨리 맥빌〉〈섹스 앤 더 시티〉〈웨스트 윙〉 등이 미국 드라마 중흥의 시동을 걸고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미드 열풍의 뇌관을 결정적으로 건드린 것은 〈프리즌 브레이크〉였지만, 미국에서 방송 지형도를 바꿀 만큼 드라마 시장의 부흥과 팽창에 진정한 진원지가 되었던 것은 과학수사 드라마 〈CSI〉입니다. 그리고 〈CSI〉는 ‘과학’ 하면 부르르 떠는 많은 사람의 인식을 바꾸어버렸습니다.

미국 TV 드라마 방송 지형도를 바꾸다! 〈CSI〉

증거를 찾고자 지문을 떠내고 DNA 검사를 비롯한 각종 실험을 하는 장면이나 보여주는 드라마가, 머리나 식히자고 TV 앞에 앉은 프라임 타임대의 시청자를 어떻게 유혹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CSI〉는 처음에 최고의 프라임 타임인 목요일 밤이 아닌 금요일 밤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즌 1의 뚜껑이 열리고 중반 남짓 흘렀을 때, 〈프렌즈〉와 〈윌 앤 그레이스〉 등이 버티는 NBC 막강 시트콤 라인업의 경쟁상대로 목요일 밤으로 방영 시간이 전격 변경되었습니다.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며 1980~90년대를 쭉 통틀어 목요일 밤을 호령했던 NBC의 시트콤들, 즉 〈치어스〉〈사인펠트〉〈프레이저〉〈프렌즈〉〈윌 앤 그레이스〉는 부상하는 리얼리티 쇼를 걱정하다가 드라마에 불의의 일격을 맞으며 크게 휘청했습니다. 〈프렌즈〉가 정점을 찍고 내려오던 3~4년을 힘겹게 버티다가 빅 타이틀들이 모두 막을 내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CSI〉의 CBS는 2000년대 초반 가장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네트워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CBS는 현재 거의 범람 수준의 수사 드라마와 약진하는 ABC 때문에 약간 주춤하는 기미는 있지만, 미국에서 여전히 가장 높은 시청률을 점유하는 네트워크로서 건재합니다.

반장 중의 반장은 역시 길 반장님!

잔인하고 야한 장면에 관해서는 공중파 네트워크의 한계를 실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CSI〉는 강한 액션과 폭력을 주 무기로 삼는 드라마는 아닙니다. 주인공인 과학수사대의 대원들이 현장에서 직접 범인을 잡는 것이 아니라, 사건 후의 현장을 조사하거나 증거물을 수집해 와 실험실에서 범죄의 흔적을 증명해 내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2000년대 반장 부대를 이끌었던 시조 길버트 그리섬은 곤충학 박사학위의 법의학자로 몸에 총을 지니고 다니는 것조차 꺼립니다. 그의 부하 워릭 브라운이나 닉 스톡스도 마찬가지지요. 2년 후에 시작한 스핀오프 〈CSI: 마이애미〉, 그러니까 폭발물 전문가가 반장으로 있는 마이애미 편처럼 총질과 폭탄이 난무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어찌 보면 과학자들이 모인 모범생적이고 샌님 같은 분위기, 정적인 분위기입니다. 대원들도 어디 나가서 자신을 경찰이라고 하지 않고, 과학자라고 밝힙니다. 강한 액션이라고는 없고 그런 정적이고 냉철한 분위기에서 긴장감이 철철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혈흔 분석 전문가 캐서린과 섬유 분석 전문가(폼 안 난다) 닉 스톡스

〈CSI〉를 보는 재미는 『셜록 홈즈』『아르센 뤼팽』『소년탐정 김전일』을 보는 재미입니다. 바로 추리 말입니다. 그 추리는 정교한 과학적 증거에서 비롯합니다. 수사 과정이 설득력을 얻는 것이지요. 설득이 되면 재미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콜롬보〉처럼 콜롬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거나, 〈마이애미 바이스〉〈엑스 파일〉처럼 버디 무비 형식을 취하던 드라마에서 떼거리 주연의 수사물을 연 것도 〈CSI〉입니다. 그리섬의 뒤를 이은 서열 2위 캐서린 윌로우는 혈흔 분석가로 틴에이저 딸을 키우는 싱글 맘인데, 젊은 시절에는 대학 학비를 벌려고 섹시 댄서로 일한 경험이 있지요. 오디오-비디오 분석가인 워릭 브라운은 팀원 가운데 유일한 라스베가스 토박이로 점잖은 처신 뒤에 도박벽을 숨기고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가정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새라 사이들은 성분 분석을 전문으로 합니다. 유복하고 단란한 가정에서 곱게 자란 대원은 털과 섬유 분석가 닉 스톡스 정도가 전부라고나 할까요. 뭐,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라스베가스 과학수사대를 이끕니다.

또 길 그리섬의 지력과 농담을 이해하며 그에게 유일하게 응수할 수 있는 부검의 앨버트 로빈스 박사도 거의 매 회 얼굴을 비춥니다. 거기에 이 감식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브래스 경감의 블랙 유머감각이 〈CSI〉를 보는 재미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요. 그리하여 일곱 번째 시즌까지 오면서도 주요 캐스트의 부침이 없이 캐릭터와 그들 간의 관계를 견고하게 구축해 온 점도 다른 드라마가 따라오기 어려운 점입니다. 다음 시즌의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거나, 다른 드라마의 더 큰 배역으로 가게 되거나, 광고비가 책정되는 주간인 메이 스윕 때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서나, 여하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난데없이 주요 배역을 죽이곤 해서 놀란 가슴 쓸어내리게 하는 드라마가 한둘이 아니거든요.

〈CSI〉는 또 사생활이나 감정적인 디테일에 크게 집중하지 않습니다. 법의학 수사를 전문으로 하는 드라마고, 그것에 대한 묘사에 힘을 쓸 뿐, 다른 데로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습니다. 극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틀 만큼 다른 요소가 과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직장이나 학교 등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그리면서,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을 돌려가며 연애를 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데이타임 소프 오페라 같은 요소를 꼭 집어넣고야 마는 드라마가 적지 않음을 생각하면, 일종의 자신감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넣지 않고도 승부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생활을 잘 그리지는 않지만, 등장인물들은 직분에 정말 철저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직업인들 같지만, 아주 가끔 첨가되는 그들의 사랑과 연애에 대한 묘사는 그 효과가 몇 배가 됩니다. 가령 새라에 대한 그렉의 짝사랑은 무겁지 않고 가뿐합니다. 그리섬에 대한 새라의 짝사랑은 결코 폭발하는 일이 없어서 더욱 애틋합니다. 늘 농담 따먹기나 하는 브래스 경감이, 입양한 딸이 말썽을 부릴 때 아픈 가슴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모습은 찡합니다.

도박벽이 있는 워릭,
은근히 잘 생겨서 인기가 아주 많아요

라스베가스가 배경인 만큼 도박벽 있는 대원 하나 등장하는 것도 이상할 게 있겠습니까. 워릭이 경력에 흠집을 내지 않고 노름 버릇을 고쳐주도록 도와주는 길 그리섬의 동료애는 은근하게 진합니다. 맞습니다. 〈CSI〉의 동료애는 지지고 볶지 않으면서도, 말 한마디 없이도 은근히 진한 향기를 풍깁니다. 흩어질 뻔했던 그리섬의 팀이 다시 뭉치게 된 시즌 5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그 동료애는 정점에 이릅니다. 연출자로 나선 쿠엔틴 타란티노가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던 에피소드지요. 이 에피소드는 미국에서 물경 4,000만 명이 넘는 시청자들을 그러모으며, 〈CSI〉 최고의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되었답니다.

스핀오프인 〈CSI: 마이애미〉나 〈CSI: 뉴욕〉에도 그렇지만, 이 과학수사대원들을 가만 보면 아이비리그 졸업장을 자랑하는 대원이 별로 없습니다. 하버드 출신의 새라 사이들 정도나 될까, 죄다 주립대학 출신이거나, 어쨌든 최상위권 대학은 나오지 않았지요. 아마도 리얼리티 면으로 아이비리그 출신이 박봉의 경찰에 들어간다는 설정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싸늘하게 과학 얘기만 하는 것 같은 이 드라마가 사실은 엄청난 상상력과 응용력으로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이 방정식만으로 발전해 온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것은 달이 아니라 지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상상력에서 발전해 왔음은 그 역사가 이미 증명해 주는 일이 아닌가요. 수사라는 것은 무릇 증거에 추리가 덧붙여져야 추진력이 생길 것입니다.

도무지 실패하는 법이 없는 천하무적 과학수사대원들이죠

‘라스베가스에서 벌어진 일은 라스베가스에서 묻힌다’라는 거의 속담처럼 된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막의 인공도시 라스베가스, 도박과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에 버려진 어둡고 더러운 욕망은 〈CSI〉의 대원들에게 걸리면 국물도 없습니다. 아무리 완전범죄를 꾀해도 이렇게 밝혀낸다면 애초에 나쁜 짓 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드라마가 범죄율 저하에 일조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좋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상상에도 빠지게 됩니다. 도무지 실패하는 법이 없는 그리섬의 팀원들이니까 말이지요. 하지만 실은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CSI〉에 나오는 테크놀로지는 아직 현실화되지 못한 게 적지 않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범죄를 밝혀내고 범죄자에게 징벌을 내리는 비율은 드라마 속 묘사에는 턱도 없이 못 미칩니다.

이 백전불패의 과학수사대원들 때문에 골치를 앓는 것은 현실의 경찰과 검사라고 합니다. 요컨대 ‘CSI 효과’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는데요. 물리적 증거가 적은 사건일수록 〈CSI〉의 영향 때문에 기소율이 실제로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테크놀로지가 실현된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어마어마한 비용 때문에 상용화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리는 일을 요구하는 배심원들 덕분에 이런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나고 있답니다. DNA 그거, 몇 시간만 검사하면 딱 나오는 거 아닌가 싶고 말입니다. 진짜라고 믿도록 능청스럽게 시청자를 속여 넘기는 미국 드라마의 리얼리티 구사 능력이 미덕인지 병폐인지 모를 일이지만, 덕분에 드라마의 흥미도가 높아지고 과학이라는 것 자체를 달리 보게 한 공덕은 분명히 〈CSI〉의 것입니다.

관련 상품 보기
C.S.I 과학수사대 - 라스베가스 시즌1 박스세트 (6DIsc)
SM Pictures | 원제 C.S.I. Crime Scene Investigation Boxset Vol.1 | 2007년 06월
현재 미국 최고의 TV시리즈물로 전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는 이 국내에 첫 발매된다. 이 드라마는 라스베가스라는 화려한 도시를 배경으로 범죄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하여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법의학 수사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현재 7시즌이 방영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OCN에서 처음 방영된 이후 MBC에서도 방영되어 현재까지도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모두 2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CSI 1시즌은 골든 글러브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으며 다른 시즌 역시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한다. 이번 CSI 시즌 1 DVD 세트는 총 6장의 디스크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수많은 사랑의 사건들에 관하여

청춘이란 단어와 가장 가까운 시인 이병률의 일곱번째 시집. 이번 신작은 ‘생의 암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사랑에 관한 단상이다. 언어화되기 전, 시제조차 결정할 수 없는 사랑의 사건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아름답고 처연한 봄, 시인의 고백에 기대어 소란한 나의 마음을 살펴보시기를.

청춘의 거울, 정영욱의 단단한 위로

70만 독자의 마음을 해석해준 에세이스트 정영욱의 신작. 관계와 자존감에 대한 불안을 짚어내며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결국 현명한 선택임을 일깨운다. 청춘앓이를 겪고 있는 모든 이에게, 결국 해내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전하는 작가의 문장들을 마주해보자.

내 마음을 좀먹는 질투를 날려 버려!

어린이가 지닌 마음의 힘을 믿는 유설화 작가의 <장갑 초등학교> 시리즈 신작! 장갑 초등학교에 새로 전학 온 발가락 양말! 야구 장갑은 운동을 좋아하는 발가락 양말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호감은 곧 질투로 바뀌게 된다. 과연 야구 장갑은 질투심을 떨쳐 버리고, 발가락 양말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위기는 최고의 기회다!

『내일의 부』, 『부의 체인저』로 남다른 통찰과 새로운 투자 매뉴얼을 전한 조던 김장섭의 신간이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되며 찾아오는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저자만의 새로운 투자 해법을 담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 삼아 부의 길로 들어서는 조던식 매뉴얼을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