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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탕스와 역사를 위한 변명 - 마르크 블로크

민족주의사관을 지닌 역사학자는 아니었지만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정신과 행동은 비수같이 우리 가슴에 꽂히는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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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선생의 단편소설 「변명」 첫 페이지. 이 작품은 이병주 전집 중 『마술사』에 실렸다.

이병주 선생은 <문학사상> 1972년 12월호에 단편소설 「변명」을 발표했다. 위대한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의 미완의 명저 『역사를 위한 변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참으로 이병주적인 작품이다. “나는 그 제목에 마음이 끌렸고, 그 내용에 감동했고, 그의 생애를 알고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기에 이르렀다”라고 작가는 말했다.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가했다가 1944년 58세로 나치스에 의해 총살당한 마르크 블로크와 『역사를 위한 변명』을, 나는 이병주 선생의 소설 「변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1960년대에 대학과 대학원에 다닌 나에게는 ‘역사’란, 우리 시대가 탐구하고 성취해내야 할 정신·사상·교훈 그리고 희망을 총체적으로 느끼게 하는 강렬한 메시지 같은 것이었다. 다른 동시대인들도 그러했겠지만, 나는 단재 신채호 선생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사학자와 민족주의 사관에 경도되어 있었고 이들의 책을 읽었다.

식민지 시대와 분단과 전쟁으로 이 땅에서의 역사적 삶은 참으로 고단할 수밖에 없었고, 이 같은 우리 현대사의 성격과 정체를 규명하는 한 준거로 우리는 민족주의사관을 선택했다. 민족주의사관을 지닌 역사학자는 아니었지만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정신과 행동은 비수같이 우리 가슴에 꽂히는 감동이었다.

1979년 12월 한길사가 번역 출간한 『역사를 위한 변명』(정남기 옮김)은 아마도 그 고단한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신뢰 또는 희망 같은 걸 심어주었을 것이다. ‘역사’는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변명」의 행간에서 읽어내려 했을 것이다.

이병주 선생의 소설 「변명」에서 만난 마르크 블로크

마르크 블로크는 1886년 7월 프랑스의 리옹에서 로마사를 전공하는 아버지 귀스타브 블로크와 어머니 사라 엡스타인 블로크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계와 모계 양쪽에서 유대인 혈통을 이어받았는데, 이들 집안은 프랑스혁명기에 유대인 해방법이 발표된 이래 유대교의 폐쇄적인 전통에 집착하지 않고 공화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프랑스 시민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었다.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프랑스를 사랑하는 시민이며 애국자였다.

블로크는 1904년 아버지가 다닌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역사학과 지리학을 주로 공부했다. 1908년에는 역사학·지리학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5년 입대하여 대위로 진급하였다. 제대 후 1919년부터 1936년까지 당시 프랑스 동북부의 새로운 학문적 중심으로 떠오르던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중세사 교수로 재직하는데, 필생의 학문적 동지였던 뤼시앵 페브르를 여기서 만나게 된다.

1922년에 페브르와 더불어 <사회경제사연보>, 통칭 <아날>지를 창간하여 역사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고, 1931년에는 『프랑스 농촌의 기본성격』을 발표하여 학계에서 사회경제사가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그리고 1939년부터 1940년까지는 앙리 베르가 기획한 ‘인류의 진보’ 총서의 일환으로 『봉건사회』를 저술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흔들림 없는 존재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입대한 마르크 블로크.(사진 오른쪽)
이 사진은 1917년 알제리에서 복무할 때의 모습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블로크는 다시 연구실을 박차고 나가 정규군인으로 종군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스스로 말했듯이 “프랑스 군대에서 가장 나이 많은 대위”였던 그는 이번에도 역시 대위 계급장을 달았다. 일찍이 전투요원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는 마르크 블로크는 이미 53세로 저명한 교수이자 여섯 자녀를 둔 아버지였다. 그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오직 ‘조국을 위해’ 스스로 입대한 것이었다.

1940년 자기가 속했던 프랑스군이 독일군에 패배하여 런던으로 퇴각한 후에는 그곳에 머무를 수도 있었고,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고 친독 괴뢰정부인 비시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유대계라는 자신의 처지를 고려해 망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명망을 누리는 이 대학교수는 조국 프랑스로 되돌아와서 레지스탕스 운동의 대원이 되어 독일군과 맞섰다.

왜 그랬을까. 스스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통감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이란 “작업실의 정적 속에 은둔하기를 더 좋아하고” “일상에 매몰되어 있다”고 『이상한 패배: 1940년의 증언』에서 마르크 블로크는 말한다.

배타적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애국자였고, 프랑스혁명 이래 유럽 사회가 발전시켜온 자유와 평등과 인권을 옹호하던 마르크 블로크는, 지식인이자 역사가의 사명을 다하고자 연구실로부터 분연히 일어났던 것이다. 역사가로서의 삶의 자세를 스스로 확인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항독 레지스탕스 운동에 나선 위대한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참고문헌도 없는 전장의 상황에서 역사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틈틈이 정리하여 『역사를 위한 변명: 역사가가 하는 일』이라는 명저를 남긴다. 사후에야 출간된 이 유고는 역사학에 대한 그의 강력한 옹호였다. 그는 “역사는 인간에게 참으로 의미 있고 유용한 것”이며 “인간에게 위로를 주고 아름다운 즐거움을 준다”라고도 했다.

프랑스 남부에서 ‘나르본’ 같은 가명을 쓰면서 레지스탕스 지도자로 활동하던 마르크 블로크는 1944년 3월 8일 비시 정부의 친독 의용대에게 체포되어 게슈타포에 넘겨졌다. 몽르크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으나 자신의 본명을 밝힌 것 외에 레지스탕스 운동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944년 6월 16일 리옹 북동쪽의 생 디디에 드 포르망이라는 마을 앞의 한 들판에서 58세의 마르크 블로크는 26명의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이날의 처형 대상자 가운데 레지스탕스 대원 두 명이 독일군의 확인 사살 행위 이후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들의 증언으로 마르크 블로크가 맞이한 최후의 순간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처형 당시 16세쯤 된 소년이 그의 곁에서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저 총 맞으면 아프겠지요?” 블로크는 다정한 손길로 소년의 팔을 잡으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그렇지 않단다, 얘야. 조금도 아프지 않을 거야.”

이렇듯 삶의 마지막까지 누군가에게 평화와 위안을 주고자 했던 블로크는 나치군의 총격을 받고 “프랑스 만세”를 외치며 절명했다.

블로크는 묻는다, 자녀들에게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1944년에 찍은 마르크 블로크의 마지막 사진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저에게 설명 좀 해주세요.”

『역사를 위한 변명』은 이렇게 시작된다. “몇 년 전 나의 아들이 이렇게 물었다”면서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 역사가는 “나름대로의 답변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란 시계 제조업도 고급가구 세공업도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이해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이고 “움직이는 그 무엇이다”라고 말한다. “역사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향한, 즉 정의를 향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한 명예 가운데 하나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마르크 블로크의 학문정신과 실천은 1970년대 이후에도 우리 출판사의 ‘역사기획’ 한가운데 늘 존재하는 이미지였다. 80년대에 ‘역사’는 여전히 나의 중요한 주제였다. 그러나 과연 역사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일까. 반드시 정의의 역사가 승리하는 것일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보면서 나는 ‘역사의 절망’ 또는 ‘절망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엄청난 비극적인 현실이 우리 앞에 전개되는 걸 보면서 과연 역사를 믿을 수 있는가 하는 회의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 땅의 민주주의는 그런 속에서도 구현되어갔다.

온갖 탄압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하는 열정과 행진은 중단되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역사를 다시 신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역사를 위한 변명’은 타당한 것이었다. 우리는, 역사는 그런 시련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참으로 치열한 역사체험을 하게 되었다.

『역사를 위한 변명』의 출간에 이어 1980년 초반부터 나는 마르크 블로크의 대표작 『봉건사회』의 번역출판을 시도했다. 그 무렵 염상섭 선생의 아드님 염재용 선생과 이런저런 만남이 있었는데, 1960년대에 <경향신문>에서 정치부 차장인가를 하다가 그만둔 대쪽같은 분이었다. 그런 기개를 가진 염 선생에게 영어판과 일어판을 건네주면서 번역하게 했다.

그렇게 하여 3,500매가 넘는 번역원고가 만들어졌는데, 나는 이를 한정숙 교수(현 서울대 서양사학과)에게 검토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원고를 검토한 한 교수가 이대로 출판하면 안 되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그 원고를 다 버리고 한 교수에게 번역을 다시 의뢰했다.

이렇게 해서 1986년 2월에 ‘오늘의 사상신서’ 제88·89권으로 『봉건사회』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90년대에 ‘한길그레이트북스’를 기획하면서 한 교수에게 다시 한 번 손봐달라고 해서 한길그레이트북스 제49·50권으로 『봉건사회』가 간행되었다. 2001년 5월이었다. 한 교수는 그레이트북스의 기획방침에 따라 아주 본격적인 ‘해설’을 권두에 붙였다.

이어 우리는 정남기 선생이 번역했던 『역사를 위한 변명』을 고봉만 교수(현 충북대 불어불문학과)에게 번역을 의뢰해 2000년 7월에 다시 출판했다. 한길사는 지금 저자 마르크 블로크의 다른 책을 출판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한국의 인혁당

한길사에서 출간된 『역사를 위한 변명』 표지(좌)와 『봉건사회』 1권 표지(우). 『역사를 위한 변명』은 처음에는 정남기 선생이, 두 번째는 고봉만 교수가 번역했다. 『봉건사회』도 처음에는 오늘의 사상신서 제88·89권으로 출간되었다가 재번역해 2001년 그레이트북스 제49·50권으로 출간되었다.

마르크 블로크의 책을 내면서, 그의 실천적 삶을 생각하던 나는 문득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인 풍경을 떠올린다. 이른바 ‘인혁당사건’으로 처형된 8명의 운명이 그것이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후, 유신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중앙정보부는 이 운동을 주도하던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했다.

1974년 4월 8일 국가보안법 등으로 23명을 구속하고 이듬해인 75년 4월 8일 대법원은 도예종 등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그리고 재판이 종료된 지 20시간도 지나지 않아 사형이 집행되었다.

인혁당 관련자 8명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은 참으로 경악할 일이었다. 사람들을 순간 공포감으로 휩싸이게 하였던 기억이다.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사의 언론인 130여 명이 회사에서 강제 축출되는데, 그 와중에 우리는 인혁당 관련자의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곳곳에서 유신정권에 대한 도전이 일어난 데다, 우리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이 사회적 이슈가 되던 불안한 때였다. ‘인혁당 사형집행’은 심상치 않게 전개되던 정치상황에 불안해진 유얽권력이 과잉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 불안한 시대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2007년 1월 23일 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공판에서 ‘모든 사안’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사형집행이 저질러진 지 32년 만의 일이다. 이른바 1964년의 인혁당은 서클 수준의 조직이었고, ‘인혁당 재건위’는 실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진실의 역사, 정의의 역사는 존재한다는 말인가. 나는 ‘역사’에 거는 희망 또는 신뢰를 결코 포기하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 ‘역사허무주의’에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이와 같은 희생 없이는 역사의 진실이란 증명될 수 없는 것인가.

마르크 블로크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나는 <민족일보>의 조용수를 생각한다. 1961년 2월 13일자로 창간된 <민족일보>의 발행인 조용수는 5·16 군사쿠데타로 체포되었다. 혁명재판소 상고심은 61년 10월 31일 변호인의 변론도 없이 그에게 사형을 확정했고 12월 22일 사형을 집행했다. 이병주 선생은 대하소설 『그해 5월』에서 조용수의 처형을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평화통일을 주창하던 32세의 젊은이를 ‘살인’하는 권력을 그는 소설로 고발했다. 그로부터 2년 전에 죽산 조봉암을 구명하려고 동분서주했던 청년은 바로 죽산이 밟고 갔던 그 길을 걸어가야 했다. “조용수는 갔다”라고 소설에서 작가 이병주는 분노하는 것이다.

세계의 지성과 양심의 구명 호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사건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아무개는 뒷날 문예진흥원의 원장과 국회의원을 지냈다. 또 간첩이라던 다른 아무개가 일본에서 죽자, 정부는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정의의 역사, 진실의 역사는 결코 죽지 않는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마르크 블로크의 서재 모습

나는 저 60년대 중반에 아주 작은 체험을 한 바 있다. 1965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데모에 나섰다가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서 두 달간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 그 왁자지껄하던 ‘미결수 감방’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와 같은 감방에 있던 미결수들은 금방 알았다. 오늘 누군가의 목을 맨다고. 바로 우리 옆방에 사형수가 머물고 있었다. 문이 덜커덕 열리면서 여러 명의 간수가 그를 끌고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날 두 명이 ‘절명’했는데, 그날 저녁에는 그 많은 ‘범죄자’들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교도소 안은 정말 적막강산이었다. 희미한 전등만이 허공에서 빛을 일렁거릴 뿐이었다.

그래, 아무리 죄를 지어도 사람의 ‘생명’을 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 삶과 죽음을 그렇게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생각이 다르다고, 서 있는 자리가 약간 다르다고, 우리의 현대사는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위대한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가 그때 절명하지 않았다면 더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이뤄냈을 것이다. 우리 현대사 과정에서 권력에 의해 숨져간 그 사람들이 살아 있었다면, 그들은 이 국가사회와 민족공동체를 위해 더 아름다운 일들을 해내지 않았을까.

최근 프랑스에서는 마르크 블로크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평가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고 싶다. 지식인·연구자는 물론이고 일반인까지도 그의 학문하는 자세와 조국에 대한 헌신에 대해 존경과 흠모가 커지고 있다. 프랑스의 국가영웅이 잠들어 있는 팡테옹에 그를 모시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의 저작이 기획 출판되고 전기가 잇따라 저술되고 있다. 지난 1998년에는 그가 한때 재직했던 스트라스부르 인문과학대학이 마르크 블로크 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온몸을 던져 조국을 사랑한 위대한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의 정신과 사상을 프랑스 사람들은 이렇게 가꾸어 가는 것이다.

이병주 선생의 소설 「변명」은 1천 년 전 당나라 때 시인으로 27세에 요절한 이하의 탄식으로 끝을 맺고 있다.

“원한에 사무친 사람의 피는 천 년이 가도 흙 속의 벽옥처럼 완연하리라.”

역사란 한때 휘청거릴지 몰라도 궁극으로는 아름답게 진전할 것이다. 생명과 진실, 정의와 자유는 결코 죽지 않고 우리의 머리 위에서 찬연히 빛나면서 살아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아빠, 도대체 역?란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저에게 설명 좀 해주세요.”

조국을 위해, 진실과 정의의 역사를 위해 몸을 던져 순국한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의 감동이 오늘 우리의 가슴에 다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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