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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죽음이 준 교훈

로버트 알트먼이 지난 11월 20일에 죽었습니다. 81세였어요. 요새 기준으로 보면 엄청나게 장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참 알차게 살다 죽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2006년작 <프레리 홈 컴패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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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트먼이 지난 11월 20일에 죽었습니다. 81세였어요. 요새 기준으로 보면 엄청나게 장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참 알차게 살다 죽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2006년작 <프레리 홈 컴패니언>. 어떤 사람들은 그 작품이 알트먼의 경력을 대표하는 걸작이라고 생각하고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매너리즘을 반복하는 거장의 태작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쪽이 옳건 거장의 백조의 노래로는 만족스러운 작품입니다. 올해 나온 가장 매혹적인 앙상블 영화이기도 하고요. 이 정도면 “은퇴가 뭐야? 죽는 거 말이야?”라고 말해왔던 영화쟁이의 이상적인 퇴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애도하는 대신 부러워하세요. 그는 그런 부러움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작고한 로버트 알트만 감독
그러나 전 여기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바로 알트먼의 심장 이야기죠. 올해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이 11년 전에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털어놨습니다. 그걸 이야기했다가는 건강상의 이유로 일자리를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때까지 비밀에 부쳤다는 거죠. 그때 그는 그 심장은 사고로 죽은 30대 후반의 여성이 물려준 것이라 아직 자긴 공로상을 받기엔 너무 젊다고 농담하기도 했습니다. 알트먼이 죽으면서 그 심장도 죽었죠. 사인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그 심장 때문에 죽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알트먼의 심장은 그동안 무슨 일을 했을까요? 아마 그는 <프레타 포르테> 이후에 수술을 받았을 겁니다. 그건 그 30대 후반의 여성이 없었다면 우린 <고스포드 파크><프레리 홈 컴패니언>, <진저브레드 맨>, <쿠키즈 포춘>, <더 컴퍼니>, <닥터 티와 여자들>, <태너 온 태너>를 보지 못했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들 중 몇 편은 태작이지만 몇 편은 반복해서 볼 만한 수작이고 한 편 이상은 알트먼 최대의 걸작입니다. 그 11년 동안 그 심장은 참으로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도 좋았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살았던 70살 영감의 몸에 젊은 사람의 심장을 넣어 준 게 가치 있는 일이었던 거죠.

알트먼의 경우, 삶의 가치는 계산하기 쉽습니다. 그는 예술가이고 그의 삶이 지속하는 동안 후세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듭니다. 우린 그 결과물을 모아 평점을 매기고 그가 살아온 십여 년을 저울질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죠. 대부분의 70살 노인네들은 알트먼만큼 생산적이지 못합니다. 그들 중 알트먼만큼 여유분의 삶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의 가치가 알트먼보다 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알트먼처럼 공적인 가치로 계산할 수 없는 삶은 어떻게 평가해야 합니까? 아니, 질문을 시작했으니 끝까지 넘어가 보기로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알트먼만큼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고 있는지요?

한 가지 더. 여러분이 중병을 앓고 있다면 수술이나 이식이 우리에게 약속해주는 건 삶의 일시적 연장이지 완벽한 치료가 아닙니다. 알트먼의 삶이 꽉 차 보이는 건 그가 이식받았을 때 이미 노인이었기 때문이죠. 만약 그가 30대나 40대 초반이었고 지난 10년 동안 이식받은 심장으로 뛰다가 이번 주에 죽었다면 그의 삶의 의미는 우리에게 전혀 다르게 보였을 겁니다. 그는 수술 이후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겁니다.

바로 이런 고민 때문에 사람들은 시한부 인생 영화를 봅니다. 사실 우린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요. 자연적인 수명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린 당연히 생각하는 그 수명이 극적으로 단축되었을 때에야 주어진 시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보통 시한부 인생 이야기에서는 이걸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향도 있죠.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에게 삶은 갑자기 올림픽이 됩니다. 얼마 전에 개봉한 <나 없는 내 인생>의 주인공 앤이 그런 사람이었죠. 죽기 전에 남편에게 새 여자를 구해주고, 아빠와 화해를 시도하고, 바람도 피워보고….

다행히도 우린 꼭 그런 식으로 삶을 계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린 죽은 사람의 심장을 통해 여유분의 삶을 물려받은 건 아니니까요. 우린 죄의식 없이 우리가 물려받은 시간의 일부를 게으름과 나태로 채울 자격이 있습니다. 나쁜 일은 아니죠. 모든 사람들이 알트먼처럼 일벌레는 아닙니다. 게으름 역시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고 우리가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도 상당하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사치를 누리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의 삶을 죄의식 없이 낭비할 수 있는 건 얼마나 대단한 선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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