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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이 제시하는 따뜻한 신문명론 - 우리는 디지로그로 간다

디지로그는 예측이자 지향점이자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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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를 풍미한 지식인들은 많이 존재하지만 전(全) 세대가 알고 있는 지식인은 드물다. 스무 살을 먹은 사람이나 일흔 살을 먹은 사람이나 누구나 이어령 선생을 안다.

한 세대를 풍미한 지식인들은 많이 존재하지만 전(全) 세대가 알고 있는 지식인은 드물다. 스무 살을 먹은 사람이나 일흔 살을 먹은 사람이나 누구나 이어령 선생을 안다. 나이가 든 세대는 한민족의 열정을 깨운 ‘신바람 문화’를 기억할 것이고, 젊은 세대라면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라는 슬로건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 이어령 선생은 또 하나의 화두이자 패러다임을 한국인에게 던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데뷔 50년이 되는 2006년에 출간한 『디지로그』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행복한 결혼, 디지로그

중앙일보에 연재한 칼럼을 묶어 낸 『디지로그』는 모두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출간된 ‘선언 편’은 6회분의 칼럼에 해당하는 내용이고, 뒤이어 나올 ‘전략 편’은 24회분의 칼럼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첫 번째 ‘선언 편’은 먹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무리 미디어가 사과의 색깔과 모양을 실제처럼 담아놓았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느끼는 맛과 촉감이다. 책에서 밝힌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디지털로 바뀔 수 있어도 ‘어금니로 씹는 맛’만큼은 디지털화할 수 없다. 그런 사과의 맛과 촉감, 어금니로 씹는 맛을 미디어에 담을 수 있는 세상이 디지로그 세상이다. 역도 성립한다. “성서에 나온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만나’와 같은 것이 바로 디지로그입니다.” 멀티미디어로 대표되는 디지털과 몸으로 대표되는 아날로그가 어울리는 세상이다.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는 『디지털이다』에서 앞으로의 세상은 아날로그를 디지털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모든 것을 디지털화시켜도 몸은 남습니다. 디지털을 깨물어 먹도록, 먹고 있는 밥을 미디어화하도록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흔히, 디지로그라면 ‘초콜릿 폰’을 예로 드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가장 낮은 차원의 디지로그라고 할 수 있죠.” 디지로그의 세계에서는 미디어를 통해 초콜릿의 맛과 향, 그리고 입 안에서 녹는 촉감을 느낄 수 있다.

“디지털은 0과 1의 세계입니다. 거기에 애매모호한 감정 같은 아날로그가 간섭할 틈이 없지요. 그렇지만 디지털 세상은 정과 믿음이 없으면 제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은 화상 채팅을 하고 싶어 할까요? 그것은 디지털적인 기호가 전달하는 그 외의 것에서 무엇인가를 얻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메시지 자체만으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다. 말을 할 때도 그 사람의 감정이나 진짜로 전하고 싶은 내용은 손짓이나 표정, 몸짓을 통해 감지된다. 몸과 가장 떨어져 있는 디지털이 진화를 하면 할수록 몸에 가까워지려고 한다.

디지로그는 단순히 디지털의 장점과 아날로그의 장점을 합치자는 애매한 절충주의나 적당주의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후기정보사회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 만큼 환경이 성숙해져 있습니다. 디지로그식 결혼이 가능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문명은 하나의 길만을 선택해 걸어야 했다. 그렇지만 디지로그 문명은 유연하다. 퓨전과 하이브리드의 세상이다. “디지로그의 세상은 재미있고 신나는 세상입니다. 틀에 박혀 있는 제도와 문화에서 벗어나 서로의 세계를 끌어주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디지로그는 우리가 가야 할 세상입니다.”

디지로그적인 한국 문화

“정의(definition)하고 분류(classification)하는 것이 바로 디지털의 속성이죠. 디지털은 숫자가 아닌 것까지 숫자화하려고 합니다. 거기에 비해, 아날로그는 정의할 수 없는 아련한 것입니다. 사랑과 인생처럼요. 수량화할 수 없는 것이죠. 감성적인 것, 동양에서 기(氣)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중간에 있는 것이 바로 언어입니다. 언어는 아날로그보다는 디지털적이고, 디지털보다는 그라데이션(gradation)이 풍부하죠.”

이어령 선생이 생각할 때, 세계에서 가장 그라데이션이 풍부한 언어가 한국어다. “우리 언어는 수학적이면서도 아날로그적이죠. 신체의 부분을 가리키는 머리, 다리, 허리. 모두 다 ‘리’자로 끝납니다. 머리카락, 손가락, 발가락. 모두 ‘가락’으로 끝납니다. 얼마나 논리적이에요? 그러면서도 참 애매한 말들도 많습니다. 시원섭섭하다, 뜨뜻미지근하다. 외국인들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언어뿐만 아니라, 음식이나 행위들도 디지로그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디지로그는 가장 적합성이 큰 문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책에서 그러한 디지로그를 실제로 체험해 볼 수 있다. “내가 책에 구구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책 표지에 있는 컬러 집(color zip)을 통해 직접 디지로그를 체험해 보세요.” 그러면서 컬러 집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자료 중에서는 책에 수록되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다고 귀띔해줬다. 이어령 선생이 생각할 때 책은 무엇일까? “책은 문화 유전자(밈meme)의 전염체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치와 목표를 공유하게 하지요.”

디지로그는 예측이자 지향점이자 화두

이어령 선생이 볼 때 지금은 디지로그의 시대가 아니다. “어쩌면 디지로그 시대는 영영 안 올지도 모르죠. 와도 미미할지도 모르고요. 차세대 자동차인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현재 약 10%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이브리드 카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바로 현재 자동차 문화의 맹점을 찌르고, 고유가 시대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며, 자동차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려준다는 것에 있습니다. 결론이자 지향이자 당위적인 것입니다. 디지로그가 그렇습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갈등을 겪고 있는 현 문명의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창조적인 발달과 창조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솔루션이 바로 디지로그입니다.”

디지로그를 정치에 적용해 보자. “정치는 그동안 양분법적인 세계로 여겨져 왔습니다. ‘all or nothing’의 세계죠. 그런데 시카고 대학이 연구한 것을 보면 그러한 것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정당이나 이념으로 정책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거죠. 좌우가 없는 정치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세계는 이미 양분법적인 디지털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체제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디지털 디아스포라, 우리는 디지털로 분단되어 있다

학문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어령 교수는 할 말이 많았다. “신라 시대의 고분을 들추는 것만이 학문이 아닙니다. 인터넷이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것도 학문입니다. 휴대전화가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휴대전화든 컴퓨터든 인터넷이든 지금 있으니까 그저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새로운 사회가 오고 있음을 누구든 이야기해야 하고, 그것을 준비하도록 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는 머리와 몸이 따로 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식입니다. 머리는 디지털의 세계인 인터넷에 살고 있는데, 몸은 현실인 아날로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없는 디지털 세계와 현실의 세계, 이 두 세계가 지금 부딪치려고 한다. “이 두 세계가 앞으로 불행하게 만나는가, 행복하게 만나는가가 현재와 미래에 가장 큰 화두가 되어 있습니다.” ‘디지로그’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앞으로 문명이 지향해야 할 바였다.

문명이 지향할 바라고 해서 ‘디지로그’가 추상적이거나 일반인들이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디지로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행복’이다. 매일같이 부딪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디지털과 아날로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했던 것이 기존 우리 문화의 패러다임이었다면 디지로그는 그 둘을 결혼시켜 ‘조화’를 이끌어내 한 단계 위로 도약한다. 그 결과 인간은 더욱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엄마는 아이에게 모기가 들어오니 문을 닫으라고 하고 아빠는 더우니 문을 열라고 합니다. 지금의 세상에는 ‘닫는다’나 ‘연다’ 중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밖에 만족할 수 없는 방법이죠. 그러나 디지로그의 세상에서는 ‘방충망을 단다’라는 답이 도출됩니다. 제3의 솔루션, 창조가 이루어지는 거죠. 지금 우리 문명은 이미 나와 있는 선택지에서는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는 남북으로만 분단된 것이 아니다. 디지털 세계에 의해서도 분단되어 있다. 이어령 선생은 책에서 ‘디지털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썼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개인 역시 디지털에 의해 분열되어 있다. 게임의 현실과 실제의 현실을 구별 못 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일본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문제가 심각합니다. 몇 년 동안이나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 사회와 단절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은 인터넷 문화가 그렇게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사이버 세계가 아직까지 잘 소통하고 있습니다. 오프 모임이 우리만큼 활발한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아직까지 나는 현장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다

“칠십 평생 현역으로 현장에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노인 취급을 해서 좀 놀랐어요.” 책을 낸 후, 인터넷에 오른 책에 대한 서평이나 그 댓글들을 꼼꼼하게 읽어 보았노라고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어령 선생을 만난 사람은 적어도 세 번 이상 놀란다. 박식함에 놀라고, 열정에 놀라고, 열정대로 움직이는 체력에 놀란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이어령 선생은 ‘현역’으로 뛰고 있다. “나는 채집 시대부터 후기 정보 사회까지를 모두 체험한 사람입니다. 학자로서는 참 복이고 운이 좋다고 봐요.” 워낙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을 좋아해 컴퓨터든 인터넷이든 통신이든 신나게 즐기고 있는 분이다.

“나는 원래가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에요. 뭐든 새로운 것이 있으면 도전을 해봐야 마음이 풀립니다. 프로그램만 해도 새 버전이 나온 그날로 사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요.” 82년 일본에서 처음 8비트 컴퓨터를 사용해 도스 명령어부터 공부한 선생은 누구보다 그 세계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정보시대의 시작과 발전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통신만 해도 초기 하이텔과 천리안부터 시작했으니까요.”

그뿐이 아니다. 단순하게는 컴퓨터 제품의 모니터링에서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의 제작, KDD 프로젝트의 진행 등 통신과 컴퓨터 분야에서는 단순히 수혜자가 아니라 창조하는 쪽에서 지금껏 활동하고 있다. “나는 지금껏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어요. 특히 컴퓨터 프로그램과 통신 쪽은 깊이 파고들어 공부를 했죠. 세계에서 사용되는 소프트웨어에 대해서 나보다 더 아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래픽 프로그램만 해도 버전별로 수십 종을 사용합니다. 새 버전을 사용하면 버그가 많죠. 그렇지만 그런 버그를 잡아서 더 나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재미입니다.” ‘얼리어답터’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에 이미 얼리어답터로 살아온 셈이다.

젊은이들을 위한 덕담, 몸으로 느끼며 살아라

“요즘 젊은이들은 클릭 하나로 모든 것이 바뀌는 세상에 살고 있어요. 인터넷 세계에서는 클릭 한 번으로 전혀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죠. 그렇지만 물질계는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 엄청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면서 님이 남이 되는 과정을 예로 들었다. “‘님’ 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됩니다. 글자, 즉 미디어의 세계에서는 님이 남이 되는 것이 너무 쉽잖아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떤가요? 님이 남이 되는 과정은 너무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죠.”

한 아이가 길을 걷다가 강도로 만났다. 위협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강도에게 아이는 팔을 뻗쳐 리모컨을 누르는 시늉을 했다. 이어령 선생은 미국 드라마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인터넷에 빠져 사는 젊은 사람들이 떠올랐다고 했다. 삶은 공간과 시간에 의해 제약이 된다. 옛사람들은 그러한 제약을 ‘사는 게 쉽지 않다’ 혹은 ‘인생은 고(苦)’라는 표현하곤 했다.

“인생은 온라인 게임도 아니고, 클릭 한 번으로도 바뀌지 않습니다. 디지털 세계일수록 아날로그적인 체험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물질계를 벗어나서 살 수 없으니까요. 스티브 잡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은 인생에서 많은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했지만, 암을 선고받은 순간 인간은 생명을 잃지 않았다면 잃어버리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고요. 저도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만 이 말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이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 디지털 세계에서만 살지 말고 비(非)디지털에 대해서도, 몸을 직접 움직이는 현실 세계에 대해서도 숙고하고 실제로 체험해 줄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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