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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숙성의 홍세화표 와인 ‘똘레랑스’ 즐기는 법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산 와인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문외한인 제게도 ‘보졸레 누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들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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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산 와인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문외한인 제게도 ‘보졸레 누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들리겠습니까. 혹자는 이를 두고 우리 사회의 선진화를 얘기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부유층의 전유물이던 와인이 대중화 되고 있다니 그닥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프랑스산 와인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는데 반해 같은 프랑스산이면서도 아직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11년 숙성의 홍세화표 와인(?), 똘레랑스’가 그것입니다. 홍세화표 와인 ‘똘레랑스’는, 숙성 기간이 11년이나 된 데다 비싼 가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중과 지식인들로부터 동시에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대체 뭡니까?

지난 연말부터, 거세게 휘몰아쳤던 황우석 광풍과 정치권의 이전투구를 목도하면서 저는 뜬금없이 ‘홍세화표 와인, 똘레랑스’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땅에 파종된 지 어느덧 11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새삼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종래 갈증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물 대신 와인을 마신다지요. 그들에게 똘레랑스는 숱한 역사적 질곡 속에서 피어난 인동초와 같은 의미라지요. 돌이켜보면,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운 현대사의 한 대목만 떠올려 봐도 우리 역시 프랑스 못지않은 역사적 질곡을 경험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아직도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줄 ‘와인’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까?

홍세화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비)를 통해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를 전파한 게 어느덧 11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설파했던 ‘똘레랑스’는 그닥 어렵거나 복잡한 논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실천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차분하게 그 의미를 음미해보라고 권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종래 그 속삭임이 작은 물결이 되어 우리사회의 무식성과 배타성에 경종을 울리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respectez, et faies respecter).”

이 말은 프랑스의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잔디를 밟지 말라’는 뜻의 푯말이라고 합니다. 홍세화가 설명하는 똘레랑스가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존중함으로써 비로소 존중받는 것’ 말입니다.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보면 그 의미가 더욱 쉽게 이해됩니다.

“당신이 존중받기를 원하면 우선 남을 존중하며, 당신의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이 존중받기를 원하면 우선 다른 사람의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며, 당신과 다른 인종과 국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며, 그리고 당신과 다른 생활방식과 문화를 존중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당신 것’이 존중받으려면 ‘남의 것’부터 존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모두 똑같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평등 개념이 창안되어야 했던 것이며, 인간이 모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인권 개념이 창안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홍세화의 잔잔한 외침이 우리의 막힌 귀를 뚫어주고, 감긴 눈을 뜨게 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억압된 체제 속에 박제되어버린 양심을 일깨우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책세상)의 저자 하승우는 홍세화표 똘레랑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상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토론의 규칙을 지키자’는 홍세화식 똘레랑스는 의도의 순수성만은 인정할 수 있지만 실천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명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순진한 똘레랑스’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이어 그는 허버트 마르쿠제의 입을 빌어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홍세화식 ‘똘레랑스’(순진한 똘레랑스)가 아닌 ‘차별하는 똘레랑스’라고 주장합니다. 즉,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선전할 수단을 갖지 못한 채 기성 사회의 규칙을 따르는 것은 패배가 예정된 게임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인 것이지?.

이쯤 되면 오히려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똘레랑스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서 말입니다.

『지식의 발견』(그린비)의 저자 고명섭은 “똘레랑스를 ‘관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전제한 뒤 “똘레랑스는 라틴어 ‘tolerare’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참다’ ‘견디다’를 뜻하는 것으로 ‘관용’이라는 다소 권위적인 뉘앙스가 깃든 말보다는 ‘견딤’이나 ‘용인’으로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덧붙여,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를 통해 하승우의 설명을 들으면 그 의미가 비로소 가깝게 다가옵니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앵똘레랑스(intolerance)’와 짝을 이루고 있다. 똘레랑스는 극단을 부정하는 앵똘레랑스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인종주의나 종교적 광신을 거부한다. 그래서 똘레랑스는 차이를 ‘긍정하는’ 논리일 뿐 아니라 극단을 ‘부정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똘레랑스를 비판하는 것은 극단주의나 이기주의로 오해받기 쉽다.”

하승우는 똘레랑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질타합니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성적으로 논쟁할 것을 요구하는 똘레랑스가 논쟁을 얼버무리거나 대립하는 가치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변했다. 나를 다스리는 기준이어야 할 똘레랑스가 남을 비방하는 기준으로 변질되었다.”

한편 똘레랑스라는 개념이 형성되기까지의 역사적·철학사적 과정을 짚어보면 철학자 김용석의 ‘사랑은 생물학적 차원의 문제이며, 이해는 철학적 차원, 용서(어떤 의미에선 똘레랑스로 해석될 수도 있는)는 종교적 차원의 문제’(『두 글자의 철학』중에서)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똘레랑스는 지긋지긋했던 종교전쟁의 산물이며, 숱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의미를 확장해 온 살아있는 역사교과서이자 교훈이기도 합니다. 명예혁명을 경험했던 존 로크, 억울한 죽음을 변호(칼라스의 억울한 죽음)했던 볼테르(공공의 질서와 안전을 해치지 않는 한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산업 혁명기를 살았던 존 스튜어트 밀(여론의 억압을 비판하고 소수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언론, 사상, 표현의 자유를 주장), 혼란스러운 1960년대(68혁명)를 살았던 카를 포퍼(비판의 자유, 사상의 자유,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는 사회제도를 건설하는 것)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서 똘레랑스의 의미를 창조한 사람들입니다.

마르크스 역시 ‘고타강령 비판’에서 “양심의 자유가 종교 영역을 넘어서 사회영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종교라는 도깨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똘레랑스를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똘레랑스를 실천적 과제로 부각시킨 사람은 그람시였습니다. 시민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진지전’(반대 ‘기동전’)을 주장했던 그람시는 “진지전에서 주도권을 잡는 길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의 상식에서 출발해 그 상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설파했으며 또한 “진보적인 사람은 논쟁 상대의 견해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며, 상대의 입장과 논리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의 광신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봤습니다.

서양 철학사를 수놓은 숱한 사상가들의 ‘똘레랑스’론(論)을 되짚던 하승우는 다시 홍세화에게로 넘어와 그의 ‘순진한 똘레랑스’의 가치와 한계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합니다. 일정부분 홍세화의 차분한 주장에 수긍하면서, 요는 거기서 멈추지 말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가 주목하는 것은 ‘자치’의 기치 하에 뭉친 다양한 시민사회의 대안공간들입니다. 얼핏 아나키즘을 연상케 하는 자치공간의 전범은 우연찮게도 프랑스에서 발견됩니다. 프랑스의 살아있는 성인 피에르 신부의 ‘에마우스Emmaus운동’이 그 예인 것이지요.

“자치는 대중으로 하여금 외부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권력과 맞서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보운동은 대중을 지도하고 그들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운동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대중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극빈자를 위한 ‘에마우스Emmaus’운동을 창시한 피에르 신부는 절망에 빠진 한 살인자와의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피에르 신부는 그에게 ‘세상이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확신시켰고, 그 살인자는 신부에게 ‘남에게 뭔가를 주는 것’만이 아니라 ‘뭔가를 해줄 것을 요구하는’ 법을 가르쳤다. 만나서 대화하고 서로의 필요성을 인정함으로써 희망을 만들어낸 것이다.”(시어도어 젤딘 『인간의 내밀한 역사』에서 재인용)

프랑스 사람이면 누구나 즐긴다는 와인, 그 와인의 달콤쌉싸름한 맛을 뒤로 물리고 대신 손에 망치와 삽을 든 빈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빈집과 공터를 찾아다니는 피에르 신부의 표정은 종래 해맑은 웃음입니다. 그 ‘웃음’이야 말로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를 쓴 하승우가 천착하는 실천적 똘레랑스의 의미이기도 하고요.

“진보는 불편하고 귀찮은 것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와 맞서는 부담을 감수해야 하고 듣기 싫은 목소리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대중은 그런 진보적인 삶이 불편하고 귀찮아 피하려 하고, 지식인은 그것이 옳다며 강요하려 하니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그 틈을 단단히 밀착시키는 힘은 웃음이다.”

올해에는 제발 헛된 희망에 넋을 놓지 말고 소박하나마 현재의 삶 속에서 웃음을 만들며 서로의 어깨를 겯고 틀며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게 바로 11년 숙성의 홍세화표 와인을 즐기는 법이려니 싶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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