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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그림과 이야기 속에 깃든 삶의 지혜, 팻 허친스

팻 허친스를 수식하기 위해서는 ‘색’을 먼저 들이밀 수밖에 없다. 최초의 그림책 『로지의 산책』이나, 『잘 자요, 올빼미(Good Night, Owl)』에서 보여준 다양한 채도의 그린과 화사한 노란색이 그녀의 그림책을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연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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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를 텔레비전에서 본 적 있나요?, 팻 허친스

바람 부는 날의 풍경

책장을 넘기면 바람이 불고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강하게 불고 있는 바람이 ‘휙’ 하고 지나간다. 나뭇잎도 꺾인 가지에 실려 사정없이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숲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인 포리스트 그린(forest green) 컬러의 물감이 채도를 달리하며 바람 속에서 말라가고 있다. 올리브 그린의 초원 위로 아직 아무도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본문을 펼치면 독자는 첫 번째 주인공을 맞이하게 된다.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버버리 코트의 깃까지 세워 올리고 바람을 피해보는 우산을 든 중년의 남자. 그는 오른쪽 마을로 향해 길을 걷고 있다. 아니, 뒤에서 그의 커다란 몸을 미는 바람에 앞으로 밀려 움직이고 있다. 아마 작가가 바람의 근원지 쪽(왼쪽) 가까이에 위치한 듯, 오른쪽에서 돌다리를 건너고 있는 소녀의 몸짓은 상대적으로 조그맣다.

한 장을 넘기면 우리는 그 중년 남자의 이름이 화이트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화이트 씨의 우산이 바람에 의해 뒤집혀지고 하늘로 ‘붕’ 솟아오른다. 소녀도 손에 쥐고 있던 파란 풍선을 놓쳐버린다. 폭 넓은 치마처럼 뒤집혀진 우산은 마치 삐쩍 마른 숙녀의 몸처럼 가볍게 하늘을 날아다닌다. 소녀의 손을 떠난 파란 풍성은 앙상한 우산을 따라 바람에 몸을 맡긴다. 붉은 벽돌의 고요한 동네는 죄다 오른쪽을 향해 꺾여진 나뭇가지, 풀잎들과 대조되어 더 없이 고요해 보인다.


화이트 씨와 소녀는 교회당을 지났다. 때 마침 있던 결혼식이 끝나고 교회당을 나온 신부의 면사포와 긴 드레스도 나무들처럼 오른쪽으로 휘날린다. 그때 신랑의 중절모가 바람의 장난질로 하늘로 떠오른다. 화이트 씨, 소녀, 신랑이 하늘로 떠오른 자신들의 물건에 손을 길게 뻗은 채 언덕을 내려온다. 풍성한 바람에 이불을 빨랫줄에 걸고 있던 동네 아낙이 이들이 지나가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렇지만 이 바람은 예사 바람이 아니다. 무척이나 심술궂은 바람이다. 아직도 마르지 않았을, 그래서 비누 냄새가 싱그러울 아낙의 빨래도 하늘로 날아올라 하늘을 비행한다.

모두 한 줄로 길게 늘어서 도심으로 지나간다. 숲 속을 지나고, 고요한 마을도 지나고, 이제는 커다란 건물이 즐비한 런던의 중심가에 들어선다. 그래도 바람을 쫓아가는 행렬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다. 이들의 우스꽝스러운 이중 행렬- 하늘에 한 줄, 땅 위에 또 한 줄-을 지켜보던 가발을 쓴 법관이 방심한 사이, 그의 가발도 하늘 행렬에 동참하고야 만다. 뒤를 바람에 밀리며 그들은 계속 오른쪽으로 행진한다. 한 쪽 구석(왼쪽)에서 이 사태를 지켜보던 우체부가 있다. 이쯤 되면 바보 아닌 독자는 우체부의 손에 있던 편지들도 하늘로 솟구쳐 오를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손에 있던 색색의 편지봉투가 하늘로 가볍게 솟아오른다. 버킹컴 궁을 지키고 있던 빨간 유니폼의 위병은 이 재미난 광경을 향해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꼿꼿하게 서 있다. ‘이번엔 그의 모자가 벗겨져 바람에 실리려나?’


지금까지의 사건의 흐름에 익숙한 독자는 이렇게 자문해보겠지만, 뜻밖에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대신, 깃대에 꽂혀있던 기가 펄럭이며 바람을 타고 춤을 춘다. 그리고 이 사태를 지켜보던 꼬마 남자 아이 둘의 새 머플러가 바람의 방향대로 오른쪽으로 출렁인다. 오 이런, 아무리 단단하게 목에 둘렀어도 바람은 한없이 짓궂기만 하다. 그들의 머플러도 여지없이 바람 속 대열에 합류하여 긴 꼬리를 너울거린다. ‘강풍, 돌풍’이라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적은 가판대 앞의 신문 장수가 넋을 놓고 이중의 행렬을 쳐다보다, 그만 신문 전부를 바람에게 빼앗긴다. 이제 하늘 위는 아수라장이 된다.

도심에서 녹색의 푸른 대지로 빠껁나온 행렬은 올리브 그린의 잔디를 밟고 오른쪽으로 향하는 긴긴 행진을 멈추지 못한다. 그때였다. 모든 배경이 사라지고 마지막 바로 전 페이지에서, 그네들의 소지품을 가지고 놀던 바람이 싫증을 부렸다. ‘팽’ 내팽개쳐진 물건들을 뒤집어 쓴 행렬들.... 그리고 바람은 불지 않는 것처럼 숨을 죽였다. 하얀 배경이 더는 이곳에서 바람이 트집을 잡지 않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정말? 마지막 페이지를 보자. 바다가 펼쳐져있다. 해풍이 일고 작은 배는 돌풍에 파도 위에서 출렁인다. 돛대에 매단 하얀 천이 바람을 잔뜩 품고 오른쪽으로 불룩하다. 바람이 갑자기 이들을 향해 힘차게 재채기를 한 것이다. 자신들의 소지품을 제대로 챙긴 일행은 바다 위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을 향해, 잘 가라며 손을 흔든다.


이 그림책은 1974년에 팻 허친스가 글과 그림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 그림책을 통해 케이트ㅡ그린어웨이 상을 수상했다. 이 책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간단한 이야기가 하나씩 더해지는 패턴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보가 아닌 이상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정말 끝까지 그런가? 그건 결코 아니다. 반복된 패턴이 주는 지루함은 마지막의 반전으로 인해 해소된다. “당연히 그럴거야”라며 스토리의 흐름을 예측하는 독자는, 마지막의 반전에서 ‘하하’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자신들의 예측이 어긋나는 것을 경험한 독자는 작가의 재능에 감탄하게 된다. 아주 사소한 즐거움이지만, 어린 독자들에게는 짜릿한 책읽기의 즐거움이 되어준다. 팻 허친스의 글들은 대체로 이런 일관된 패턴을 유지한다. 그녀의 첫 번째 그림책 『로지의 산책』을 이미 본 독자들이라면, 어딘지 그림의 유형과 이야기의 전개도 그것과 별로 다름이 없음을 발견해내는 것으로, 마지막 쪽에서 또 다시 속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위로받게 된다.


풋풋한 그린과 쾌활한 노랑의 작가 팻 허친스

팻 허친스를 수식하기 위해서는 ‘색’을 먼저 들이밀 수밖에 없다. 최초의 그림책 『로지의 산책』이나, 『잘 자요, 올빼미(Good Night, Owl)』에서 보여준 다양한 채도의 그린과 화사한 노란색이 그녀의 그림책을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런 경향을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영국의 작은 동네의 대자연 탓으로 돌린다.

그녀는 1942년 영국 요크셔 지방의 노스 라이딩에서 패트리샤란 이름을 갖고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곳은 군사 훈련의 캠프가 있던 곳으로, 여섯 남매를 키워야 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그곳을 아이들을 양육하는 곳으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격 훈련이 있던 날, 사격 지역 안에서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보고 기겁한 패트리샤의 엄마는 육남매를 데리고 하루 빨리 흉측한 동네를 떠나고자 했고,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서 5마일 떨어진 숲 속 마을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새로 이사한 곳은 까마귀, 비둘기, 흰 쥐, 고슴도치 등이 살고 있는 수풀이 있던 고요한 시골 마을이었다.

온갖 종류의 동물들과 공생하게 된 어린 나이의 패트리샤는 가끔 숲 속 동물을 집으로 안고 들어오기도 했고, 숲 속의 푸르름을 계절별로 자신의 스케치북에 옮겨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의 집안은 그렇게 경제적 형편이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그녀가 마음껏 숲을 옮겨 담을 수 있는 녹색의 크레용과 물감을 사 줄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림을 잘 그리는 패트리샤를 무척 아꼈던 이웃 집 브루스 씨 부부는 그런 패트리샤의 속사정을 알고, 패트리샤(팻은 애칭이자 작가 스스로 필명으로 쓴 이름)가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후원을 해주게 된다. 그녀가 그림을 그려오면 그녀에게 초코렛을 하나씩 주곤 하는 식으로. 물론 패트리샤의 엄마도 그림을 잘 그리는 자신의 딸을 귀여워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여섯 남매의 뒷바라지로 현실적 도움을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패트리샤는 스케치북과 데생 연필을 사준 브루스 씨 부부의 차를 타고 스케치를 할 수 있는 멋진 풍경이 있는 장소로 여러 차례 나갔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마음씨 따뜻한 이웃과 함께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훗날 패트리샤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그분들에게 그림을 잘 그려 보여주고 싶었던 어린 마음과, 언젠가는 책을 쓰고 그릴 수 있다는 것을 꼭 보여드리고자 했던 마음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실제로 그림책 작가로 성공한 그녀는 『Changes, Changes』를 통해 그들의 은혜에 보답했다.

1962년 리즈 대학(Leeds College of Art)을 졸업한 패트리샤는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런던으로 갔지만, 처음 여섯 달 동안은 시간제 점원으로 가게를 지켜야했다. 그러다 J. Walter Thompson이라는 이름의 광고 회사에서 일하면서 로렌스 허친스와 만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1965년 그와 결혼한 패트리샤는 남편의 뉴욕 사무실 발령에 따라, 삼 년 동안 뉴욕에서 거주한다.

그녀의 그림책은 사실 어린 꼬마들에게 추천하기에 적합하다. 그녀는 요란한 듯하면서도 비슷한 계열의 주조색(물론 녹색과 노랑이 압도적이다)을 기초로, 일정한 패턴을 시각적으로 반복하는 그림과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듣다보면 어느새 자동적으로 암기까지 가능한 심플한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작가로 널리 알려졌다. 그녀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티치』, 『바람이 불었어』, 『자꾸자꾸 초인종이 울리네』에서처럼 아린 아이인 경우도 있지만, 초기작에서는 주로 그녀가 어린 시절 인근 숲 속에서 직접 보고 안고 데리고 놀았던 동물들이다. 예컨대 『로지의 산책』에서는 암탉 로지와 여우, 『잘 자요, 올빼미』에서는 올빼미 씨, 『점점 작게, 점점 크게』에서는 토끼, 사슴, 다람쥐 등의 숲 속 동물들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등장인물을 표현할 때 요란하게 세부적 묘사까지 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큰 특징을 잡아 굵은 윤곽선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어린 아이들의 눈에 더욱 분명하게 각인될 수 있는 개성적인 주인공으로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그 어느 것보다도 잘 그려낼 수 있는 나무와 꽃은 섬세하게 그리면서 배경은 여유 있게 비워둠으로서 여백의 미를 살려낸다. 그럼으로써 단순함과 복잡함이 대조되어 등장인물이 돋보이게 된다.

유머를 잊지 않고 적절한 상황에서 풀어내는 그녀는 반복된 패턴에 익숙해진 독자의 상상을 뛰어넘는 대반전으로 명쾌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데 대가이다. 이런 단순함은 물론 의도된 것이다. 그녀는 아이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인기리에 텔레비전에서도 방영되고 있는 『티치』의 경우, 그녀의 둘째 아들 샘(Sam)이 모델이 되고 있다. 그녀는 아들 모건과 샘,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의 일상생활과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림책을 만든다. 이처럼 아이들과 부대끼는 생활 속에서 얻은 대사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 그림책 속에서 풀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의 그림책 속 인물들은 어린이의 심리를 생동감 있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1968년 『로지의 산책』에서 시작된 그녀의 그림책 만들기 작업은 이후 40여권의 책을 펼쳐내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녀의 그림책은 나이 어린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 자주 언급되어 지는데, 미국이나 영국의 유치원과 초등 1학년 과정에서 영어과 과정에 채택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로지의 산책』과 『잘 자요, 올빼미』는 미도서관 협회의 ‘주목할 책’으로 선정되어 많은 아이들의 사랑을 오랫동안 받고 있는 책들이다.


막내 티치

티치는 작은 아이이다. 형 피트보다는 매우 작고 누나 메리보다는 조금 작다. 하지만 단순히 몸집만 작은 것은 아니다. 형 피트와 누나 메리가 큰 자전거를 타고 힘차게 언덕길도 오를 때, 티치는 작은 세발자전거로 간신히 그 뒤를 따라간다. 키가 큰 피트가 나무 꼭대기까지 연을 날리고, 메리가 그보다 낮은 지붕까지 연을 날릴 때, 티치는 고작 바람개비를 손으로 돌린다. 피트가 자신의 몸집만한 큰 북을 치고, 메리가 멋들어지게 트럼펫을 불 때, 이제야 티치는 자그마한 피리를 불 ? 있다. 피트와 메리는 톱과 망치로 목공 일을 할 수 있을 때, 티치는 낄 수도 없다. 겨우 못이나 나르는 일로 참여하는 수밖에는. 마당일도 마찬가지다. 피트가 큰 삽으로 흙을 파내고 메리가 큼직한 화분을 나를 때, 티치는 씨앗을 가져올 뿐. 하지만 작다고 아직 어리다고 막내라고 형 피트와 누나 메리로부터 무시만 당하던 티치에게, 콩알처럼 작기만 하던 씨앗이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시간이 흘러, 흘러 어느새 누나 메리보다 형 피트보다 훌쩍 자란 나무처럼, 작은 티치도 언젠가는 쑥쑥 자라게 될 것이라는 자연의 진리를!

이 책은 작가의 아이 샘과 모건이 모델이 되어 만들어진 이야기로, 인기에 힘입어 영국과 미국에서는 TV 방송으로도 제작이 되었다. 막내이고 아직 세상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티치에게 자신보다 앞서 세상을 배우게 된 누나 메리와 형 피트는 무엇이나 한 수 위인 존재이다. 막내들이 흔히 갖게 되는 ‘막내 콤플렉스’를 티치 역시 갖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티치는 몸만 작은 존재가 아니라, 누나와 형이 갖고 있는 사소한 능력까지 질투하는 것으로 작은 마음의 상태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막내가 생각하기에 어른처럼 느껴지는 손위의 형제자매에게도 막내란 존재가 달갑지만은 않다. 나만 해도 그랬다. 막내 동생과 무려 8살 차이인 나는 엄마를 대신해서 가끔 동생을 업어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주어야 했으니, 내게 막내는 애기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막내 동생이 어느새 내 키를 넘겨 자라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되면서 나보다 더 큰 마음을 갖고 넓은 세상을 헤치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 잠시 동안의 도토리 키 재기가 이제 와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린 시절의 형제자매 간에는 제법 심각한 문제이다. 꼭 부정적 영향만 있는 것처럼 매도할 일도 아니다. 손위 형제들은 막내를 귀찮아하면서도 배려하는 것을 배워나가고, 손아래 형제들은 언니들을 모방하고 동일시하면서 세상을 익혀가는 것이니까.... 오히려 티치처럼 막내 콤플렉스도 느낄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요즈음의 외톨이 아이들이 더 가련하고 동정을 받아야 할 존재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네 삶이 각박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우리 때는 바글바글 우글우글 형제들 간의 작고도 사소한 싸움이 그칠 새가 없었다. 싸움 속에서 꾀부리는 것도 배우고, 양보하는 것도 배우고, 화해하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의 외동아들, 딸들은 그런 기회를 가정 내에서 갖기는 불가능하다. 설상가상으로 친척들과의 왕래도 형식적으로 변해버린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티치가 갖고 있는 막내의 콤플렉스를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인 경우도 그다지 많지 않을 듯싶다.



이 그림책에 배경 그림은 전혀 없다. 오로지 형광 색 옷을 입은 아이들 셋만이 존재한다. 아래로 쳐진 입술을 한 가장 작은 티치, 그의 옷은 우울함을 상징하는 파랑색이다. 약간은 도도한 듯 벌렁코에 주근깨가 가득한 그의 누나 메리, 그녀는 환한 노란 옷을 입고 있다. 티치의 질투의 대상임을 상징하는 색인 듯 하다. 그리고 가장 크고 나이도 많은 형 피트는 권위를 제법 갖추고 있는 듯, 턱 밑에 손가락을 괴고 티치와 메리를 지그시 쳐다본다. 그는 연둣빛 옷을 입고 있다. 팻 허친슨이 그토록 좋아한 포리스트 그린으로 피트를 그리지 않은 이유는, 피트 역시 아직은 어른이 되려면 한참 먼 어린 존재이기 때문인 듯싶기도 하다.

형광 빛이 감도는 극히 단순한 색은 간단한 선 처리 속에 커다란 면으로 인물들의 행동을 강렬하게 부각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내면 심리 역시 쉽게 눈에 띤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이 그림책을 통해 전하고자 한 작가의 메시지는 ‘막내의 콤플렉스’의 자연스러움과 그것을 벗어나게 되는 과정의 자연스러움,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형과 누나가 연을 날릴 때 나는 솔직히 티치는 어느 높이까지 연을 날릴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뜻밖에도 티치의 손에는 연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티치의 몫은 팔랑거리는 바람개비이다. 막내 동생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떠올라 배꼽을 쥐고 웃었다.


과자를 나누며 배우는 삶의 지혜

그림책을 통해 학습 효과를 기대하는 엄마들이 참 많다. 과학 그림책, 인물 그림책, 생태 그림책, 수학 그림책, 그림책을 수식하고 있는 단어의 공통점은 학과 공부와 밀접적인 관계가 있는 딱딱한 것이란 점이다. ‘그림책을 재미로 보고 즐기면 참 좋을텐데’ 라고 혼잣말을 자주 하곤 하는 나로서는 애석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우리는 아이들의 지식 교육에 어릴 때부터 치중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그림책도 보면서 그 나이에 어울리는 학습도 할 수 있다면 일석이조인 셈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아이들에 따라 지치게 되는 경우가 있을까 우려하는 것은 내 기우일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최근 미술관에서 이상한 현상을 자주 목격하고 쓴웃음을 짓게 된다.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엄마,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엄마가 정말 오고 싶었구나. 아이를 맡기고 올 수 없어 아이를 데려왔구나. 대단하다.’ 하지만 그녀 옆에 서서 자세히 들어보면 그 젊은 엄마는 혼잣말처럼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다. 설마 했었는데, 그 유모차에는 이제 돌도 지나 보이지 않는 어린애가 타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 젊은 엄마는 조기교육이랍시고 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인상파 화가에 대한 그림을 설명하고 있던 것이다. 이럴 때, 나는 내가 오히려 이상한 자유방임주의자인가 의심스러워진다. 내 학부 전공이 교육학인 것이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나의 투덜거림이 길었지만, 사실 나는 제대로 눈높이에 맞는 그림과 그에 걸맞은 단순화된 문장으로 어떤 학습적인 내용을 곁들일 수 있다면 구태여 눈에 불을 켜고 쌍지팡이를 짚고 싶지 않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학습에 노출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팻 허친스의 『자꾸자꾸 초인종이 울리네』는 아이들에게 분수의 개념이나 나누기의 개념을 자연스럽게 알려주고 있는 수학그림책으로 썩 훌륭하다.

이야기는 식탁에 앉아있는 빅토리아와 샘에게 엄마가 구운 과자 열두 개를 건네주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두 아이는 몇 개씩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리고 이웃집 친구들이 찾아온다. 두 명이 더해져 이제 네 명이 식탁에 앉아 있다. 엄마는 “할머니만큼 과자를 맛있게 만드는 사람은 없단다”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하던 부엌일을 계속한다. 책은 처음 빅토리아 샘이 과자 열두 개를 앞에 놓고 흐뭇해하는 장면에서 다음 페이지로 넘기면, 엄마가 부엌일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초인종이 울리고 두 명의 아이들이 늘어나 모두 네 명이 둘러앉은 식탁을 보여준다. 다음 장은 자신의 일을 계속 진행하는 엄마의 모습이다. 왜 이렇게 반복되는 장면을 배치했을까? 엄마가 부엌에서 일을 하는 모습이 갖는 장치의 기능은 무엇일까? 나는 아마도 팻 허친스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주기 위해 그다지 의미 없는 동일 장면을 건너뛰며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했다. 엄마가 말한 “할머니만큼 과자를 맛있게 만드는 사람은 없단다.”의 의미는 “이제 각자 몇 개씩이나 과자를 먹을까?”에 다름 아니다.

네 아이가 둘러 앉아 있던 식탁에 또 다른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여섯 명이 된다. 간단한 계산에 의하면 한 아이 당 2개의 과자를 먹을 수 있게 된 셈이다. 샘과 빅토리아는 자신의 몫이 현격하게 줄어들자 시무룩한데, 놀러 온 아이들은 여전히 싱글벙글 이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곧 이어 또 다시 초인종이 울리고, 6명의 아이들이 들이닥친다. 흑인 아이들이다. 그럼 답은 뻔하다. 이제 겨우 한 개의 몫만 챙길 수 있게 된 상황이다. 팻 허친스가 왜 흑인 아이들을 기용했는지 알만 하지 않은가? 이 세상은 흑과 백이 나란히 있는 피아노 건반과 같다. 백색 건반만으로 멋진 소리가 나지 않듯, 흑색 건반만으로도 훌륭한 소리를 만들기 어려운, 서로 나누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인 것이다. 6명의 백인 아이들의 몫을 다른 6명의 흑인 아이들과 공유하게 됨으로서 각자의 몫은 적어졌을지 몰라도, 모두 배운 점이 있다면, 나눔은 기쁨을 더해준다는 사실이다.

수학적 지식만을 반복된 패턴의 그림과 문장 속에서 전달하기에 급급했더라면, 팻 허친스의 이 책은 그저 그런 지식전달용 그림책으로 후한 ?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진실로 유용한 지식이란 ‘나눔의 기쁨’이란 지혜를 갖게 되는 때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유용한 지식’과 함께 발견한 ‘진정한 삶의 지혜’가 담겨있는 이 그림책은 누가 봐도 재미있다. 아이들의 변화된 표정만 살펴보는 것도 또 다른 그림책 읽기의 방법이 된다. 아이들과 함께 이왕이면 12개의 과자를 가지고, 열 두 개의 크레용을 이용해 과자 분배하는 게임을 통해 이 책에서 전하는 수학적 지식을 복습해 보는 것도 책의 내용을 현실에 끌어내는 방편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방법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아이의 아이디어가 될 수 있도록 어른은 그저 옆에서 유도만 해주면 되지 않을까?

아이가 삶을 살아가는데 진정 필요한 지혜는 자신이 세상을 헤쳐 갈 때 필요한 도구를 스스로 찾고자 하는 욕구와 그 도구가 무엇일지를 추리하는 능력일 듯싶다. 수학적 능력이 몇몇의 이론과 그것들의 적용에 능통해진다고 고등해지지 않는 것처럼, 그네들 스스로가 원리를 발견하도록 지켜봐주는 것이 우리 어른들에게 필요한 인내력인 것 같다. 팻 허친스의 그림이 단순하다고 해서, 그녀의 철학이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오인 것이 바로 이런 점이다.

모처럼 팻 허친스의 그림책을 보았다. 『로지의 산책』에서 보여준 배고픈 여우가 그래도 암탉의 신세보다 더 낫게 생각되었다. 하루 종일 아무런 소득도 없이 암탉을 잡아먹을 속셈으로 암탉의 뒤를 쫓았으나 닭장으로 들어가 버린 암탉을 놓치고 하루를 허탕한 여우를 구속할 것은 없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그녀의 그림책 속 여우는 자유로운 존재다.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도 지식이란 이름으로, 교육이란 미명으로 구속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무한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다. 시행착오를 위해 존재하는 시간들을 그들이 운영할 수 있도록 그들의 몫으로 내버려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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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전국의 건축물을 답사해온 김예슬 저자가 서울의 집, 학교, 병원, 박물관을 걸으며 도시가 겪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살펴본다. 이 책은 도시의 풍경이 스마트폰 화면보다 훨씬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당신의 시선을 세상으로 향하게 해줄 것이다.

2024 비룡소 문학상 대상

비룡소 문학상이 4년 만의 대상 수상작과 함께 돌아왔다. 새 학교에 새 반, 새 친구들까지!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처음’을 맞이하고 있는 1학년 어린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시선이 눈부신 작품. 다가오는 봄, 여전히 교실이 낯설고 어색한 친구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응원을 전한다.

마음까지 씻고 가는 개욕탕으로 오시개!

『마음버스』 『사자마트』 로 함께 사는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김유X소복이 작가의 신작 그림책. 사람들이 곤히 잠든 밤, 힘들고 지친 개들의 휴식처 개욕탕이 문을 엽니다! 속상한 일, 화난 일, 슬픈 일이 있을 때, 마음까지 깨끗히 씻어 내는 개욕탕으로 오세요!


문화지원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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