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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통해 Zen을 실천하는 작가, 유리 슐레비츠

폴란드에서 태어난 유대인이 프랑스와 이스라엘을 거쳐 미국에 정착하여 영어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기까지는, 아무리 운이 따른다고 해도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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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서 열리는 새벽

“가만히 귀 기울이고 어둠 속에서 새벽이 스며드는 소리를 듣다 보면, 재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에 맞춰 어스름이 걷혀 오면서 박명의 찬 기운이 슬그머니 어둠의 가장 아랫바닥에서 써늘하게 웅성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또다시 조용히 숨을 죽이고 번져 오르는 축축한 박명의 냄새에 깊은 호흡을 들이키면, 싸늘한 회색은 차츰 청색으로, 또 청색은 좀 더 따듯한 동녘의 온기를 품어 안고 분홍빛 잔영을 두른 하늘빛으로, 세상이라는 커다란 화선지에 몇 가지 정물을 제외한 바탕을 가득 채우며 번져갑니다.”

밤에 깨어 차가운 새벽의 검푸름이 아스라한 하늘색으로 바뀌는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즐기는 마녀는 유리 슐레비츠의 그림책 『새벽』 안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즉,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죠.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그곳은 바로 멀고 먼 북구의 나라 핀란드 숲 속의 이름 모를 호숫가일 때도 있고, 허난성 서부 무릉도원일 때도 있습니다.



유리 슐레비츠의 『새벽』에는 주인공이 없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등장하지만 그 둘은 그저 새벽의 산과 호수를 안내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림 속 풍경도 새벽의 고즈넉한 공기와 온기를 더해가는 바람을 그리기 위한 수단일 뿐, 작가는 보이는 모든 것을 표현하려는 욕심과 화려한 색채와 세련된 기교를 자제합니다. 마치 그가 좋아했던 중국의 청유안의 한시처럼 교교한 달빛이 사그라지고 붉은 태양빛이 호수의 푸름에 환희를 가져다줄 때까지를 고요히 조망하면서 욕심 없이 ‘무위자연’ 하듯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고요한 밤에서 아침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데, 어떤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모험 이야기와는 달리 특별한 사건 하나 없이 그저 조용히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정적인 플롯을 갖고 있습니다. 시어에 가깝다고 할 만큼 상징과 묘사에 충실한, 줄인 언어들 속에서 유리 슐레비츠의 눈에 포착된 새벽의 이미지들만이 병풍처럼 펼쳐집니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그림책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글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고 그림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무대나 공간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슐레비츠는 자신의 그림책 평론서인 『Writing with Pictures : How to write and illustrate children's books, (1997)』에서 “그림책에서 글은 그림을 반복하지 않으며, 그림도 글을 반복하지 않는다. 글과 그림은 대위적 관계로 서로 보완하고 완성한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진정한 그림책은 전적으로 그림에 의해서 이야기가 전개되며, 글이 사용되더라도 보조적인 역할만 한다고 믿고 그것을 자신의 그림책 창작에도 적용하였습니다. 바로 그 예가 『새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노력을 하는 그림책 작가

유리 슐레비츠는 1935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939년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그의 가족은 머나먼 피난길에 올라 유럽을 떠돌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13살, 프랑스에서 정착하게 된 그는 만화를 보며 그림에 대한 꿈을 키우면서 유랑의 서러움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둡고 조용한 서점에 주저앉아서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현실의 곤궁함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슐레비츠는 전쟁이 끝난 1949년에, 가족과 함께 이스라엘로 이주하였지만, 유대인의 고향땅인 이스라엘에서도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인해 정규 학교 수업을 받기 어려웠습니다. 생계를 위해 고무도장장이의 도제를 거쳐 페인트공, 목수 일을 전전하다가 가족이 어느 정도 안정된 자리를 잡아갈 무렵인 1952년부터 키부츠에 거주하면서 마침내 텔아비브의 야간 학교에서 디자인과 회화를 배울 수 있었고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교육대학에 해당하는 ‘티쳐스 인스티튜트’에 입학하여 문학, 생물학, 해부학 등을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여느 유대인 청년과 마찬가지로 그도 군에 입대했고, 전역 후 스물두 살의 나이로 더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뮤지엄 아트 스쿨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수업을 본격적으로 들으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보다 잘 표현할 방법을 모색하였는데, 어느 날 전화를 받으며 낙서처럼 끼적끼적 그려놓은 그림을 훗날 보고, 자신이 바라던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바탕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자신을 홍보하러 다니는 과정에서 알게 된 ‘하퍼 앤 로우’ 출판사의 편집자 수잔 허쉬만은 그에게 글과 그림을 모두 작업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온 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아 영어로 글을 쓰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그는 자기 자신에게 문학적 재능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지만, 수잔 허쉬만이 용기를 북돋아 주어 『The Moon in My Room』을 발표하게 되었으니 그때가 1963년입니다. 그 후 그는 자신에게 맞는 글과 그림을 계속 고민하고 세계 각지의 기법과 재료를 직접 활용해 보면서 자신만의 회화적, 문학적 스타일을 다듬어 가게 됩니다. 또한, 그는 동양적인 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태극권과 요가, 서예를 배우고 사색적이고 관념적인 동양 철학의 심오함에 점점 더 매혹을 느끼게 됩니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유대인이 프랑스와 이스라엘을 거쳐 미국에 정착하여 영어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기까지는, 아무리 운이 따른다고 해도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는 노력과 배우는 자세로 지금까지 서른 권이 넘는 그림책을 발표하였으며,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와 하늘을 나는 배』로 1969년에 칼데콧 메달을, 『비 오는 날』로 80년에는 칼데콧 아너상과 라이프치히 국제 도서전에서 동메달을, 『새벽』으로 74년 국제 어린이 도서 협의회에서 주최하는 안데르센상과 골든 카이트 어워드 일러스트레이션 부문상과 칼데콧 아너상을 다시 한 번 더 받았습니다.

다양한 수상 경력이 말해주듯이 그의 그림책이 갖는 예술성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심도 가질 수 없습니다만, 그는 그런 작업과는 별도로 ‘전미어린이책작가협의회’의 회원으로 꾸준한 활동도 하고 ‘스쿨 오브 비주얼 아츠’와 ‘프랫 인스티튜트’ 등에서 드로잉과 디자인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변화의 모색은 그의 작풍에도 고스란히 반영되는데, 활동 초기의 작품인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와 하늘을 나는 배』『황금거위』가 전형적인 판타지를 다루는 스타일이었다면, 후기로 갈수록 『비밀의 방』처럼 판타지와 리얼리즘이 적절히 결합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변모되면서, 동양적 사상과 사유의 신비를 체험해나가는 작가 자신의 개인적 성향과 취향이 반영되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날을 회상하며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송이송이 눈꽃송이 하얀 꽃송이” 노래를 부르며 진눈깨비가 내리는 3월 첫날을 봄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아직 겨울이라고 해야 할까요? 마녀는 제법 낭만적인 기분에 도취하여 3월의 첫날밤을 서성거렸습니다. “겨우 눈꽃송이라고요?” 음… 익숙한 말입니다. 유리 슐레비츠의 『Snow』에서도 카이젤 수염을 달고 있는 할아버지가, 높은 모자를 쓴 신사분이 “고작 눈꽃송이”라고 말했죠.

하지만, 오늘 내리는 진눈깨비처럼 비록 내리자마자 녹아버리고 녹은 자리 위에 또 다른 눈꽃송이가 떨어져 또 녹아버린다 하더라도, 내리는 눈꽃송이는 세상사에 아랑곳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구절이 책에도 소개되고 있지요. “그러나 눈송이는 라디오를 듣지 않아요. 눈송이는 텔레비전도 보지 않아요.” 무던하게 눈은 내리고 또 내리고 또 내려서 공중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다 여기저기 쌓이고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면 될 뿐,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의연하기만 합니다.

이 그림책은 고즈넉한 북유럽의 중세를 연상케 하는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회색 하늘, 회색 지붕, 회색 도시가 마침내 온통 하얗게 변한 풍경을 시원하게 보여주며 마지막 장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눈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 따위에는 아랑곳하고 싶지 않은 것이 정작 ‘눈’의 생각이라는 듯이 말이죠.



한편, 유리 슐레비츠는 이 책으로 칼데콧 아너 상과 함께 골든 카이트 어워드 상을 받았는데요, 수상 연설에서 작가의 말이 그가 그림책 『Snow』에서 전달하고 싶었던 심상을 충분히 대신하고 있는 듯합니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 술 취한 두 사람이 가로등 옆에 서 있었지요. 그들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어요. 한 사람이 가로등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건 태양이야.’ 그러자 다른 이가 맞받았지요. ‘달이야.’ 그래서 중재자가 필요한 그 둘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둘 중 누구 말이 맞지요?’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의 대답인즉슨, ‘저는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이 아닌데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느냐고요? 바로 ‘지역적인 진실’이란 없다는 겁니다. 진실이란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다를 수 없겠죠. 하지만, 날씨란 그렇지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저희 동네에는 눈이 16인치나 내렸는데, 근처 이웃에는 날씨가 좋았지요. 그때 제가 만들고 있던 책이 바로 이 책 『Snow』입니다.”

비 오는 봄날을 기다리며

『비 오는 날』은 연노랑, 연두, 파랑을 주조로 한 수채화가 잔잔하고 차분하게 비 오는 날의 서정을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촉촉하게 스며드는 비의 감촉과 향긋한 냄새, 그리고 외부 세계로부터의 차폐감을 느끼게 해주는, 비가 만드는 공간의 낯선 존재감 등등. 비는, 특히 봄비는 마음부터 적셔줍니다. 아마 책 속의 소녀 또한 다락방에서 ‘통통’ 튕기며 울리는 지붕 위의 빗소리를 들으며 상념에 잠겼을 거예요.



“투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후루룩 홈통을 타고 내려가 쏴아 거리로 쏟아져 흐릅니다. 그렇게 흘러 흘러 거리를 흥건하게 적셔 비 그친 내일이면 웅덩이에 종이배 하나 정도는 띄울 수 있게 되겠죠.” 만약 비가 거리가 아닌 들판에 내린다면, “새의 날개도 적시고 개구리들의 푸른 등에도 빗방울을 맺히게 하겠죠. 장대같이 굵은 비가 내린다면 냇물도 쉴 새 없이 조잘댈 거예요. 꾸룩꾸룩 소리를 내며 개울을 굽이돌아 강으로 빠져나가고 마침내 바닷물에 합류하면, 어느 몹시 더운 여름날 증발해 날아가 하늘에 녹아들 거예요.”

소녀는 두 다리를 바짝 당겨 모아 웅크린 채 다락방의 찬 공기 속에서 작은 빗방울이 큰 바다로 나가 다시 하늘로 오르는 ‘비의 순환’까지 생각해 냅니다. 그러나 과학적 사색의 방법이라기보다는, 비로 인해 외계와 격리된 그녀만의 작은 공간인 다락방에서, 소녀는 서정적인 감성으로 보이지 않는 비 오는 바다까지 내다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 오는 날』에서 소녀는 심안의 망원 렌즈를 통해 꼼꼼하게 비를 품은 자연을 들여다보고, 유리 슐레비츠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채 ?제된 그림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물기 어린 듯 촉촉한 연노랑, 연두, 파랑의 그림은 아직도 습기를 머금은 듯한 착각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짤막하고 언어를 아끼는 단편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느낌은 마음에 커다란 여백을 만들어 줍니다. 그 마음의 여백에 다시 들이치는 빗방울들! 마녀는 이 그림책에서 봄비의 색을 느껴봅니다.

눅눅한 듯 가는 선들의 번짐이 느껴지는 그림은 석판화 같기도 하고 동양화 같기도 하지만, 사실 어떤 기법으로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한시(漢詩)에서 영감을 얻어 이 그림책을 만들었다는 것이 이 마녀에게는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집니다. 일본의 어린이 문학 비평가인 하라 쇼가 이 책을 두고 “리얼리즘 예술의 극치”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들, 봄비의 상냥한 냄새와 달콤한 목소리를 기억하는 이 마녀에게, 봄비가 가져올 희열이야말로 책 마지막 쪽 뒤의 여백에 그려 넣는 것이니까요.

영리하고도 지혜로운 노인으로부터 배우는 교훈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왕이 낙타를 타고 수행원을 거느린 채 사막을 여행하다 머리털은 백발이나 턱수염이 까만 노인을 만났습니다. 임금은 그 연유가 궁금해 노인에게 그 이유를 듣게 됩니다. 그의 대답에 흡족해진 임금은, 자신을 99번 만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방금 한 말을 하지 말라는 충고를 남기고 궁으로 돌아갑니다. 궁으로 돌아온 왕은 고문관에게 어째서 머리가 턱수염보다 빨리 하얘지는지 묻지만, 고문관은 까닭을 알 길이 없어 사막의 노인을 찾아가 묻습니다.

노인은 왕과의 약속을 잊었을 리 없지만 은화 99개의 헐값에 그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노인에게 노발대발 화를 내려 했으나, 이미 은화에 담겨있는 임금의 얼굴을 99번이나 본 것이라는 노인의 대답이 마음에 들어, 임금은 노인에게 재무장관 자리를 내어줍니다. 성실한 노인을 시샘한 고문관은 노인을 모함하기 시작하는데…….



유리 슐레비츠가 『비밀의 방』을 통해 그린 사막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황량하고 척박한 땅이 아닙니다. 유리 슐레비츠의 사막은 현자를 길러내는 토양이고 사욕과 질투로부터 굳건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의지를 키워내는, 이글거리는 태양이 지켜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온 현자는 과연 임금이 품었던 잠시의 의혹이 무색할 만큼 현명할 뿐 아니라 지혜로웠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유리 슐레비츠의 의도는, 템페라(아교나 달걀의 노른자 따위로 안료를 녹인 불투명한 물감)에 의해 표현되었고, 현자의 모습은 페르시아풍 혹은 러시아 이콘화풍의 장식적인 화려함이 돋보이는 것 때문에 어딘지 이국적이고 신비적인 느낌이 감돕니다.

현자가 모략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사색의 방을 열었을 때, 현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반성’과 ‘사유’의 장소인 그 방의 비밀이 밝혀집니다. 왕의 부름을 받고 속세에서 살아가야 하는 현자에게 『비밀의 방』은 또 다른 사막이었던 것이죠. 마음에 사막 하나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 현자의 삶인지 이 마녀는 잘 모르겠지만, 수행하는 많은 이들이 오지 사막으로 향하는 것으로 봐서 사막은 욕심과 증오를 이겨내게 해주는 강한 힘이 있는 신비로운 곳임이 분명하군요.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써는 사막에서 수양을 할 수 없으니 현자가 그랬듯이 각자의 ‘비밀의 방’을 만들고 그 속에서 현명함과 희망을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유리 슐레비츠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이국의 현자가 전하는 교훈을 템페라 물감으로 또박또박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여러분은 제 생각에 공감이 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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