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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개』의 작가, 가브리엘 뱅상

앞서 그녀의 모노톤 중심의 목탄, 연필화 작품을 소개했습니다만, 사실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던 작품은 작고 앙증맞은 쥐인 셀레스틴느와 그녀를 돌보는 커다란 덩치의 우직한 곰 에르네스트 아저씨를 그린 채색 그림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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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말한다

1893년 안데르센은 『그림 없는 그림책』을 썼습니다. 이 동화집은 가난한 화가에게 달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엮은 것으로서, 하늘 높은 곳에 떠있는 달님이 매일 밤 내려다 본 세상 속 이야기를 무려 서른 하루 밤 동안 매일 한 편씩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지난 호에서도 소개한 레이먼드 브릭스의 『눈사람 아저씨』, 그리고 일본 그림책을 대표하는 작가 안노 미쯔마사의 『여행 그림책』 등은 글이 없는 그림책들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바로 오늘 여러분께 소개할 가브리엘 뱅상 역시 침묵하여 묵묵히 그림들로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가이니, 잠시 여기에서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말한 “모든 것은 말한다”의 의미를 되새겨 봐야겠습니다. 사실 글이 빠진 그림책은 오로지 그림에만 의존해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글과 그림이 한데 어울린 그림책들에 비해 어린이나 어른 모두 두 배 이상의 집중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재구성해야만 합니다. 글에 익숙한 어른들에게는 그림으로만 전달되어지는 이미지들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작가의 속마음을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아직 글을 익히지 않은 어린이들에게는 글이란 해독하기 어려운 또 다른 낯선 기호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림책 작가들은 대체로 아주 어린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그림책에서는 가급적 글의 수를 줄이고 명징하고 확실한 그림들로서 의미를 전달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뱅상의 ‘글 없는 그림책’들은 취학 전 어린이들만을 독자층으로 내정하고 만들어진 듯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성공적인 글 없는 그림책은 그림들이 물 흐르듯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집니다. 한 컷 한 컷의 이미지들은 전체적 조직 속에서 이전 화면과 다음 화면을 연결해주는 스틸 사진들처럼 공통의 사물이 등장하고 움직임이 급작스럽지 않고 매끄럽게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가브리엘 뱅상의 목탄 데생 삼부작 『떠돌이 개』, 『꼬마 인형』, 『거대한 알』을 보고 있노라면 독자의 상상력이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을 어느 쪽으로든 열어둔 듯이, 이미지들은 성긴 연결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치 하나의 단독적인 데생 작품들을 하얀 벽에 걸어 두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개별적 이미지로 충만한 멋진 작품들이고 보니,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사이의 긴 여백에 끼어드는 독자의 해석은 그림책을 보는 때와 심상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변주될 수 있지요. 그런 이유로 롤랑 바르트가 말한 “모든 것은 말한다”의 뜻이 같은 프랑스 문화권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는 벨기에 출신의 가브리엘 뱅상에게서 더욱 의미심장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동안 그림책 작가를 소개하기 위해 다양한 그림책을 접하게 되다보니 그림책 작가가 태어나 자란 나라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습니다. 모든 일반화는 개별성을 해칠 우려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미국 작가들의 그림책이 실용적인 느낌이 강하다면 프랑스권의 그림책은 형식과 미적 감각을 더욱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영미권 그림책이 교훈을 전달하고자 하는 교육적 목표가 어느 정도 무시되지 못한다고 볼 때, 상대적으로 프랑스권의 그림책은 교훈보다는 예술적이며 철학적인 경향을 띠는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조용히 마음속에 깃듭니다. 프랑스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개성을 중요시하고, 대화를 중요시 한다고 하는데요, 이런 민족적인 특성이 그림책에도 고스란히 반영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문제에는 한 가지 해답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해결책이 있음을 강조하여, 스스로 사고함으로써 자신만의 해결책을 찾도록 어린 독자들에게도 사유의 공간을 많이 허용해주는 것이 프랑스권 그림책의 특징이자 가브리엘 뱅상의 그림책에서도 무시 못할 중요한 특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노톤 데생 삼부작

(1)『떠돌이 개』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차창 밖으로 개 한 마리가 휙 던져집니다. 고속도로를 따라 쏜살같이 자동차를 뒤쫓아보지만, 이제 이 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외톨이 신세입니다. 버림을 받고 떠돌이가 된 개는 까맣게 멀어지는 자동차를 보며 우두커니 멈춰 서서 처량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고 슬픈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다가도 정처 없는 신세이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다른 차들을 쫓아가 보기도 하지만 사고만 일으킬 뿐, 정작 이 떠돌이 개에게 찾아드는 것은 버려진 처량한 비애감이요, 기진맥진한 피곤입니다. 낙담한 채 바닷가와 도시를 어슬렁거리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소년을 만나게 되는 모습에 이르면 데생 작품 한 점 한 점에 서려있던 서글픈 감정이 이내 안도감으로 바뀌고 뭉클한 위안이 되어 따듯한 눈물 한 방울을 만들어 냅니다.


따듯한 연민의 시선으로 함께 바라본 그림책 『떠돌이 개』 중에서


누구나 살면서 절절한 외로움에 눈물 훔치게도 되고, 우두커니 거울 속에 비치는 홀로인 자신의 모습에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게도 됩니다. 대사는커녕 그림에서 색깔도 모두 지워버린 모노톤의 목탄 데생 64편으로 구성된 『떠돌이 개』는 가브리엘 뱅상이 수묵화에서나 볼 수 있듯 한껏 여백을 살려 독자가 자신들의 공감을 그리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단색이지만 채도의 농담을 통해 느껴지는 깊이감은 삶의 비의를 다시금 돌이켜 보도록 하는 힘이 느껴집니다. 비록 버려진 개 한 마리에게 감정이입하여 반추한 우리 삶의 쓸쓸한 존재감이라고는 하지만, 친구를 찾게 된 떠돌이 개의 모습을 통해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듯한 노곤한 해방감은 그 어느 작품에서도 쉽사리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합니다.

모노톤의 단조로움은 다양한 시선으로 자유자재로 구사된 크로키를 통해, 카메라의 렌즈처럼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멀리 바라볼 수 있도록 한 원근감을 통해 지나치게 감정으로만 실릴 수 있는 우려를 해소해주고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림책 읽기를 가능하게, 그러므로서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환원해서 되비칠 수 있도록 하는 그림 장치는 감히 젊은 작가들이 흉내낼 수 없는 작가의 철학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코끝이 시큰해진 채, 마지막 책장을 덮고 망연히 있노라니 문득 자코메티의 ‘개’ 철근 소조가 떠오릅니다. ‘우리 모두는 본래 혼자 있으면 이렇듯 앙상한 존재일까?‘ 왠지 서글픈 느낌이 쉽사리 가시지 않습니다.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10대 그림책, 보스톤 글로브 혼 북 어워드 명예상, 미국 학부모 선정도서 금상, 일본 도서관협회 선정도서 등등 수상 경력이 화려한 이 책은 솔직히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혼자서만 몰래 오래오래 보고 싶은 책이지요.

(2)『꼬마 인형』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면 7명의 꼬마들이 실로 매달아 인형을 조종하는 마리오네뜨를 갖고 인형극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또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어린 시절 여동생과 함께 마리오네뜨 인형극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어떻게 아느냐구요? 괴테가 어린 시절 살았던 프랑크푸르트의 생가에는 그 시절 마리오네뜨 인형들을 갖고 놀았던 인형극 무대가 아직도 잘 보관되어 있더군요. 그 뿐인가요? 프라하에는 이곳 저곳 마리오네뜨 극장이 이방의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끌며 모차르트의 <돈 지오반니> 등을 연극화해서 상연하고 있?니다. 호기심 많은 이 마녀도 당연히 마리오네뜨 연극을 보았지요.(호호호)


자, 이제 수다는 이 정도에서 그치고 다시 차분하게 가브리엘 뱅상의 그림책으로 돌아가 볼까요? 예쁜 여자애가 마리오네뜨 인형극을 하는 간이 무대(유럽에는 시장 등에서 가끔 간이 무대를 설치하고 마리오네뜨 인형극을 합니다) 앞을 기웃거려요. 두 손과 머리에 긴 끈이 묶여 있는 꼭두각시 인형에게 “안녕”하고 눈인사를 하고 고개를 숙이고 무대를 가까이에서 들여다 봅니다. “호호” 인형이 웃자, 소녀도 덩달아 “호호”하고 따라 웃지요. 여자애는 마리오네뜨 인형에게 쏙 빠져버렸어요. “얘, 나랑 놀자…” 하지만 주인 할아버지한테 혼날지도 몰라요. 빼꼼히 무대 밖으로 얼굴을 내민 마리오네뜨 인형의 얼굴은 어딘지 서글퍼 보이기도 하네요.

그 때 무대의 커튼 뒤쪽에서 ‘우우우’하고 늑대가 짖고 빼꼼히 얼굴을 커튼 사이로 내밀어요. “늑대다!” 긴 혀를 낼름거리며 늑대는 눈물까지 글썽이는 마리오네뜨 인형을 괴롭히기 시작했어요. “안 돼!” 여자애는 냉큼 귀여운 마리오네뜨 인형을 팔에 안고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어요. 그 때 마리오네뜨 인형을 조종하던 할아버지가 뒤에서 “꼬마야. 겁내지 말라니깐!”하고 달려오지요. 그리곤 할아버지는 은근히 자신의 솜씨에 으쓱해지죠. 이만하면 “꼬마가 진짜인 줄 아는군… 음, 내 솜씨도 제법인데!”라고 혼잣말을 하며 말이죠. “꼬마야, 가지마라. 이 할아버지 이야기 좀 들어보렴.” 꼬마는 ‘걸음아 나 살려라!’ 열심히 뛰었지만 성큼 다가온 할아버지가 헉헉거리며 꼬마 옆에 바짝 다가왔지 뭐예요.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전달할게요. 여러분들 몫으로 남겨둬야 하니까 말이죠. 이 그림책을 두고 노르트 탕지는 “매우 단순한 데생으로 섬세한 감정을 그려 냈다. 어린이와 성인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책”이라고 평을 한 바 있어요. 그런데 이 간단한 서평은 정말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정확히 이 책을 읽고 난 마녀의 느낌과도 같답니다. 뭉뚝한 흑연이나 콩테 등을 이용해서 그려진 부드러운 선으로 구현된 예쁜 여자애, 귀여운 마리오네뜨, 아이를 놀래켰지만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에서는 따듯한 정감이 배어 나와요. 마치 거리의 화가가 늘 그의 어깨 밑에 끼고 다니는 데생 노트를 펼쳐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3) 『거대한 알』

『거대한 알』은 넓은 황무지에 떨어진 알이 사람들의 눈에 띄면서 어떻게 사람들이 이 알을 이용하는지를 통해 문명이 어떻게 자연을 파괴해 나가는지를 상징적이며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데생 삼부작 중에서도 유독 섬세함보다는 역동적이고 강렬한 위압감이 넘치는 『거대한 알』은 목탄으로 그려졌는데, 가브리엘 뱅상은 이 그림책을 통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지 못하고 문명과 발달이라는 명목 하에 자연을 해치는 인간들의 이기심을 어둡고 묵직한 느낌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파괴적 본성이 저지른 만행에 자식을 잃은 독수리의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인간들의 포탄에 맞아 죽은 새끼 독수리의 시신 주위를 ‘끼룩 끼룩’ 울면서 나는 절망적인 날개 짓이 만드는 검은 그림자, 도무지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해골같이 싸늘한 모습으로 표현된 인간 무리들의 창백한 윤곽은 스페인 화가 프랜시스코 데 고야(1746~1828)가 ‘블랙 페인팅 시대’에 그린 어두운 인간 본능의 심연을 다룬 작품들과 어딘지 흡사하다고 할까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사유와 반성의 자세를 요구하는 가브리엘 뱅상의 이 작품은 볼로냐 국제 어린이 도서전 그래픽 상, 산케이 아동출판문화상 미술 부문상을 수상했으며, 탁월한 데생, 역동적인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엄청난 몽상과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50세가 넘어 그림 작가로 데뷔한 가브리엘 뱅상

한 여컀이 있었습니다. 브뤼셀 거리에 꾸며놓은 아틀리에의 창가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을 즐기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워서, 숲 속에 있는 것보다는 거리를 내다보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 여인이 바로 벨기에가 낳은 그림책 아티스트 가브리엘 뱅상입니다. 1928년 유럽의 작은 나라인 벨기에에서 태어난 모니크 마르텡은 예술을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수도인 브뤼셀 교외 소와뉴의 숲에서 자랐습니다. 미술 학교를 졸업하고 데생의 재미에 푹 빠져 지냈던 그녀는 자신의 본명을 가브리엘 뱅상으로 바꿔 화가로 활약하기도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채 나이 54세 되던 해인 1972년에야 비로소 그림책 작가로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나이에 그림책 작가로 데뷔한 그녀였기에 그녀가 탄생시킨 그림책들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소재를, 잔잔한 이야기로 어깨의 힘을 빼고 풀어내고 있습니다.

앞서 그녀의 모노톤 중심의 목탄, 연필화 작품을 소개했습니다만, 사실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던 작품은 작고 앙증맞은 쥐인 셀레스틴느와 그녀를 돌보는 커다란 덩치의 우직한 곰 에르네스트 아저씨를 그린 채색 그림책들입니다. 차분함이 주조를 이루는 그녀의 수채화 풍 그림들은 흔히 젊은 예술가들이 다양한 실험적 시도로 기교를 뽐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늘 따사로운 색감이 배어나오는 온화한 화풍으로, 한결같은 어찌 보면 달리 독특하다고 할 수조차 없이 평이한 그림책들로 일관된 작업을 계속해 나갑니다. 그런 꾸준한 자세가 오히려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어린이들과 어른들의 마음에 편안함을 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000년 9월 브뤼셀에서 일흔둘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을 때 프랑스의 유명한 잡지인 『리베라시옹』은 그녀를 추모하는 기사에서 “가브리엘 뱅상은 가벼운 선으로 강렬한 감정을 그려 냈다”고 회고하였지요. 이제 브뤼셀 거리를 내려다보며,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아내는 그녀는 없지만, 손 때 묻은 그녀의 스케치들과 화구들은 여전히 아틀리에에 남겨져있다고 하는군요.

셀레스틴느 이야기

셀레스틴느는 몸집이 아주 작은 생쥐입니다. 그와 반대로 에르네스트는 몸집이 아주 큰 곰입니다. 현실에서 곰과 생쥐가 동고동락 하면서 함께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가브리엘 뱅상이 그리고 있는 ‘셀레스틴느 이야기 시리즈’에서 두 주인공은 아무 탈 없이 한 집에서 서로를 위해주며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왜 하필 작디작은 생쥐와 우둔한 곰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까요? 셀레스틴느로 대표되는 어린이들은 어른의 보호 없이는 거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미약한 존재이고 한시라도 얌전히 있지 못하고 뛰어다니기에 작은 생쥐로 표현된 것이고 비록 곰은 우둔한 듯 보이고 행동이 굼떠 보이지만 기실은 점잖고 신뢰감을 주는 의젓한 모습이 어른이란 존재와 닮아있어서 많고 많은 동물 중에 뽑혔을 듯하네요.

셀레스틴느는 여느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늘 방안을 어질러놓고 마음대로 안 되면 떼나 쓰는 철부지이지요. 그렇지만 에르네스트 아저씨가 감기몸살로 앓아 누워있을 때 진정으로 아저씨를 위해 따듯한 스프도 만들어드리고 극진하게 간호를 하는 사랑을 표현할 줄도 아는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한편 에르네스트 곰 아저씨는 망가진 인형을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는 셀레스틴느를 위해 직접 손바느질로 망가진 인형과 똑같은 인형을 만들어주고, 비 오는 날에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풍을 가는 우직한 면이 있는 어른입니다.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셀레스틴느 이야기 시리즈’는 모두 다섯 권이고, 한결같이 셀레스틴느와 에르네스트 아저씨의 일상을 다룬 가슴 따듯하고 훈훈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곰 아저씨의 모습이 구부정하고 굼뜬 것을 표현하기 위해 가브리엘 뱅상은 곰 아저씨의 형상에는 거의 변화가 없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에 반해, 꼼지락거리고 늘 분주한 어린 아이인 셀레스틴느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다양한 표정과 다양한 포즈로 생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표정에서 시각을 보다 확장시켜 한 컷 한 컷의 배경을 살펴보면 늘 어질러져 있는 방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어질러져 있는 모습이 칙칙하고 눅눅한 그런 비에 젖은 듯 무거운 느낌이 아니라 밝고 열려진 창문을 타고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한 햇빛이거나 심지어 저녁에조차도 은근하게 주위를 밝혀주는 촛불이나 램프가 그림의 배경에 경쾌함을 가져다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도 가브리엘 뱅상은 어른과 아이가 한 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간 배경을 자연광으로든 인조 광선으로든 행복한 곳이 될 수 있도록 밝은 톤으로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박물관에서』『크리스마스 파티』를 보고 있으면 에르네스트의 처지가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우리에게도 IMF 한파로 인해 모두가 살기 어려웠던 내핍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는 어려움을 내색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죠. 힘이 들고 기운이 빠지는 현실 앞에서도 꿋꿋한 모습을 보이며 아이들의 성장에 기꺼이 밑거름이 되고자하는 우리네 아빠들의 모습이 바로 우직한 에르네스트를 통해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직장을 잃어 실업자가 된 에르네스트가 일자리를 찾아 박물관에 가서 구직활동을 하는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힘겨운 아빠들의 자화상이요, 돈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어달라고 생떼를 쓰는 셀레스틴느를 위해 아쉬운 대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어주는 모습은 비록 어렵더라도 내 아이만은 구김살 없이 키우고 싶은 아빠의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가브리엘 뱅상이 하염없이 베푸는 존재로서 어른인 에르네스트만을, 게다가 철딱서니 없는 아이인 셀레스틴느의 모습만을 포착해 보여주었다면 세계적인 공감을 얻는 그림책 작가가 되지 못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셀레스틴느는 훌륭한 간호사』에서는 셀레스틴느의 고사리 손으로 만든 따듯한 카모마일 차를 마시고 건강을 되찾는 에르네스트를 통해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비록 아이를 더 보듬어 안고 이해해줘야 하는 몫은 어른들에게 더 많겠지만, 진정어린 사랑으로 자라는 아이들에게 베푸는 어른들의 아량과 이해는 봄 날 따듯한 햇살과 같고 여름철 단비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가브리엘 뱅상의 두 가지 톤의 그림책들을 양분하여 살펴본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셀레스틴느를 위해 설빔을 사러갈까 고민하시는 분들, 올 설엔 꼬까옷 대신 가브리엘 뱅상의 그림책은 어떨까요? 진정한 사랑은 혼자가 아닌 둘이 만드는 것임을….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아 설 연휴 동안 돈독한 가족애를 쌓으시기를 바라면서, 책 요리하는 마녀는 행복한 우리 설날 맞이하시기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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