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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를 위하여

호시노 미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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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출신 야생사진가 호시노 미치오(星野道夫)의 책은 알래스카를 향한 동경을 갖게 한다. 하지만 동경(憧憬)이라는 말처럼 마음에 두고 그리워할 뿐이다.

일본 출신 야생사진가 호시노 미치오(星野道夫)의 책은 알래스카를 향한 동경을 갖게 한다. 하지만 동경(憧憬)이라는 말처럼 마음에 두고 그리워할 뿐이다. 나와 알래스카 사이에 장벽이 가로놓여 있어서다. 알래스카의 혹독한 추위와 거기까지 가는데 필요한 번거로운 절차도 그렇지만 나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콤플렉스는 더 큰 걸림돌이다.

그건 바로 ‘노스(North) 콤플렉스’다. 레드 콤플렉스의 변종인 이 ‘북쪽’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거나 그것이 내면에 잠복된 한국인은 아직도 상당수에 이르리라. 나는 인천시 ‘북구’에서 태어나 성장했어도 얼마 전까지 야구 명문 천안 ‘북일고’의 이름이 영 거북했다. 고2 수학여행 때 들른 동해안 통일전망대가 내가 가본 제일 높은 위도였던 나에게 알래스카는 언감생심이다.

사진 산문집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2005)에 실려 있는 일본의 여성 작가 오오바 미나코의 ‘해설’을 보면, 호시노 미치오는 진정한 예술가이기에 앞서 진정한 모험가다.

“이른바 모험가 중에는 제 행적을 남에게 팔기 위해 모험을 하는 사람이 많다. 자신을 시험하는 모험이 아니라, 상업모험가 혹은 모험꾼이라고 해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산꼭대기나 요트 안에 셀프타이머 카메라를 설치하고, 의기양양한 제 얼굴을 매스컴에 판다. 진짜 모험이란 남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고, 비상용 무전기 같은 것도 들지 않고, 남에게 알리지 않은 채 길을 떠나는 고독한 세계의 어떤 것이 아닐까.”

오오바 미나코는 “정치가는 정치꾼이 되고, 예술가는 예술꾼이 되는, 매사 금전으로 환산하고 값을 재는 자본주의 사회의 시대이니 그런 풍조도 피치 못할 현대의 숙명”으로 치부하면서도 이런 행태를 안타까워한다. 호시노 미치오가 그런 모험꾼이거나 “사진을 하나의 상품으로 자연 속에서 오려내서는 소비자인 독자 앞에 여봐란 듯이 득의에 찬 얼굴로 내미는” 예술꾼은 아니다. “호시노 씨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20세기 후반 일본문학의 중요 작가로 꼽히는 오오바 미나코는 10년 넘게 알래스카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원주민을 제외한 알래스카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남은 자원을 찾아 그곳에 온 사람들로, 이들은 잠시 불편을 감수하며 살다가 돈이 모이면 남쪽 생활로 돌아가려 한다.

“또 한 부류는 어떤 이유로 알래스카에 와서 살다가 이곳 자연에 푹 빠져서 뿌리를 내린 사람들, 말하자면 현대 문명에 염증이 나서, 매사에 많은 불편이 따르는 생활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몽골로이드가 북방아시아에서 알래스카로 건너온 지 2만년 후, 지난 1백 년 동안 알래스카에 들어와 새로 살게 된 두 부류의 인간을 보는 호시노의 미치오의 시각 또한 오오바 미나코와 다르지 않다.

“하나는 선교사, 상인, 광산업자, 생물학자, 교육자 따위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자신이 전에 살던 지방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이 땅에 고스란히 가지고 들어왔다. 또 한 부류는 이 땅에 벌써부터 존재하던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이어받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알래스카에서는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겉으로 쉬 드러나는 데 반해,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거의 알려지는 일이 없다.”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 에세이는 진짜 알래스카인의 초상과 “마음의 필름에만 담아두고 싶은 풍경”을 그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알래스카 주둔 미군 병사였던 밥 율은 전쟁이 끝나고 그곳에 눌러앉는다. 그 뒤로 41년간 고향 캘리포니아를 한번도 찾지 않은 밥 율의 사냥 철학은 이렇다.

“어른이 되어서는 알래스카에서 살았어. 사냥에 대해서 생각했지. 살기 위해 동물을 죽인다, 그건 납득할 수 있어. 하지만 즐기기 위해서 동물을 죽이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알래스카의 혹독한 자연 속에 살면서도 생명이라는 문제가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 나의 생명과, 나를 둘러싼 동물의 생명은 같은 선상에 있어. 나로서는 그러한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었지.”

아사바스칸 인디언의 샤먼 아주머니는 이따금 운수가 나빠진다는 말을 했다. 이를 통해 호시노 미치오는 자연과 어떻게 관계하느냐가 알래스카 원주민의 운을 좌우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들은 자연에 대하여 막연하고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맺는 작은 관계들. 거기에는 늘 터부라는, 설명하기 힘든 자연과의 약속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알래스카는 ‘플랙 스톱’, 곧 철로변 어디서나 손을 흔들어서 열차를 세울 수 있는 철도가 다니는 거의 하나뿐인 곳이다. “플랙 스톱은 주민들이 들판에 점점이 흩어져 사는 상황과 직결되어 있다.” 태고의 자연과 혹한에도 아랑곳없이 약동하는 생명의 대장관은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다.

오늘의 알래스카가 그저 아름다움만을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니다. 우선, “알래스카 원주민이 안고 있는 알코올중독 문제는 그 뿌리가 깊다.” 높은 자살률, 폭력, 가정 파탄 같은 문제들이 크건 적건 모두 폭음과 관련이 있다.

호시노 미치오는 알코올이 전통적인 삶과 서구 문화 사이에서 방황하는 알래스카 원주민에게 배출구 노릇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이를 언급하는 것을 약간 망설인다. 원주민 사회 전체에 어두운 이미지를 덧씌우지나 않을까 해서다. 자연과 어우러져 일상생활을 꾸려가는 원주민이 적잖은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알래스카 원주민 소년이 15세에서 25세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열 명 중에 한 명이 자살을 시도할 위험이 있다는 것, 실제 자살률도 같은 연령대의 백인에 비해 10배나 많다는 것”은, 못 본 척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문제였다. 또 알래스카는 핵실험장으로 사용될 뻔하기도 했고, 베링해에서 엄청난 규모의 유전지대가 발견되면서 개발의 몸살을 겪기 시작했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호시노 미치오의 철학을 읽을 수도 한다. “사람의 마음은 깊고, 또 이상할 만큼 얕다. 사람은 그 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무스도 부엉이도 보이지 않지만 저기 저 어둠 속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무엇으로 변할 수 있고 더욱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그것은 밤의 어둠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생명이 가진 막연한 신비를 고스란히 전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호시노 미치오는 20대 중반 알래스카에 정착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품에서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알래스카의 모든 것을 사진에 담았다. 그러는 가운데 러시아 캄차카 반도의 쿠릴 호반에서 취재 도중 불곰의 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호시노 미치오는 자신에게 닥친, 40대 중반에 맞은 불의의 죽음을 억울해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오오바 미나코는 그를 다음과 같이 기린다.

“알래스카의 바다가 주는 두려움은 미국 대도시의 뒷골목을 걸을 때 느끼는 공포하고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런 두려움을 깊이 느끼면서도 호시노 씨는 알래스카의 자연과 동물을 대면하고 있었다. 그의 사고는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비극이지만, 그로서는 자연스럽게 걸어간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걸어간 발자국 발자국마다 감동스러운 사진과 글을 남겨놓고서 그는 사라졌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다.”

『여행하는 나무』(김욱 옮김, 갈라파고스, 2006)는 호시노 미치오의 산문집으로 알래스카의 자연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사연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경비행기의 창가에 가만히 이마를 대본다. 태양의 온기가 전해져 생각보다 따뜻하다. 해빙한 지 얼마 안 된 유콘 강이 반짝반짝 빛나며 대지를 물결치고 있다. 이곳의 호수와 늪은 아직도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사람들의 발자국이 한 번도 찍힌 적쳀 없는 곳일 게다. 알래스카의 매력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인간과 관계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 자연을 위해 존재하는 자연. 그것이 바로 알래스카의 본질이다.”

호시노 미치오의 사진과 짧은 글로 이뤄진
『숲으로』(김창원 옮김, 진선출판사, 2005)와 『곰아』(진선출판사, 2004)는 어린이를 위한 사진 그림책이지만 어른이 봐도 매우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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