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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서로를 억압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한

시민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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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반핵운동가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人三郞, 1938-2000)는 시민과학자다. 이 말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프랭크 폰 힛펠 교수가 지은 『시민과학자Citizen Scientist』에서 유래한다.

일본의 반핵운동가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人三郞, 1938-2000)는 시민과학자다. 이 말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프랭크 폰 힛펠 교수가 지은 『시민과학자Citizen Scientist』에서 유래한다. 이 책에서 “시민으로서의 과학자”를 자처하는 힛펠 교수는 “군축이나 환경 등 시민이 관심을 갖는 분야”를 시민과학이라 일컬었다. 다카기는 이에 대해 “그러한 과학의 영역과 과학자의 존재양식이 있다는 선언”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또 이로 말미암아 다카기는 스스로를 시민과학자라고 부르는 것을 한동안 꺼렸다. 자신의 생각을 시민과학자라고 분명하게 잘라 말한 것은 힛펠이 처음이었고, 그러면 왠지 책 제목을 표절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프랭크의 책 『시민과학자』의 제목을 대할 때, 나도 그러한 삶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다카기는 이와나미쇼텐이 제안한 『시민과학자로 살다市民科學者として生きる』라는 책 제목을 수용한다. “그렇다면 ‘시민과학자’란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60년의 인생을 통해서 어떻게 그러한 입장에 도달했는가.” 이런 것이 『시민과학자로 살다』(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2000)에 담긴 내용이다.

이 책은 말년의 다카기가 병상에서 집필한 네 권의 저서 중 하나인데 자서전 또는 회고록으로 볼 수 있다. 다카기는 이 책이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자기사(自己史)’의 범주에 들어갈지 모른다면서도 “나는 이 말의 뉘앙스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자기사’를 통해서이지만 그다지 사소설풍(私小說風)으로 되지 않도록, 살아온 시대를 쓰고 싶다”는 속내를 비쳤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압축했다. “나는 마침” 오토 한과 슈트라스맨의 핵분열 현상이 발견된 “1938년에 태어나서 1945년 소학교 1학년으로 일본의 패전을 경험했다. 그 후에 원자핵화학을 전공하고 약 40년간 ‘핵’과 함께 일해 왔다. 처음 3분의 1은 원자핵 이용을 추진하는 체제 내의 연구자로, 나머지 3분의 2는 거대한 연구?개발체제에서 뛰쳐나와 독립적 비판자에다가 시민활동가로 살아왔다. 이런 일은 일본에서 여하간 특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혼을 언급하는 것을 끝으로 프라이버시에 관한 문제를 다루지 않겠다고 다짐할 만큼 다카기는 사생활 노출에 민감하다. 하지만 자서전적인 이 책의 속성상 그의 성격의 일단은 유감없이 표출된다. 다카기는 아주 아주 겸손한 사람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시골학생으로 모의고사 성적이 전국 2, 3위권에 든 ‘수험우등생’이었음에도 도쿄대 합격을 운수소관으로 돌린다.

회사와 연구소, 그리고 대학 교수 생활을 통해 다카기는 자신이 “과학자이기 때문에 갖게 된 이해관계를 이미 무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는다. 이러한 자각과 각성은 그의 성향 자체에 내재해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다카기는 어려서부터 반골기질이 강한 독립적인 인물이었다.

“전쟁체험에 뿌리를 두고 차츰 내 마음속에서 강해졌던 사고방식은 ‘국가라든가 학교라든가 여하튼 위에서 내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말자, 어른들이 하는 말도 언제 변할지 모르니까 쉽게 신용하지 말자,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나 스스로 생각하고 내 행동에 책임을 지자’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신조라기보다 어떤 직관적 경계심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가 인생의 신조로 삼은 것은 다음 네 가지다.

1.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서로 억압하지 않는 사회일 것
2. 평화적인 삶이 보장될 것
3. 공정한 사회일 것
4. 이러한 세계가 지속가능하게 보장될 것

『플루토늄의 미래― 2041년의 메시지』(박은희 옮김, 따님, 1996)는 가상소설 형식으로 핵문제를 다룬다. 다카기는 자신의 가설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진 않지만, “일본의 플루토늄 계획의 미래에 대한” 그의 강한 우려가 반영돼 있다. 이 책은 『플루토늄의 공포』(1981)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카기가 독특퇇 방식으로 일본 핵문제의 전개양상을 짚어본 것은 당시 일본의 사회상황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먼저, 1992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 아까쓰끼호의 운항을 들 수 있다. 프랑스의 쉘부르항에서 일본 이바라기현 도까이항까지 3만 킬로미터를 항해한 이 배는 1.5톤의 플루토늄 산화물 분말을 싣고 있었다. 이 위험한 화물은 일본 원자력 발전소의 사용 후 핵연료를 프랑스에서 재처리하여 추출한 것이었다. 아까쓰끼호가 지나가는 뱃길을 둘러싸고 날마다 세계 여론이 들끓은 두 달간, 아까쓰끼호와 함께 플루토늄은 유명세를 탔다. 또한 이 시기에 북한 핵문제가 불거졌다.

플루토늄이 주인공인 이 가상소설의 배경지식을 돕는 서론에서 다카기는 플루토늄 해상 운송이 문제가 된 원인으로 그 물질의 본질적 성격을 든다. “그것은 나가사끼 원자폭탄의 재료가 되었던 대단히 유효한 핵무기물질(핵분열성물질)인 동시에 독성이 매우 강한 물질이라는 점이다.”

맛보기로 보여준 등장인물의 성격은 독자를 소스라치게 할 정도다. 플루토늄은 암을 유발하는 맹독성물질이다. 호흡기계통으로 흡입 섭취할 경우 특히 문제가 심각해진다. 수백 일에서 1천 일에 이르는 폐에서의 긴 잔류기간 동안 폐가 피폭을 받아 폐암을 일으킨다. 더욱 심각한 것은 플루토늄을 극미량(極微量)만 흡입하여도 위험하다는 점이다.

“원자로급 플루토늄(즉, 극히 보통의 플루토늄)의 흡입 독성은 매우 높아서 1억분의 2.8그램이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양이 섭취한도이다. 더구나 이 섭취한도라는 것은 직업적 피폭자의 제한치 50밀리시벨트에 대응하는 것으로, 일반대중의 피폭선량은 그 50분의 1에 제한되고 있으므로 이에 기준하여 대중의 연간섭취한도를 생각하면 원자로급 플루토늄에서는 100억분의 5.6그램이므로 1그램은 무려 18억 명의 섭취한도가 된다.”

본론에서는 세 가지 점이 흥미롭다. 우선, 액티브 테크놀로지와 패시브 테크놀로지의 서로 다른 지향성이다. 패시브 테크놀로지는 “되도록 자연 전체를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서 지구와 사이좋게 유순하게 살아간다는 공생적인 생각”이고, “환경문제도 기술의 힘으로 해결”한다는 것이 액티브 테크놀로지의 생각이다. 과학기술을 둘러싼 수동성과 능동성의 대비는 비단 핵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생명공학 같은 영역에도 이런 시각은 적용 가능하다.

2041년 핵개발 인력이 노령화 추세에 있다는 설정도 눈길을 끈다. 50대와 60대가 핵개발의 주력군이다. “일전에 플루토피아를 안내받았을 적에 노인이나 장년의 사람들만 일하고 있고 젊은이가 적다고 느꼈었다. 아마도 그 연배의 사람들이 폐기물 처분이라는 세대책임을 지게 되어 원자력의 직무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젊은 세대의 사람들은 직업적으로도 원자력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래의 핵개발 관계자들은 핵폐기물을 처리하는 몇 가지 방안 중에서 태양을 향해 쏘아 올리는 방법을 채택하는데, 태평양의 무인도에 고준위 핵폐기물 발사 기지를 만든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사실은 어느 ‘무인도’란 1950년대의 핵실험 후에 오염이 심해져서 주민들이 강제로 퇴거당한 산호초입니다.” 태평양상의 미국, 영국, 프랑스의 자국령 섬들은 이들 나라의 핵실험 장소로 애용되었다. 프랑스는 모루로아 환초와 팡가타우파 환초에서 1960년대부터 30년간 무려 193회의 핵실험을 강행했다.

『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2006)는 “자연관의 문제를 근원으로 돌아가서 재검토하는 작업”이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다카기 진자부로는 서구 자연관의 형성과정을 훑어본다. 다카기는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대립을 자연적 문화와 테크놀로지 문화의 대립으로 치환하여 둘에게 고정된 이미지를 뒤집는다. 아이스퀼로스와 플라톤에 의해 프로메테우스가 부각된 이후, 서양사회는 고난을 무릅쓰고 인간에게 불과 지혜를 건넨 프로메테우스는 영웅으로, 이를 징벌한 제우스는 악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신화 이야기꾼이자 신화시대와 결별한 최초의 사상가인 헤시오도스는 생각이 달랐다. 헤시오도스는 『노동과 나날』에서 황금의 나날로부터 인간을 노동하고 죽어야 하는 존재로 내몰았다는 이유로 프로메테우스를 성토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다카기는 프로메테우스가 불과 기술을 훔쳤다는 점에 주목한다.

“불과 기술로써 인간이 자연에 작용할 때에는, 비록 그것이 인간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어딘가 사악하고 또 자연에 상처를 입히지 않을 수 없다는 체험적 인식이 이미 신화에 반영되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상대주의와 무관하다는 설명에서 다카기는 빛나는 통찰력을 발휘한다. “상대성이라는 사고방식의 사상적 핵심은, 단순히 두 운동의 상대성 같은 것이 아니다. 외관상으로 보이는 다양성 뒤에는, 사실은 불변의 단일한 법칙에 의해서 표현되는 물체나 운동의 본질이 숨어있다는 사상이 상대성이다. 따라서 운동을 ‘상대화한다’는 것은, 그러한 외관상의 다양성을 쓸어버리고 불변성(보편성)을 탐색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상대성 이론은 관점의 상대성이나 시공의 상대성을 쉽게 연상시킨다. ‘진리의 상대성’을 뒷받침한다는 오해를 곧잘 사기도 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사상은 단호한 절대주의이며 진리에 대한 유일성의 주장이다.”

다카기가 바라본 생태주의의 현주소는 그리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생태주의는 오늘날 확실히 도시문명에 식상한 사람들의 취미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생태주의가 언제나 어깨에 힘을 주고 떡 버티고 선 듯한 ‘전투적 생태주의’여도 곤란하다. “그것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더 자유롭고 더 자연스러운 정신과 신체의 존재양식의 지평일 것이다.”

생태주의와 자연주의의 대비도 이채롭다. “‘에콜로지’가 반공해나 반원자력발전소 등의 운동에서 생겨나 그 나름대로 운동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데 대해서, 자연주의는 좀 더 규범적인 의미에서의 삶의 방법, 사회의 존재양식의 원리를 제시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에콜로지적 관점의 도입이라든가 자연관의 전환이라든가 하는 말의 핵심은, 인간 이성이 자연계에서 우위라는 근대적인 사고를 전환하는 일이다.” 또한 생태적으로 지구를 파악한다는 것은, 인간의 위치에 관하여 부정적 인식을 포함하는 것이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카기는 배리 코모너을 인용하여 이를 다음과 같이 함축한다. “자연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다카기는 로마클럽 보고서의 한계를 지적하고 신과학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보인다. 1970년 로마클럽이 내놓은 보고서 『인류의 위기』(『성장의 한계』로도 불리는)는 환경오염의 위기와 고도성장경제의 한계를 지적하여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다카기는 『성장의 한계』가 개발만능주의에 대한 경고와 반성을 담았지만, 그 바탕에는 인간중심주의가 흐른다고 지적한다. “더 교묘하게 자연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조화가 필용하다”는 사고에 근거하여 “산업생산성이 환경위기 때문에 하강한 데 대한 산업계의 위기의식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카기는 『성장의 한계』가 ‘우주선 지구호’라는 발상과 맞물리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발상에는 출구가 없다. 우리의 삶이나 행동을 주체적으로 자리매김해 주는 그러한 우주론도 없다.” 이러한 발상으론 “자연에 순종함으로써 자기를 결박한다”는 자연적 규범에 대한 순종만 남을 뿐이다. “선의의 에콜로지 운동 가운데 어떤 것이 계율주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도덕주의에 빠져있어서 아무래도 좀 불편한 감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카기에게 신과학은 20세기 물리학이 했던 자연 파악의 연장선상에 있다. 신과학의 결정적 한계는 관념성이다. “뉴사이언스는, 말할 것도 없이, 현재 하루하루를 살면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손의 실천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밖에는 자연을 보지 못한다.”

대도시에서도 자연에 접하여 생활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다카기는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자연스러운 생물로서 자연성에 솔직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 전체가 “생태계의 살아있는 순환 속에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다카기는 ‘제2의 측면’을 중요시한다.

“사회 전체가 유기성을 갖는 시스템으로 작용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숲에서 생활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자연의 리듬을 느끼면서, 자연의 흐름 속에서 숨쉬고, 자연과 서로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원자력의 역사를 총괄한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2001)은 “원자력문명에서 전환할 것을 뚜렷이 주장하는 입장에서 씌어졌다.” 다카기는 원자력발전의 근본문제를 짚은 다음, 원자력은 무한한 에너지원이고, 석유위기를 극복하고, 평화적이고 안전하며, 값싸고 지역발전에 기여하며 깨끗한데다가 재생가능하다는 신화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원자력 추진의 핵심 신화였던 안전신화를 보자. 이제는 일본정부조차 원자력의 안전성에 의문을 표시할 정도다. 1999년 9월 30일 발생한 토오까이무라의 JOC 우라늄 가공공장의 임계사고 조사위원회의 최종보고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이른바 원자력의 ‘안전신화’나 관념적인 ‘절대안전’이라는 말은 이제 폐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까기는 일련의 사고로 인하여 “건물이나 기계설비가 안전하게 설계되었는가 하는 기본적인 설계심사만 가지고 안전확보의 기본틀”을 짰던 원자력의 안전신화가 여지없이 허물어졌다고 지적한다. 그는 “원자력 사고는 반드시 일어난다.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카기는 『시민과학자로 살다』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의 한 사람으로 마리 퀴리의 이름을 여러 번 거론한다. 『청소년을 위한 마리 퀴리 생각 따라잡기』(강현옥 옮김, 파라북스, 2005)는 마리 퀴리의 간추린 생애와 가상대담으로 이뤄져 있다. 첫 대목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폴란드 소녀의 눈물에 얽힌 이야기다.

가상대담의 한 토막을 들어본다.

"다카기 : 연구생활을 하는 동안 과학이 악보다 더 많은 선을 이끌어낼지에 대해 점점 자신을 잃게 되었습니다.
마리 퀴리 : 특히 요즘의 과학자나 기술자들은 자신의 전문분야를 발전시키는 데에만 열중할 뿐 사회적 책임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인간적인 매력도 부족해 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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