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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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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는 ‘길 위의 현자’로 통하지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역마살이 낀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는 ‘길 위의 현자’로 통하지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역마살이 낀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호퍼는 1902년 뉴욕 브롱크스의 독일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에 어머니와 함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사고의 여파로 일곱 살 때 시력을 잃는다. 호퍼의 어머니는 끝내 회복을 못하고 그가 아홉 살 때 세상을 뜬다.

호퍼는 시력을 잃은 지 8년만인 열 다섯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하자 미친 듯이 독서에 몰입한다. 자서전인 『에릭호퍼, 길위의 철학자(Truth Imagined)』(방대수 옮김, 이다미디어, 2003)에서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읽는 법을 배웠다. 시력이 돌아오자 나는 거침없이 읽을 수 있었다. 시력의 회복이 일시적인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눈을 혹사시키는 것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눈이 멀기 전에 읽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읽고 싶었던 것이다.”

책을 탐닉하던 호퍼는 집 근처 큰길가에 있는 헌 책방에서 『백치』의 부름을 받는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은 호퍼의 애독서가 된다. 그는 해마다 『백치』를 다시 읽는다. “첫장의 스토리 전개는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것이었다.” 호퍼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우연히 접하고 탐독하게 된 사연도 흥미롭다.

1920년 아버지를 여윈 호퍼는, 가구 제조공 조합원이었던 부친의 동료들이 모아 준 300달러를 노자돈으로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그가 캘리포니아를 행선지로 삼은 것은 그 곳이 단지 “노숙할 수 있을 정도로 날씨가 온화했고, 길가에는 오렌지가 열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이후로 호퍼는 생애의 대부분을 떠돌이로 지낸다. “나는 삶을 관광객처럼 살아 왔다.”

그런데 그의 풍찬노숙은 다분히 의지적인 것이었다. 호퍼는 정주의 유혹을 느끼는 순간 곧바로 짐을 꾸렸다. 버클리에서 겨울을 보내며 시간제 웨이터 보조로 일하다 만난 스틸턴이라는 교수가 자신이 맡고 있는 캘리포니아대 감귤연구소라도 그에게 넘길 낌새를 보이자, 호퍼는 그가 아직 정착할 시기가 아니란 걸 깨닫는다. 그는 “다시 길 위로 돌아갔다.”

또 호퍼는 역시 버클리에서 만난 헬렌과의 사랑을 행복에 겨워하면서도 그를 대학에 눌러 앉히려는 헬렌과 그녀 룸메이트의 요청을 과감히 뿌리친다. “그녀들과 함께 살면 나는 한순간의 평화도 갖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즉각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나는 길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수확철이 다가오자 나는 그녀들에게는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버클리를 떠났다.”

호퍼는 독학으로 독자적인 사상을 수립한 인물이다. 그는 늘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안정된 첫 일자리였던 파이프 야적장에서 호퍼는 “일하고, 책 읽고, 연구하는 일과”를 맘에 들어 했다. 캘리포니아에 흩어져 있는 공공도서관 10곳의 회원증을 소지하기도 했다. 서구 본위의 동양관과 미국인 특유의 애국주의는 다소 거슬리지만, 호퍼의 지적 성실성과 삶에 대한 도저한 성찰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교육의 주요 역할은 배우려는 의욕과 능력을 몸에 심어 주는 데 있다. ‘배운 인간’이 아닌 계속 배워 나가는 인간을 배출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란 조부모도, 부모도, 아이도 학생인 배우는 사회이다.” 호퍼는 『에릭호퍼, 길위의 철학자』에 덧붙여진 셰일러 K. 존슨과의 인터뷰에서도 배움을 강조한다. “의미 있는 생활은 배우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호퍼의 교육철학은, 그가 수천 년 간 정체 상태에 있었다고 여긴 동양의 어느 선지자의 철학과 일맥상통한 점이 이채롭다. 영산대 배병삼 교수는 최근 펴낸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사계절)에서 공자를 “동양 최초쟀 교사”로 칭한다. 또한 “공자가 『논어』에서 우리에게 권하는 삶의 태도는 배움과 익힘, 곧 학습(學習)에 지나지 않고, 또 그 학습의 결과는 기쁨(희열)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셰일러 K. 존슨의 인터뷰에는 우리 귀에 익은 이름이 등장하는데 셰일러의 남편이면서 호퍼와 논쟁을 주고받은 체일머스 존슨은 『불로우백』(삼인)의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찰머스 존슨이다. 호퍼는 아포리즘의 형태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였다. 『에릭호퍼, 길위의 철학자』에서 몇 대목을 인용해 음미하기로 하자.

“인간들로 하여금 반항하게 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들에 대한 희구이다.”
“진실을 상상해 내고 미지의 세상을 눈앞에 보여주는 능력은 미지의 것을 탐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눈의 명료함보다 말을 더 믿는 데에서 비합리성이 나타난다.”
“창조를 하는 것은 개체이다. 창조적인 환경에서 개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의식하지만 또한 공동체적 현실과 살아 있는 연대를 갖는다.”
“행복이란 거의 없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노년에 자신의 생을 되돌아본 많은 위인들은 자신들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합쳐보아야 채 하루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호퍼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감칠맛이 나는데다가 여운을 남긴다. 사람에 관한 얘기가 제일 재밌다는 점도 일깨운다. 파블로 네루다가 에릭호퍼, 길위의 철학자 『추억』(녹두)에서 청춘의 방황을 아름답게 그렸다면, 호퍼의 『에릭호퍼, 길위의 철학자』는 긴 방랑의 산물이다. 그래서 호퍼의 이야기가 눅진한 걸까?

마리오는 호퍼가 샌호아퀸 계곡에서 만난 이탈리아 출신 떠돌이 노동자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파트너십을 형성하는데 요리에 능숙한 마리오가 반나절을 일하고 식사 당번을 맡는 대신, 호퍼는 마리오의 나머지 일까지 도맡는다. 둘은 1936년의 몇 주를 그렇게 보내다가 동료애에 금이 가는 결정적 사건을 맞는다.

“어느 날 저녁에 나는 무솔리니(Mussolini)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왜 고상한 이탈리아 민족이 천박하고 골 빈 돌팔이가 자신들을 학대하게 놔두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마리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자기 짐을 들고 가버렸다. 그는 다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호퍼는 생전에 펴낸 10권에다 유작으로 출간된 『에릭호퍼, 길위의 철학자』를 합쳐 11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 중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에릭호퍼, 길위의 철학자』와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첫 번째 저서뿐이지만, 『에릭호퍼, 길위의 철학자』 한국어판에 실려 있는 ‘에릭 호퍼의 생애’를 간추린 글의 한 구절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국에서는 에릭호퍼, 길위의 철학자 『Truth Imagined』이 이제 처음 출간될 정도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에릭호퍼, 길위의 철학자가 첫 출간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호퍼의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많다. 호퍼의 첫 번째 저서 『The True Believer : Thoughts on the Nature of Mass Movement』는 출판사를 바꿔 가며 세 번이나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10년 간격으로 출간되었다.

1969년 번역된 것으로 추측되는 『대중운동론』(유석종 옮김, 대한기독교서회)이 1970년대에 주로 읽혔다면, 80년대 독자들은 『대중운동』(장연호 옮김, 태학당, 1982)과 조우했을 확률이 높다. 90년대에는 『대중운동의 실상- 대중운동의 사회적 분석』(황종건 옮김, 한국교육공사, 1990)이 독자와의 만남을 기다렸다.

여러 번 출판됐어도 이 책이 독자의 호응을 크게 얻진 못한 것 같다. 게다가 저자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의 부정적인 면을 들추는 이념 비판서의 성격마저 있다. 호퍼는 서문?서 “이 책은 대중운동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며 또한 좋고 나쁘고를 가려 편드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은 모든 대중운동의 현상과 성격에 관해 단순한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는 하여도 러시아 혁명과 마르크스주의를 야비하고 해로운 대중운동으로 몰아가는 듯한 기색이 없지 않다. 이런 색채는 한국어판이 더 뚜렷하다. 세 번째 한국어판은 표지 분위기부터 사회운동의 안티테제를 자임하되 권말의 ‘한국어판 발행인의 말’에서 출간의 의도를 좀더 명확하게 드러내었다. “우리 사회에 낮도깨비처럼 출현하는 부당한 세력들의 허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데 보탬이 됐으면 싶습니다.”

물론 이 책 또한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다. 우선, 호퍼의 열린 자세가 돋보인다. 그는 독자들이 자신의 “논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기 바란다.” 책 자체가 권위적인 교과서가 아니라 개인의 사상을 정리한 것으로서 “그러한 사상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을 암시하고 새로운 문제를 정확히 기술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거라면서도 “어떤 독자는” 그의 “논지가 너무 과장되거나 어떤 것은 간과된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운동의 본질을 묘파한 대목은 호퍼의 혜안을 잘 보여 준다. 그런 대목은 숱하게 있으나, 하나만 들어보겠다. “동화되고 있는 소수 집단 사람들 중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사람과 그 반대로 전혀 못한 사람들은 다같이 전향을 호소하는 대중운동에 쉽게 동조되어 버린다고 할 수 있다. 그 예로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태리 사람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과 그 반대 경우의 사람은 무솔리니의 혁명에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이로써 마리오가 무언의 항의를 한 연유가 분명해진다.

또 이 책은 80년대 중반 대학에 들어간 필자가 운동권에 가담하지 않은 까닭이 몹시 회의적인 성향과 언제 닥칠지 모를 징벌이 두려워서 만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단결과 희생은 모두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한다. 따라서 개인이 집합체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즉 개인 생활이라든가 개인적 판단, 개인 재산 등을 포기해야 할 경우가 많다.” 개인 재산은 거의 없었으므로 나는 내 개인 생활을 잃거나 독자적인 판단을 포기하는 것도 꺼렸던 듯 싶다.

이 책의 우리말 텍스트는 모두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기 어렵다. 필자가 헌책방에서 구입한 세 번째 한국어판은 오탈자가 적지 않는 등 편집이 매끄럽지 못하다. 이 책의 내용이 여전히 우리 현실과 적합성이 있는 만큼, 네 번째 한국어판의 출간을 바란다. 아울러 네 번째 번역판은 『맹신자들- 대중운동의 본질 이해』쯤으로 원서에 좀더 가까운 제목을 붙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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