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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라기보다는 ‘로자’와 ‘제인 구달’에 가까운

페트라 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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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가 한 민족을 구하는 싸움의 선봉에 섰던 데 비해 페트라 켈리는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명을 구하는 싸움의 선봉에 섰던 여성이라는 점일 것이다.”

페트라 켈리(Petra Kelly, 1947-1992)는 흔히 잔다르크에 비유된다. 영국의 환경운동가 새라 파킨은 페트라 켈리가 1980년대 유럽의 “격동의 한가운데에서 늘 해맑은 봄바람을 일으키는 녹색운동의 잔다르크로 사람들 마음에 새겨져 있다”며, “만약 인류가 앞으로 200년을 더 버틸 수 있다면, 페트라 켈리와 잔다르크를 아주 닮은꼴의 여성으로 분류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아울러 이들에게는 단 하나의 차이점이 있을 뿐이라고 덧붙인다. “잔다르크가 한 민족을 구하는 싸움의 선봉에 섰던 데 비해 페트라 켈리는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명을 구하는 싸움의 선봉에 섰던 여성이라는 점일 것이다.”

거의 처음으로 국내에 페트라 켈리의 삶과 실천을 본격 소개한 단행본인 모니카 스페어의 『녹색혁명가 페트라 켈리』(나남출판, 1994)의 표지에도 “반핵?환경운동의 잔다크”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그런데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으로 먼저 물망에 올랐을 법한 제목에서는 또다른 비유 대상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시몬느 베이유다. 1994년 2월 28일을 발행일로 하는 이 책에는 1994년 3월 현재 이 책이 속한 총서의 목록이 실려 있다.

그런데 목록에 있는 모니카 스페어의 책은 ‘나남신서’ 311번으로 이 책과 총서 일련번호는 같지만 제목과 번역자는 다르다. 책 뒤쪽 ‘나남신서’ 목록에 있는 제목은 ‘불꽃여자 페트라 켈리’이고, 한성자?두행숙 번역으로 돼 있다. 환경운동연합 편으로 돼 있는 실제의 책은 번역자 이름은 따로 명기하지 않고 머리말에서 “모니카 스페어의 『페트라 켈리, 경악 속에 등장한 여류 정치가』를 번역한 한성자, 두행숙 두 분 선생님의 값진 노고에 힘입었음을 밝혀 둔다”고 했다.

또한 나남출판의 1996년판 도서목록의 『녹색혁명가 페트라 켈리』에 대한 설명글에서도 시몬느 베이유의 기운이 읽힌다. “세계가 탈냉전의 시대에 접어들고 환경의 중요성이 절실하게 부각되고 있는 이즈음, 반핵?환경운동의 잔다크 ‘불꽃여자 페트라 켈리’의 죽음이 정치적 좌절감 때문인지, 바스티안과의 25년 나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사랑의 좌절감 때문인지, 한 시대를 풍미한 여성운동가의 죽음은 어쩌면 영원한 수수께끼로 우리들의 머리에 남을 것 같다.” 혹자는 그녀를 ‘녹색당의 마더 테레사’라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페트라 켈리는 잔다르크나 시몬느 베이유, 테레사 수녀보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제인 구달에 더 가깝다. 페트라 켈리가 선뜻 로자를 연상시키는 것은 그녀가 룩셈부르크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지만 로자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아서다. 잔다르크 역시 비극의 주인공이긴 해도 그녀에게는 성스러운 순교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200년 후에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페트라 켈리는 아직은 동시대의 인물이다.

새라 파킨의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김재희 옮김, 양문, 2002)와 페트라 켈리의 『희망은 있다- 평화로운 녹색의 미래를 위하여』(이수영, 달팽이, 2004)는 마치 페트라의 10주기와, 그녀의 삶과 실천을 다룬 최초의 한국어판 출간 10년에 맞춰 번역된 것 같다. 그런 만치 이 두 권은 그 10여 년간의 공백이 가져온 페트라에 대한 증폭된 궁금증을 속시원히 풀어 준다. 그런데 짧게 잡아도 8년 동안(1994-2002)이나 페트라 켈리의 삶과 실천이 한국의 생태?환경 담론과 운동에 시사점을 던질 기회가 없었다는 것은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더구나 그 시기 이 땅의 생태?환경주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지 않았던가. 1997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의 출간을 계기로 일기 시작한 스콧 니어링 열풍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페트라 켈리가 우리 나라의 환경 운동판으로부터 환대 받지 못하고 생태친화적인 독자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측된다. 우선, 페트라 켈리가 ‘지나치게’ 정치적이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필자는 페트라가 1983년, 독일 연방 의회에 최초로 진출한 녹색당 소속의 27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8년 동안 독일 연방 의원 생활을 했다는 것은 이번에 비로소 알았다. 페트라는 현실 정치인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정치와 정치인을 향한 무의식적인 혐오감을 그녀 쪽으로 발동케 한 건 아닐는지.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만 해도, “한국전쟁은 1955년 종식되었”다는 본문 내용과 그녀가 비폭력 평화운동가의 반열에 든 것이 아니라 “열반에 올라섰다”는 책 날개의 실수가 약간 거슬리기는 하나, 이 책의 가장 큰 실책은 저자의 머리말에 이어, 쓸데없이, 현역 국회의원의 추모사 형식의 추천사를 덧붙인 점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녀의 사생활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요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필자는 리뷰 대상의 사적인 생활에는 관심이 없을뿐더러 아예 언급 자체를 꺼리고 있다. 사생활이 공적인 영역과 얽혀 있는 페트라 켈리는 부득이한 경우라고 하겠다. 독일 녹색당은 기존 ‘정당에 반대하는 정당’을 표방했지만 어느 면에서는 아마추어 운동권 정당의 티를 벗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동료간의 연애를 권장하지는 않았어도 묵인 내지 방조한 것은 그 한 예다.

더구나 페트라 켈리는 동년배보다 나이든 남자에게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네덜란드 출신의 유럽연합 위원장 시코 만스홀트와 짧은 만남이 그랬고, 나토군 사령관을 지낸 독일 장성 게르트 바스티안과의 긴 만남이 그랬다. 하지만 결혼 안 한 처자가 누굴 만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페트라의 상대 남자는 대부분 기혼자였으니 더 무슨 말을 하랴! 문제는 페트라의 노년 남자 선호에 권력지향적 측면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페트라의 생활 원칙 중 하나라는 ‘맨 위로 곧장 올라가는 일’은,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고위층에 줄을 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다. 새라 파킨의 표현대로 “개인이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 “주저 없이 맨 위로 올라갈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라면, 전두환 같은 독재자도 얼마든지 혁명가일 수 있다. 그가 하루아침에 야간 통행금지를 없애듯이, 국가보안법 폐지도 권좌에 오른 파시스트에 의한 그런 식의 시혜로나 가능하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건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페트라 켈리의 의정 활동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의원의 활동 기간을 제한하는 녹색당의 방침을 어긴 것이다. 녹색당은 독일 연방 의회에 진출하면서 의원 임기 4년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다른 사람이 맡기로 했으나 페트라만 의정 활동의 연속성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키지 않았다. 새라 파킨은 이와 관련한 정황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은 채 페트라에게 온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수천 명을 살육하고 정권을 잡은 독재자도 연임을 하지 않은 것은 치적이 되는 판이다. 정치인은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

그래도 새라 파킨의 책은 페트라 켈리의 삶과 실천을 이해하는데 아주 유용하다. 평전과 전기는 아무리 잘 씌어졌어도 웬만한 자서전을 따라오기 어렵다. 그렇지만 평전과 전기의 주인공과 생전에 교분을 나눈 사람이 제대로 쓴 것은 시원찮은 자서전보다는 한참 윗길에 놓인다. 알리스 셰르키의 『프란츠 파농』(실천문학사)이 그렇고, 새라 파킨의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가 그렇다.

앞에서 나는 페트라에 대해 다분히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했으나, 이것은 나의 오해의 산물일 가능성도 있다. 사실 나는 그녀에 대해 오해 아닌 오해를 했다. 새라 파킨은 페트라 켈리를 미지의 인물로 다가서는 독자에게 오해를 갖게 한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그 오해는 어느 순간 풀리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어떤 오해가 풀렸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것은 “침침하고 둔탁한 독일 정치계를 들쑤셔놓을 수 있었던 비장의 요인”이었다는 페트라의 “넘치는 정열과 감성 그리고 무엇보다 거침없는 솔직함”을 체감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맥락이다. 페트라 켈리는 사상가보다는 실천가나 행동가 쪽에 가까운 인물이다.

새라 파킨은 페트라가 1972년 무렵부터 “분명한 페미니스트의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다”고 본다. 이 책은 에코페미니즘까지 가진 않더라도 페미니스트적 시각이 곳곳에 있다. 우리말 옮긴이가 “온전함이란 상처 없음이 아니라 치유되었음이라 믿는 에코페미니스트”라 그런지 몰라도 페미니즘적 관점이 묻어나는 대목은 더욱 생동감이 있다.

또,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에서는 독일(인)의 특성에 관한 직간접 인용이 눈길을 끈다. 30년전쟁이 ‘현대독일의 실존적 재앙의 뿌리’라는, 콜 수상 재임시 역사고문 노릇을 했던 보수적 역사학자 미하엘 슈튀르머의 인식은 그 하나다. 이는 독일인의 ‘불안증’, 곧 머지않아 재앙이 닥칠 것 같아 안절부절못하는 심리적인 성향은 1616-1646년에 치러진 30년전쟁의 기억으로 거슬러 오른다는 진단이다. 여기에다 슈튀르머는 이런 견해를 덧붙인다.

“독일인의 지독한 엄밀성 역시 여기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뭐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의 방향을 인간 능력으로 가능한 한 모두 계산해 놓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향을 갖게 되었다.”

독일 녹색 정치 운동의 일원이자 페트라의 책을 펴낸 출판사의 대표이기도 한 프라이무트 두베가 분석한 독일인의 티베트 선호 심리도 흥미롭다.

“두베의 말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이 나라의 묘한 매력에 사로잡히곤 하는데, 이는 꼭 불교나 그 문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위로 덮인 그 땅이 아마도 세상의 중심일지 모른다는 개념으로, 뭔가 ‘저 위에 있는 세계’ 같다는 느낌 때문에 독일인들은 철학적 혹은 정서적으로 티베트에 대해 진한 동경을 갖는다고 한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아마 땅과 하느님의 관계를 잘 알 것 같은, 그 땅은 그런 곳이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희망은 있다』는 지금으로선 하나뿐인 페트라 켈리의 한국어판 저서다. 내용과 편집이 다소 산만한 것이 아쉽기는 해도 페트라의 육성을 듣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과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는 같은 사진이 여러 장 들어 있는데 어떤 사진은 캡션이 서로 다르다. “1983년 본 연방의회 사무실. 문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마틴 루터 킹 포스터가 붙어 있다”( 『희망은 있다』)보다는 “독일연방의회 입성 직전 브뤼셀 아파트 서재에서, 1983년”이 사진 설명으로 맞는 것 같다.

『녹색 세상을 꿈꾼 여성 정치가 페트라 켈리』(홍당무 글?안창숙 그림, 파란자전거, 2003)는 주로 새라 파킨의 책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약간 가미한 어린이를 위한 페트라 켈리 전기다. 『녹색혁명가 페트라 켈리』에서는 마르크스의 딸들이 작성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받은 설문과 비슷한 질의 응답이 이채롭다. 페트라 켈리는 기발하고 익살스럽게 대응한 다른 의원들과 달리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의 질문지에 정직하게 답했다고 한다.

'얼치기 생태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나름대로 절박한 심정으로 생태?환경 운동과 담론에 관심을 기울일 적에도 한편으로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생태?환경주의가 대안적 철학이나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여전히 인류의 바람직한 삶과 앞날을 설계하기 위한 대안적 논의의 하나로는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페트라 켈리는 전인미답의 분야에 뛰어들어 새 이정표 마련의 정초 작업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제인 구달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페트라 켈리가 빌리 브란트와 함께 현대 독일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라거나, 유럽 명망가 100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거나, 영국 신문 〈선데이 타임즈〉의 ‘20세기를 움직인 1000명’에 선정되면서 존 F. 케네디와 나란히 사진이 실렸다는 따위의 대중적 명성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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