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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우리를 보는 대로 우리 자신을 보게 하는 디즈니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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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1942∼ )이 벨기에 태생의 사회학자 아르망 마텔라르와 함께 펴낸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 (새물결, 2003년)의 번역 출간은 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 책은 1971년 칠레 혁명의 와중에서 디즈니 만화에 대한 반격의 일환으로 키만투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칠레 원주민인 마푸체 인디오말로 '지식의 빛'을 뜻하는 키만투는 선거를 통해 집권한 민중 연합당 정부가 칠레의 민중문화를 다시 살리기 위해 칠레 최대의 출판사였던 시그사그사를 인수해 출범시킨 관영 출판사다. 이 출판사를 통해 아옌데 정부는 대중의 의식을 일깨우는 책들을 만들어 저렴한 가격으로 보급했는데 대안적이고 진보적이며 혁명적인 만화 『카브로 치코』도 그중 하나였다.

『카브로 치코』는 키만투의 아동물과 교육출판물 분야에서 일하던 도르프만과 매스 미디어 조사 및 평가부장인 마텔라르의 합작품이었고, 『카브로 치코』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월트 디즈니의 만화에 담긴 반민중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폭로하는 『도널드 덕,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공저하기에 이른다.

이 책은 1973년 9월 11일 미국 중앙정보국을 등에 업은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가 무너지기까지 12쇄를 찍었다. 피노체트의 군사독재 치하에서는 이 책의 판매와 발행이 모두 금지되었지만 20여 개 언어로 번역돼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일본어판은 1983년에 나왔다.

이 책의 한국어판이 주는 '늦은 감'은 원서와의 32년의 시차에서 연유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겨냥한 디즈니로 상징되는 미국 대중문화의 공세가 지금은 다른 양상을 띠고 있고, 이 책의 분석틀인 마르크스주의는 유행 열병처럼 한바탕 우리를 훑고 지나간 한참 후이기 때문이다.

"1975년 7월 15일 월요일 아침 8시 30분에 방콕의 시청자들은 미국산 연속극 세 편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 있다. <맨헌트〉〈FBI〉그리고, 〈크리스티에게 사랑을〉이 바로 그것이다. 테헤란의 시청자들은 토요일 밤에 한 채널에서는 〈가족 이야기〉와 〈우리 생애의 나날〉, 그리고 또 다른 채널에서는 〈대담한 자들〉과 〈코작〉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예들은 정선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타이에서처럼 일요일 아침에 레슬링 시합(현지 제작물)과 디즈니 영화 한 편 또는 〈하와이 파이브 제로〉중에서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디즈니 만화 컷의 '공정한 사용'을 둘러싼 논란을 정리한 권말 부록에 인용된 각국의 TV 프로그램 편성에 관한 조사 보고서의 일부다. 같은 시기 우리나라 방송의 편성 현황도 태국이나 이란의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시절 우리도 TV를 켜면 〈형사 콜롬보〉〈보난자〉〈5-0 수사대(하와이 파이브 제로)〉〈디즈니랜드〉 따위의 미국산 연속극을 주시청 시간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적어도 이란과 한국에서는 미국의 방송 콘텐츠가 더 이상 예전의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정권이 들어선 이란의 방송에서는 미국의 TV물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우리나라의 방송에서도 미국의 시리즈물은 주시청 시간대에서 밀려났다.

우리나라 방송의 미국 방송에 대한 직접적인 의존도는 현저하게 낮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해외 뉴스의 취사선택에서 보듯 간접적인 의존도는 더욱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미국의 TV 콘텐츠가 맥을 못 추는 한국과 이란에서 할리우드 영화의 기세가 주춤하고 있는 형편은, 한국은 스크린쿼터제에 힘입은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직접적인 생물학적 생산과 직접적인 경제적 생산이 동시에 부재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양자 공히 모든 물건의 진정한 생산자인 노동자 계급과 계급 투쟁을 제거하려는 지배 이데올로기 구조와 일치하며, 이를 강화한다."

디즈니 만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생산이 없는 소비를 지적한 구절은 우리에게도 꽤 익숙한 어법을 따른다. 또, 디즈니의 세계가 "부르주아 계급은 독자들이 필연성의 영역을 통과하지 않고서도 자유의 영역에 이를 수 있도록 만들어 왔다"는 표현은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라는 마르크스주의 기율의 패러디로 읽히기도 한다. 비록 이 책이 철 지난 분석틀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책에 담긴 메시지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저자들이 내린 결론은 여전한 설득력을 갖는다.

"디즈니를 공격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는 과거에도 종종 상상력의 외판원, '미국식 생활 양식'의 선전꾼, '비현실'의 대변인이라는 것이 폭로된 바 있다. 비록 사실이기는 하나 그러한 비판은 디즈니가 동물 캐릭터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진짜 저의, 그리고 이들이 칠레와 같은 종속국에 가하는 진정한 위험을 놓치고 있다. 그의 캐릭터들이 위협적인 것은 이들의 '미국식 생활 양식'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들이 '미국식 삶의 꿈'을 구현하는 데서 생겨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미국이 꿈꾸고 스스로를 구원하며 그런 다음에는 다름 아닌 자신의 구원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꿈을 강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이것은 종속국에게 위험천만하다. 우리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이 우리를 보는 대로 우리 자신을 보도록 만드니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디즈니의 나라인 미국에서는 정식 출판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영어판조차 1,500부만이 우여곡절 끝에 반입될 수 있었다. 저작권법 상의 '공정한 사용'을 둘러싼 논란에서는 용케 위법의 혐의를 벗기는 했으나, 구시대의 유물이랄 수 있는 미국 저작권법의 제조 및 반입 관련 조항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부록 「도널드 덕 대 칠레 사회주의-'공정 사용'과 관련된 대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도르프만은 시·소설·희곡 같은 문학 장르는 물론이고 문화비평까지 소화해내는 다재다능한 작가이다. 헌데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한 편의 연극을 통해서다. 도르프만의 희곡 「죽음과 소녀」는 칠레의 군사독재 이후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의 문제점을 다룬 작품으로 추리 기법을 적극 활용해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 점이 특징이다.

변호사 훼라드로는 대통령과 면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자동차가 펑크 나 곤경에 처하지만, 의사 미란다의 도움으로 아내 파울리나가 있는 해변가 별장에 무사히 도착한다. 예비 타이어를 갖고 한밤중에 별장을 다시 찾은 미란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파울리나는 그가 자신을 고문하고 성폭행한 사람임을 직감한다. 파울리나는 남편과 함께 술 취한 미란다를 의자에 묶고 총으로 위협하며 자백을 강요한다. 훼라르도가 아내의 행동을 말리는 한편으로 미란다의 변호를 떠맡게 되면서 펼쳐지는 세 등장인물의 미묘한 관계가 극의 핵심을 이룬다. 제목은 미란다가 파울리나를 고문하면서 틀었던 클래식 음악에서 따왔다. 〈죽음과 소녀>는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곡이다. 이 연극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우리에게는 '시고니 위버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번역된 도르프만의 소설집과 시집도 「죽음과 소녀」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우리집에 불났어』(창작과비평사, 1998년)에 실려 있는 11편의 단편소설은 하나같이 칠레의 정치현실에서 출발한다. 표제작은 어린이의 눈을 빌려 칠레의 살풍경한 상황을 그렸고, 「횡단비행」은 독재에 항거하는 비밀조직원의 아주 간단한 임무를 소재로 공포에 관한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독재체제의 가부장적 요소를 그린 「뿌따마드레」에서는 칠레 군사독재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여론이 인상적이다. 칠레 해군사관학교 생도인 뿌따마드레는 선상실습선 에스메랄다호를 타고 태평양을 거슬러 오르지만 이들에 대한 주변국의 반응은 냉담하다. 콜롬비아, 에콰도르, 멕시코 등지에서 에스메랄다호는 입항을 거부당한다. 칠레 군사독재의 후견인인 미국 시민의 반응 또한 냉랭하기는 마찬가지다.

샌프란시스코에 내린 칠레 해사 생도들은 동맹국 여대생인 붙인 포스터에서 당혹스런 문구와 마주한다. "고문(拷問)의 배를 저지하라, 칠레를 보이코트하라." 그들을 향한 냉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뱃사람을 상대로 하는 여인들도 그들을 거부한다. 이밖에 피의자 신분인 의사의 절박한 의료 '상담'을 그린 작품이나, 정치적 견해차가 부부간의 반목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묘사한 「외로운 이들의 투고란」도 잘 빚은 단편이다. 그렇지만 『우리집에 불났어』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은 검열관의 갈등을 그린 「독자」가 아닌가 한다. 「독자」에서 도르프만은 대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준다.

도르프만의 시집 『싼띠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창작과비평사, 1998년)에 실린 시 한 편을 읽어 보자. 제목은 「방금 버스를 놓쳐서 회사엔 좀 늦겠습니다」이다.

당신을 위해 통곡하려면 내 눈으로 오줌을 눠야 하리라
침을 흘리고, 땀을 흘리고, 한숨을 쉬어야 하리라 내 눈으로
폭포수를 쏟고
포도주를 부어내고
짓이겨진 포도처럼 죽어야 하리라
내 눈으로
독수리를 내뱉고 담즙빛의 침묵을 토하고
짐승들한테 좋은 것도 아니고
전리품으로도 쓸모없는
말라 비틀어진 살갗을 벗어던져야 하리라
나는 이 상처를
이 전쟁을
통곡해 알려야 하리라
우리를 애도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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