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코네티컷 단풍처럼 알록달록한 그녀들 이야기 - 〈길모어 걸스〉

로리의 엄마인 로렐라이 길모어에 대해서는, 열여섯 살짜리 고등학생이 낳은 아이니 애가 애를 키우는 셈이고 그 좋은 시절을 애 키우느라 보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그 나이에 참 큰 보람을 이루어냈구나 하는 판타지에 빠지게 될 정도입니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미국 동부지역을 차로 여행하는 가장 좋은 루트는 그 유명한 95번 고속도로를 타는 것입니다. 동부의 유명 관광지나 도시의 90퍼센트 이상이 미국의 최북단인 메인 주에서 최남단 플로리다까지 관통하는 95번 고속도로와 30분 거리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메인 주에 사는 열혈 야구팬이 메이저리그 스프링 캠프를 보기 위해 플로리다에 간다거나, 아이비리그행에 성공한 고등학생들이 입시 준비할 때보다 더 치열할 대학생활을 앞두고 마지막 방종을 경험해 보고자 마이애미행을 결정했다면, 95번 고속도로를 타고 내리 3박 4일 정도를 쉬지 않고 운전하면 목적지에 가닿을 수 있지요.

이 95번 고속도로로 진입 가능한 여러 도시 중에서도 특히나 미국 드라마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는 구간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뉴욕까지의, 차로 3~4시간 걸리는 구간입니다. 〈보스턴 리갈〉, 〈앨리 맥빌〉의 도시 보스턴과 〈섹스 앤 더 시티〉, 〈로 앤 오더〉, 〈위드아웃 어 트레이스〉의 도시인 뉴욕이 메트로폴리스에서 벌어지는, 주로 형사나 변호사들과 같은 전문직 종사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면, 그 중간에 끼어 있는 작고 한적한 마을들은 미국 동부인들의 생활양태에 근거한 패밀리 드라마의 배경으로 자주 이용됩니다. 보스턴 근교의 한적한 해안 도시인 케이프사이드를 배경으로 하는 〈도슨의 청춘일기〉나 코네티컷 페이뷰의 위스테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위기의 주부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2000년 첫 방송을 시작한 〈길모어 걸스〉 또한 코네티컷의 작은 마을인 ‘스타스 할로우’를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주민 숫자가 입구의 지명 입간판 밑에 지그시 적혀 있는 이 마을은 아직 신호등도 없어서 사람들과 차량이 암묵적인 눈인사로 적당히 대화하는 곳이며, 미국의 여느 시골마을처럼 초고속 인터넷보다는 다이얼-업 모뎀이나 쓸까 말까한 곳이고, 이웃집 고양이가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조문을 오는 곳이며, 시시콜콜한 가십은 한 시간 정도면 온 마을 사람들에게 퍼지는 곳입니다. 따져봐야 아무런 상관은 없지만 바로 뒤 책장에 ‘마이클 길모어 저,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의 『내 심장을 향해 쏴라』 1, 2권이 나란히 꽂혀 있는 바, 둘러대는 김에 무라카미 하루키식으로도 표현해 보자면, 〈트윈 픽스〉 종영 기념 도넛 파티가 그해 6월의 가장 큰 마을 행사일 법한 미국 동부의 전형적인 스몰 빌리지가 바로 스타스 할로우입니다.

그러니 그런 작은 마을에 구경거리가 뭐가 있겠느냐고 한다면, 위에서 이미 몇몇 들었듯이 반증할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방인이 사나흘 머물며 재미를 보기에는 아무래도 대도시가 낫겠지만, 심심하기만 할 것 같은 작은 마을 풍경이 그곳을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로 꾸며져 나온 드라마를 보자면 일종의 평온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유혈 낭자한 역사의 소용돌이와 우주 속의 처절한 생존투쟁, 날로 사악하고 극악해져 가는 범죄자들의 두뇌와 맞서야 하는 수사관들의 고충을 내내 보다가, 또 똑같이 작은 마을을 그리고 있으되 〈트윈 픽스〉〈위기의 주부들〉에 등장하는 음모의 자취조차 없는 착한 드라마를 군데군데 끼워 넣어서 보고 있자면 달콤하기 짝이 없는 잠 같은 안도감이 들기도 하겠지요. 너무 험한 것만 보아온 탓일까요? 어찌 보면 그 착함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부분이 비현실적이냐 하면 주인공인 길모어 모녀의 관계랍니다. 엄마와 딸 사이만큼,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말도 안 될 정도로 큰 기대를 걸고 위안을 찾으며 기댈 수 있는 관계는 없을 듯합니다. 언제든지 잘만 풀린다면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사이이기에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이기도 하고요. 하물며 엄마가 이 세상의 거의 전부인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젠 철 좀 들 만한 나이의 다 자란 딸도 아니고, 틴에이저 딸과 엄마의 관계가 그토록 비옥하다는 것은 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쯤 됩니다.

열여섯의 고등학생이 임신하여 낳은 딸이 열여섯이 되는 시점에서 이 드라마는 시작됩니다. 딸 로리 길모어는 저런 딸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낳아서 키우겠다는 생각이 어지간한 사람이면 절로 들 만큼 예쁜 짓 덩어리에, 엄마 로렐라이 길모어의 PPL격의 비유를 빌리자면 “혼다자동차처럼 거의 말썽이 없어 손이 가지 않는” 명민한 아이지요. 로리 길모어는 맥컬리 컬킨과 장난기 가득한 입매가 닮은 알렉시스 블레델이 분하고 있습니다. 싱글 맘 슬하에 자라면서, 까지지는 않았지만 책벌레에 조숙하고 영민한 그런 전형적인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 내고 있습니다. 로리는 인생의 목표가 하버드에 가는 것이되, 목표와 그것을 이루겠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가족과 친구들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 속 깊고 사랑스러운 캐릭터 그 자체지요.

로리의 엄마인 로렐라이 길모어에 대해서는, 열여섯 살짜리 고등학생이 낳은 아이니 애가 애를 키우는 셈이고 그 좋은 시절을 애 키우느라 보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냐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그 나이에 참 큰 보람을 이루어냈구나 하는 판타지에 빠지게 될 정도입니다. 2000년에 시리즈가 시작되었으니 로리가 대학을 가고도 남을 시간이 지났는데, 결국 로리가 하버드에 가게 되느냐 하는 것은 직접 보아야 알게 되실 테지요. 다만 코네티컷에서 하버드까지는 2시간 남짓 걸리므로 통학하기에는 좀 먼 거리가 되겠습니다.

엄마인 로렐라이 길모어 자신도 학창시절에는 우수한 학생이었고 학문의 꿈을 드높이 품고 있었으나,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진로를 전면 수정해야 했던 인물입니다. 로렐라이는 코네티컷의 부유한 사교계 인사이면서 자신을 통제하려 들었던 부모님과 반목을 지속하던 끝에 아이를 낳아 부모가 바라는 인생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자기가 자랐던 것과는 다르게 아이를 키우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신념과 기준이라고는 ‘아무런 신념과 기준 없이 무조건 자유롭게만 키우면 된다’는 것밖에 없어서, 자식들로부터 오히려 조롱을 받는 60년 세대의 부모와는 또 다른 원칙과 현명함으로 딸과 교류합니다.

다만 〈다마 & 그렉〉의 다마 캐릭터를 별로 다른 점 없이 리바이벌한 듯한 캐릭터가 개인적으로는 딸 로리 역할보다 신선함이 좀 떨어진다 싶기는 합니다. 〈길모어 걸스〉를 보면서 이번 기회에 생각해 보니, 조숙한 자식과 허술한 데가 많은 엄마라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수도 없이 써먹은 구도 자체가 어른스러운 아이에게 더 매력이 씌워지게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벤치마킹하는 듯한 차림새로 언제까지나 얼어붙어 있을 것만 같은 또 다른 길모어 걸 에밀리 길모어는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자식과는 달리, 무조건 예뻐해 주기만 하면 되고 또 무조건 예쁘기만 한 손녀와의 관계에서 기쁨을 되찾아 나가면서 자신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하고 드러냅니다. 그렇게 보면, 자기 세계에 대해 가장 완강한 사람은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의식적으로 자유를 꿈꾸던 로렐라이 길모어이군요.

〈프렌즈〉에서 뚱뚱한 모니카를 그대로 가져다가 아예 캐릭터로 정착시킨 듯한 수키, 뉴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라면 빠질 수 없는 무뚝뚝하고 심통 맞은 캐릭터이나 로렐라이에게는 순정을 보이는 루크, 문자 그대로 시대별 록 뮤직을 모조리 섭렵하는 한국계 미국인이자 로리 친구인 레인 김, 올누드로 깎은 헤어스타일이 왠지 〈스타트렉〉의 스팍을 연상시키는 ‘인디펜던스 인’의 프런트 담당 미셸에서부터 자타칭 마을의 이장 선생님인 테일러, 스타스 할로우의 공식 확성기인 패티, 아다치 미츠루 만화에서 만화가 아다치처럼 중간 중간 등장해서 화면을 전환하는 거리의 악사까지, 고만고만하고 이런저런 괴짜들이 거짓말 별로 안 보태고 〈섹스 앤 더 시티〉의 물경 두 배가량에 해당하는 대사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며 지긋지긋하고 정겹고 때론 성가시기도 하며 모든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알아주는 마을의 분위기를 이끌어갑니다.

아무리 인구 만 명이 안 된다지만 스타벅스와 맥도널드 하나 눈에 띄지 않으며, 월마트나 반스 앤 노블 하나도 없는, 자그마한 그 옛날의 식료품 가게가 서점과 함께 유쾌하게 버티고 있는 마을 스타스 할로우에서 간만에 포근한 판타지를 느껴봅니다.

관련 상품 보기

『길모어 걸스 시즌 1』 워너브라더스 | 원제 Gilmore Girls: The Complete First Season | 2006년 01월
길모어 걸스>는 2000년 10월 5일 미국에서 첫 번째 에피소드 “파일럿”이 방송된 후로 현재 ‘시즌 6’이 한창이다. 2005년 10월 25일에 방송된 ‘시즌 6’의 일곱 번째 에피소드 “21은 너무나 고독한 숫자”에 ‘매들린 울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출연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처럼 <길모어 걸스>는 각계각층의 관심을 얻고 있는 인기 TV 시리즈 중 하나이다.

‘시즌 1’은 모델 매니저로 일하여 친구 수키(밀리시아 메카시)와 함께 그들만의 모델을 운영하려는 꿈을 키우는 로렐라이와 명문 사립학교인 칠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하버드 진학의 꿈을 키우는 로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기 때문에 서로의 옷과 화장품을 나눠 쓰기도 하고 둘 다 ‘조니 미첼’의 음악을 좋아하는 등 관심사도 비슷하다. 여기에 엄마 로렐라이의 로맨스, 그리고 딸 로리의 로맨스가 적절하게 조화되면서 갈등 속에 피어나는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5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수많은 사랑의 사건들에 관하여

청춘이란 단어와 가장 가까운 시인 이병률의 일곱번째 시집. 이번 신작은 ‘생의 암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사랑에 관한 단상이다. 언어화되기 전, 시제조차 결정할 수 없는 사랑의 사건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아름답고 처연한 봄, 시인의 고백에 기대어 소란한 나의 마음을 살펴보시기를.

청춘의 거울, 정영욱의 단단한 위로

70만 독자의 마음을 해석해준 에세이스트 정영욱의 신작. 관계와 자존감에 대한 불안을 짚어내며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결국 현명한 선택임을 일깨운다. 청춘앓이를 겪고 있는 모든 이에게, 결국 해내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전하는 작가의 문장들을 마주해보자.

내 마음을 좀먹는 질투를 날려 버려!

어린이가 지닌 마음의 힘을 믿는 유설화 작가의 <장갑 초등학교> 시리즈 신작! 장갑 초등학교에 새로 전학 온 발가락 양말! 야구 장갑은 운동을 좋아하는 발가락 양말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호감은 곧 질투로 바뀌게 된다. 과연 야구 장갑은 질투심을 떨쳐 버리고, 발가락 양말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위기는 최고의 기회다!

『내일의 부』, 『부의 체인저』로 남다른 통찰과 새로운 투자 매뉴얼을 전한 조던 김장섭의 신간이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되며 찾아오는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저자만의 새로운 투자 해법을 담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 삼아 부의 길로 들어서는 조던식 매뉴얼을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