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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은 낡지도, 순진하지도 않습니다 - <호텔 르완다>

<호텔 르완다>를 보셨는지요? 94년 르완다의 인종청소 때 자기가 일하던 호텔에서 1500명의 사람들을 살려낸 호텔 지배인의 이야기입니다. 르완다 버전 <쉰들러 리스트>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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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버전 ‘쉰들러 리스트’,
<호텔 르완다>
<호텔 르완다>를 보셨는지요? 94년 르완다의 인종청소 때 자기가 일하던 호텔에서 1500명의 사람들을 살려낸 호텔 지배인의 이야기입니다. 르완다 버전 <쉰들러 리스트>라고 할 수 있겠죠. 좋은 이야기이고 영화도 좋으며 주인공인 폴 루세사바기나를 연기한 돈 치들의 연기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태생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유럽계 백인감독이 만든 영국 영화라는 것이죠. 아뇨, 할리우드 영화는 아닙니다. 북아일랜드 출신의 감독이 만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이탈리아 합작인 영국 영화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다들 할리우드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는 <플라이트 93>도 아일랜드 감독이 영국에서 대부분을 찍은 워킹 타이틀 영화입니다. 두 영화 모두 시작되기 전에 영국 등급 위원회가 찍은 등급 표기가 뜨니 확인해 보시길.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플라이트 93>의 경우 그 미묘한 차이를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죠.

<호텔 르완다>의 경우는 미국의 이야기를 다룬 <플라이트 93>만큼 미묘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대해 만든 영화죠. 이게 나쁜 걸까요? 원칙적으로는 아닙니다. 이야기꾼에겐 소재를 고를 권리가 있지요. 이 영화의 감독이고 공동각본가인 테리 조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린 이 권리를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않습니다. 수백 년에 걸친 유럽인들과 아프리카인들의 긴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되죠.

무시할 수 없는 역사입니다. 잊어버려서도 안 되고요. 하지만 전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관련 주제를 다루는 사람들의 방식이 필요 이상으로 기계적이 되어 있다고 느낍니다.

로저 이버트는 별 넷을 준 <호텔 르완다> 평에서 르완다에서 인종청소가 일어난 원인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 평론가들로부터 이 영화를 보호하고 옹호했습니다. 전 그가 옳다고 느낍니다. 유럽인들에게 부당하게 침탈당한 아프리카의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프리카 소재를 다룬 모든 이야기에서 유럽인들이 뿌린 악의 근원만을 찾으려는 건 지나치게 서구적인 관점입니다. 거의 그들의 나르시시즘이죠. 아프리카인들에겐 자기만의 이야기가 없습니까? 지금 그들은 자기 역사의 주체가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전 <호텔 르완다>가 인종 청소의 근원을 입체적으로 밝혀야 했다는 주장은 그냥 게으르다고 봅니다. 여러분은 몇 백 년의 역사와 94년에 살해당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영화 한편을 보고 날로 먹으려 합니까? 이 영화가 중간고사용 전괍니까? 세상엔 인터넷이라는 것이 있고 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읽고 배우고 자기 관점을 세우면 됩니다.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에 약간의 지식을 쌓는 건 영화에 대한 예의일 뿐만 아니라 르완다 국민에 대한 예의이기도 합니다. <호텔 르완다>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닙니다. 극영화가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호텔 르완다>는 휴머니즘 영화입니다. <쉰들러 리스트>가 수천 명의 유태인들을 구한 이교도의 이야기로서 머물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한 사람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것처럼, 폴 루세사바기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의 보편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여전히 그와 르완다의 이야기를 아프리카와 유럽의 엇갈리는 역사의 결과물로만 보려합니다. 왜입니까? 왜 그는 보편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는 걸까요? 그가 아프리카인이기 때문입니까? 그의 피부가 검기 때문입니까?

여기서 전 휴머니즘이라는 단어에 대해 조금 더 매달릴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요새 사람들은 이 단어가 그렇게 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건 사람들이 이 단어와 개념이 낡고 순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며 그들이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그 개념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21세기 초의 세계를 한 번 보세요. 온갖 불쾌한 정치적 도그마와 근본주의 종교들이 이전 세기보다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리는 지금, 휴머니즘은 여전히 날카롭게 날이 선 첨단의 단어이며 개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 어떤 정치적 도그마와도 결탁하지 않으면서도 오로지 인간의 가치만을 보았고 그 결과 그들을 살려냈던 이 다국적 기업 지배인의 이 이야기가 이를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본 매판 엘리트의 분투기’라며 기계적으로 무시하는 로봇 평론가들보다 훨씬 깨어 있고 진보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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