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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월드컵 중계를 보는 것이 싫으시다면...

전 어렸을 때 거의 모든 종류의 스포츠를 증오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어요. 하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은데, 사방에서 고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라고 보라고 협박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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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어렸을 때 거의 모든 종류의 스포츠를 증오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어요. 하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은데, 사방에서 고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라고 보라고 협박했기 때문이죠. 지금도 전 제대로 하거나 좋아하는 스포츠가 거의 없으니, 그쪽이나 저나 시간낭비를 단단히 한 것입니다.

그 중 가장 끔찍한 고문은 텔레비전 채널 독점이었어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공중파 전 방송국이 같은 시간대를 몽땅 스포츠 중계로 채우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지금이야 월드컵 같은 아주 특별한 시즌에나 일어나는 일이지만요. 한마디로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어요. 방바닥을 박박 긁으면서 방송국에 저주를 퍼붓는 수밖에. 언젠가 전 이 현상을 인간의 사악함을 증명하는 증거로까지 이용한 적이 있었어요. 물론 농담이었지만.

지금은? 전 더 이상 상관 안 합니다. 사실 억지로 하거나 보라고 하지 않는다면 제가 스포츠를 증오해야 할 이유는 없지요. 전 그냥 관심이 없을 뿐이니까요.

그동안 제 주변의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체육 시간이 있는 학교에서 해방되었으니 하기 싫은 스포츠를 억지로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채널 독점은 이제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툭하면 평일 시간대를 공격했던 권투는 쇠퇴 중이고 프로 야구나 농구도 공중파에선 이제 거의 안 하죠. 당사자들이나 팬들에겐 실망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전문 채널이 따로 있으니 특별히 놓치는 것도 없겠죠. 공중파에서 독점이 일어나도 상관없어요. 케이블과 위성으로 돌리면 되니까. 아무리 모든 채널이 월드컵 특수를 누리려 해도 성격상 절대로 축구가 끼어들 수 없는 채널 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게다가 텔레비전에만 머물 필요는 없어요. DVD, 인터넷, 게임기… 탈출할 구석은 넘쳐납니다. 우린 참 멋진 신세계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20년 전의 제가 부러움에 이를 박박 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어제 전 조금 짜증이 났습니다. 얼마 전부터 텔레비전에서 광고하기 시작한 DMB 포켓 텔레비전을 사서 실험 중이었기 때문이죠. ‘와, 이제 지하철과 길거리에서도 좋아하는, 아니, 습관적으로 그냥 보는 프로그램들을 볼 수 있다!’ 하며 텔레비전을 탁 켜는 순간… 나오는 건 월드컵뿐이더군요. 어제 한국과 토고가 경기를 했나 봐요? 전 그때까지 몰랐습니다. 왕년의 증오심이 다시 들어찼느냐고요? 아뇨. 잠시 짜증만 났을 뿐이에요. 읽을 책도 있었고 휴대용 게임기도 두 개나 가지고 있었고 몇십 기가짜리 음악 파일들이 넉넉하게 들어 있는 MP3 플레이어까지 있었는걸요. 요샌 지하철 안에서 심심하게 내릴 역만 기다리는 일은 없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물론 저처럼 탈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녁에 연속극을 보는 게 유일한 낙이고 축구에 어떤 관심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겐 어젠 미니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제 충고는? 다른 취미를 가지세요. 관심 영역을 넓혀보시라고요. 그게 매스컴의 독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따지고 보면 당신네들이 그렇게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것도 그 좁다란 영역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고요. 그 중독에서 해방되면 연속극의 질도 훨씬 좋아질 겁니다. 적어도 소재 폭은 넓어질 것이고 지금처럼 자기 중독의 순환에 갇히지도 않겠지요.

이런 말을 할 정도니, 저도 참 관대해지지 않았습니까? 그게 다 여유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린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죠. 선택의 기회가 넓어지면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관대해집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싫어하는 건 얼마 없어요. 관심 없는데도 자꾸 들이밀어 싫은 감정이 생기는 거지. 아무리 저를 제외한 전 국민이 집단최면에 빠진 것처럼 같은 채널을 노려다보며 환성을 지른다고 해도 저에게 빠져나갈 여유만 준다면 전 그냥 좋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사람들도 축제 분위기 속에서 하루를 즐겼다면 좋은 거죠. 어제 즐거우셨나요? 이겼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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