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번역에 대하여

번역은 정보입니다. 그리고 정보는 수집되고 누적되어야 하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 누적은 제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단 도서관 문화가 형편없고 번역의 수명이 짧기 때문이지요. 이런 빈약한 번역 자료들을 찾다 보면 종종 어이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얼마 전에 민음사에서 나온 『오만과 편견』의 새 번역본을 샀습니다. 집에 이미 정음사에서 나온 옛 번역본이 있지만 조 라이트의 영화를 보고 나자 새 번역을 읽고 싶어졌어요. 사실 오화섭 번역본은 단 한 번도 좋아한 적 없습니다. 1장에서 베넷 부인이 뻔뻔스럽게도 “비행기 태우지 마요!”라고 예언적인 선언을 하는 걸 보고 정나미가 뚝 떨어졌었죠. 이어지는 오역들은 둘째로 치더라도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출사표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시작되지요.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못하고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어쩌고저쩌고….”

맞는 말일까요? 글쎄요. 적어도 민음사가 새로 낸 번역본들은 이전 정음사나 을유사의 번역보다 더 정확하고 현대 독자들에게도 쉽게 다가옵니다. 적어도 상대적으로는요. 제가 어렸을 때 밤을 새워가며 읽은 동서추리문고의 번역은 지금 와서 보면 어색하고 성차별적이고 중역 티가 나며 원작을 읽지 않아도 오역인 게 분명한 문장들이 부글거립니다.

그러나 일반론으로 받아들이면 조금 아쉬운 발언이기도 합니다. 결국 번역이란 몇십 년밖에 통하지 않는 일회용에 불과하다는 말이거든요.

여기서 이야기를 잠시 다른 방향으로 틀겠습니다. 정음사나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일본식 세계문학전집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테스』『햄릿』과 같은 뻔한 작품들을 끝도 없이 우려먹은 따분한 서재 장식용 벽돌을 떠올립니다. 그건 대체로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 책들의 작품 선정이 그렇게 뻔했을까요?

한번 검토해봅시다. 정음사의 전집은 아직도 로스탕의 「시라노 드 베르주락」이나 플로베르의 「성 앙트완느의 유혹」, 보마르셰의 「세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과 같은 프랑스 희곡들의 번역을 제공해주는 유일한 소스입니다. 을유문화사에서는 골즈워디의 『포사이트 연대기』나 블라스코 이바녜스의 『묵시록의 네 기사』, 사빙영의 『여병자전』과 같은 책들의 번역을 제공해주고 있고요. 다른 문학전집으로 눈을 돌리면 이보다 더 흥미로운 책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제로 전 어렸을 때 정음사의 오스카 와일드 선집만 읽고 원서 때문에 버벅거리는 영문학과 애들에게 온갖 유식한 척을 다 한 적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낡아빠진 책이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나 「착실함의 중요성」과 같은 희곡들을 담고 있는지 몰랐단 말이에요.

번역은 정보입니다. 그리고 정보는 수집되고 누적되어야 하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 누적은 제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단 도서관 문화가 형편없고 번역의 수명이 짧기 때문이지요. 이런 빈약한 번역 자료들을 찾다 보면 종종 어이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린 몇천 년 동안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던 나라입니다. 당연히 상당량의 번역 자료들이 쌓여 있어야만 해요.

하지만 어떤가요? 실제로는 그 뻔한 『서상기』의 번역 하나 제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 책들의 번역본을 읽으려면 버스 몇 번 갈아타고 저 먼 도서관까지 가야 해요. 위에서 제가 언급한 정음사나 을유문화사의 책들도 마찬가지. 요새 새로 지은 도서관엔 있지도 않더군요.

언제나처럼 전 결론 없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에 대한 해답 같은 건 몰라요. 도서관 전산화와 같은 기술적 대안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번역의 질이 높아지고 번역체가 안정된다면 번역물의 수명이 길어질 수도 있겠죠. 어느 쪽이건 절대적인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원래 만병통치약과 같은 건 없으니까요.

저보고 말하라면 일단 과거의 그 낡아빠지고 고루한 세계문학전집들에 기회를 한 번 더 주라고 말할 겁니다. 사람들이 벽장 장식용으로 사들인 뒤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던 그런 책들에 흥미로운 작은 통로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 한번 확인해보라고요. 하지만 그러려면 제대로 된 도서관이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동네 대여소는 절대로 도와줄 수 없는 문제예요.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5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수많은 사랑의 사건들에 관하여

청춘이란 단어와 가장 가까운 시인 이병률의 일곱번째 시집. 이번 신작은 ‘생의 암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사랑에 관한 단상이다. 언어화되기 전, 시제조차 결정할 수 없는 사랑의 사건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아름답고 처연한 봄, 시인의 고백에 기대어 소란한 나의 마음을 살펴보시기를.

청춘의 거울, 정영욱의 단단한 위로

70만 독자의 마음을 해석해준 에세이스트 정영욱의 신작. 관계와 자존감에 대한 불안을 짚어내며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결국 현명한 선택임을 일깨운다. 청춘앓이를 겪고 있는 모든 이에게, 결국 해내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전하는 작가의 문장들을 마주해보자.

내 마음을 좀먹는 질투를 날려 버려!

어린이가 지닌 마음의 힘을 믿는 유설화 작가의 <장갑 초등학교> 시리즈 신작! 장갑 초등학교에 새로 전학 온 발가락 양말! 야구 장갑은 운동을 좋아하는 발가락 양말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호감은 곧 질투로 바뀌게 된다. 과연 야구 장갑은 질투심을 떨쳐 버리고, 발가락 양말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위기는 최고의 기회다!

『내일의 부』, 『부의 체인저』로 남다른 통찰과 새로운 투자 매뉴얼을 전한 조던 김장섭의 신간이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되며 찾아오는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저자만의 새로운 투자 해법을 담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 삼아 부의 길로 들어서는 조던식 매뉴얼을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