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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양서 리스트를 거부하자!

『데미안』 이라는 책에 특별히 대단한 불만은 없어요. 좋은 책이고 재미있는 책이죠. 선생들이 원하는 것과는 달리 전 거기서 게이 서브텍스트를 찾는 게 더 재미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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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일인데, 당시 학교 선생들은 저에게 조악한 『데미안』 번역본을 상으로 주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제가 뭔가 자잘한 일을 해서 상품을 받으면 십중팔구 책이나 노트였고 책은 십중팔구 『데미안』 이었죠. 받을 때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차라리 그냥 돈이나 도서상품권을 주었다면 동네 서점 구석에 숨어 있던 알프레드 베스터의 『타이거. 타이거』를 살 수 있었을 텐데. 나름대로 책벌레로 알려져 있던 제가 그 책을 정말 안 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도대체 왜 당시 선생들은 『데미안』 을 그렇게 좋아했던 걸까요? 당시 헤세가 꽤 인기 있는 작가이긴 했습니다. 헤세의 문장들을 모아 만든 경구집이 『심야총서』 시리즈로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죠. 하지만 진짜 이유는 아마 “아무런 이유가 없다”일 겁니다. 무슨 대단한 생각이 있어서 『데미안』 에 목을 맸을 리는 없어요. 그냥 이전부터 내려온 안전한 리스트에 실려 있는 책이라 출제 문제를 달달 외우는 것처럼 『데미안』 의 제목을 읊었을 뿐이겠죠.

『데미안』 이라는 책에 특별히 대단한 불만은 없어요. 좋은 책이고 재미있는 책이죠. 선생들이 원하는 것과는 달리 전 거기서 게이 서브텍스트를 찾는 게 더 재미있었지만. 참, 당시엔 바로크 음악에 빠져 있었던 때라 피스토리우스 파트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도 나요. 하지만 당시 『데미안』 이 저의 영혼을 고양시켰거나 미래의 등대가 되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 오히려 그런 기분은 허버트 조지 웰즈의 『타임 머신』을 읽을 때 더 강하게 느꼈죠. 각자의 취향이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헤르만 헤세가 가리키는 길만을 갈 수는 없지요.

여기서부터 전 학교에서 뽑아주는 ‘양서’ 리스트를 온몸으로 거부하라는 캠페인을 벌일 것입니다. 슬슬 여름방학이 다가오니 시기도 대충 맞군요. 이유를 알고 싶습니까?

첫째, 세상엔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뽑아주는 리스트에 실린 몇몇 책들에 묶여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선택이야 말로 독서의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선택함으로서 여러분은 주체적인 독자가 되는 첫 단계를 거치는 겁니다. 그걸 왜 남의 손에 맡겨야 합니까?

둘째, 선생들이나 선배들이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책들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험한 고비를 넘기며 『데미안』 에서 영감을 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프랑스와 모리악의 『예수의 생애』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어떤 사람들에겐 로알드 달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겁니다. 선생들이 그 모든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까요? 어림없습니다. 『데미안』이 꼭대기에 올라가있는 리스트를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사람이라면 일단 자기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합니다. 교양이 풍부하고 자기만의 의견이 분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지식에는 한계가 있죠. 모든 걸 다 조금씩 아는 사람이라면 그 지식의 깊이도 얕을 테니 여러분에게 별 도움이 안 될 거고요.

셋째, 젊었을 때 ‘양서’만 읽으면 마음을 망칩니다. 그건 지적인 편식입니다. 애들이 진흙탕에서 구르고 놀면서 병균에 대한 면역성을 키우는 것처럼, 젊은 독자들은 닥치는 대로 수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정신적 면역성을 키워야 합니다. 게다가 선생들이 말하는 악서들이 정말 악서인지 여러분이 어떻게 압니까? 지금 양서로 추앙받는 수많은 책들은 당시엔 금서들이었습니다. 물론 ‘양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학교에서 양서로 추천받아 읽고 독후감까지 써야 했던 간첩잡기 이야기가 기억나는군요. 클라이막스에서 북한 간첩들이 주인공 여학생에게 마취제를 먹여 기절시킨 뒤 나체 사진을 찍어 협박을 하던가요.... 당시 선생들은 애들한테서 선데이 서울은 압수하면서 이런 이야기는 읽으라고 장려했던 것입니다. 옛날 얘기라고요? 하긴 그렇죠. 그래야 하기도 하고.

리스트는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예지력과 텔레파시 능력이 없는 이상, 읽고 싶은 책들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남의 도움이 필수적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여러분이 덜 주체적이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세상엔 수많은 책들만큼 수많은 리스트들이 있습니다. 그런 리스트를 고르는 능력 역시 유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선생들이 내주는 리스트만 암송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깨우칠 수 없는 겁니다. 학교 양서 리스트의 유일한 가치는 그것을 거부하는 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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