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개똥녀'가 일깨워주는 공포감

전 그게 생각 외로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렇게 방 안에서 ‘당연한 일이지’라고 생각하는 일들 중 실제 일이 닥치면 먹히지 않는 게 상당히 많습니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오늘 전 그 악명 높은 ‘개똥녀’ 사진을 보고 심한 공포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아, 물론 전 그 사람을 옹호할 생각이 없습니다. 전 휴대 전화나 디지털 카메라 같은 건 가지고 다니지 않지만 그런 사람을 보았다면 저도 화가 나서 사진을 찍어 올렸을 지도 모릅니다. 자기 개가 지하철에서 설사를 한 게 꼭 그 사람 잘못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럴 때를 대비해 비닐봉지를 가지고 다니고 그걸 꺼내는 데 실패했다고 해도 뒤처리를 하는 성의를 보여주는 게 상식적인 예의죠. 짜증을 내며 나간다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잘 한 게 없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저 역시 그런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지금 전 개를 키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키운 적이 있었고 단거리지만 전철을 같이 탄 적도 있었어요. 지하철 안은 아니지만 남의 집 앞에서 개의 배설물 때문에 애를 먹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애완견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특정 상황에서 언제나 상식적으로 굴 수 있느냐의 문제죠.

전 그게 생각 외로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렇게 방 안에서 ‘당연한 일이지’라고 생각하는 일들 중 실제 일이 닥치면 먹히지 않는 게 상당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전 몇 년 전에 강남의 모 아이스크림 점에서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오다가 그만 다른 사람을 밀어 그 사람이 막 산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린 적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우물거리고 밖으로 나온 뒤에야 제가 마땅히 그 사람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줘야 했다는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그 땐 당황해서 그런 게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돌아가 보니 누구인지 얼굴을 구별할 수 없었고요. 가끔 전 그 사람이 그날 겪은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생각해봅니다. 큰일은 아니었으니 오래 가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겠죠.

그 개똥녀 사건도 그런 요소가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런 경우 예의와 성의는 그게 당연한 일이어서가 아니라 그게 자신에게 덜 손해 가는 일이기 때문에 취하는 것이니까요. 아마 그 사람도 같은 일을 조금 다른 상황에서 겪었다면 다르게 행동했을 수도 있겠죠. 조금 더 머리가 빨리 돌아가,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 전화 때문에 전 국민의 사진기자화 현상이 벌어졌다는 걸 깨닫고 적당히 예의를 취하며 배설물을 취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따라서 전 이 한 가지 사건으로 그 사람을 100퍼센트 알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판단을 위한 참고 자료는 될 수 있겠지만요.

하여간 그 사람에겐 이미 늦었습니다. 인터넷 이곳 저곳에 맨 얼굴의 사진이 떠돌고 있으니 그 사람의 개인 신상이 밝혀지고 불쾌한 일들이 일어나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초상권은 침해 당했고 인터넷에 부글거리는 욕설들은 오래 전부터 수위를 넘었습니다. 옥션에서 이 사람을 경매에 붙이는 일까지 일어났다고 하더군요. 보통 때 같으면 모두가 저지르는 간단한 경범죄 수준으로 끝날 일이 디지털 사진과 인터넷 덕분에 전 국민의 인민재판이 된 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전 그 사람을 변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아요.(다들 이용하는 지하철에서 그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랍니까?) 하지만 언젠가 이런 일들이 지금 열심히 분노하며 험상궂은 리플들을 남기는 저나 여러분에게 닥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여전히 품고 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일어난 몇 분간의 우발적인 소동 때문에 수십 년간 우리가 쌓아올린 삶이 재평가되고 비난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말이죠.

물론 제가 이런 글을 쓴다고 사태가 특별히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익명으로 리플을 담고 남을 공격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 너무 쉬워요. 이 사진 뒤에 달린 수백만의 리플들을 쓴 사람들 중 그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상식 이하의 일을 했다고 자신을 곱씹어본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그게 또 인터넷이라는 베헤못이 살아 움직이는 방식이기도 하죠. 전 여러분이나 제가 여기에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서운 세상이니 그냥 무서워하며 살아야죠. 제가 이 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여러분에게 그런 공포감을 일깨워주는 것뿐입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2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수많은 사랑의 사건들에 관하여

청춘이란 단어와 가장 가까운 시인 이병률의 일곱번째 시집. 이번 신작은 ‘생의 암호’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사랑에 관한 단상이다. 언어화되기 전, 시제조차 결정할 수 없는 사랑의 사건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아름답고 처연한 봄, 시인의 고백에 기대어 소란한 나의 마음을 살펴보시기를.

청춘의 거울, 정영욱의 단단한 위로

70만 독자의 마음을 해석해준 에세이스트 정영욱의 신작. 관계와 자존감에 대한 불안을 짚어내며 자신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결국 현명한 선택임을 일깨운다. 청춘앓이를 겪고 있는 모든 이에게, 결국 해내면 그만이라는 마음을 전하는 작가의 문장들을 마주해보자.

내 마음을 좀먹는 질투를 날려 버려!

어린이가 지닌 마음의 힘을 믿는 유설화 작가의 <장갑 초등학교> 시리즈 신작! 장갑 초등학교에 새로 전학 온 발가락 양말! 야구 장갑은 운동을 좋아하는 발가락 양말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호감은 곧 질투로 바뀌게 된다. 과연 야구 장갑은 질투심을 떨쳐 버리고, 발가락 양말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위기는 최고의 기회다!

『내일의 부』, 『부의 체인저』로 남다른 통찰과 새로운 투자 매뉴얼을 전한 조던 김장섭의 신간이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되며 찾아오는 위기와 기회를 중심으로 저자만의 새로운 투자 해법을 담았다.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 삼아 부의 길로 들어서는 조던식 매뉴얼을 만나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