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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야기』 트집잡기

어제 이윤기, 이다희 부녀가 쓴 『겨울이야기』의 번역본을 읽었습니다. 지금부터 이 책에 대해 몇 마디 할 텐데, 순전히 트집 잡으려 작정하고 시작한 글이니 이 일방성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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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윤기, 이다희 부녀가 쓴 『겨울이야기』의 번역본을 읽었습니다. 지금부터 이 책에 대해 몇 마디 할 텐데, 순전히 트집 잡으려 작정하고 시작한 글이니 이 일방성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길.

우선 전 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에 대한 농담으로 시작되는 머리말부터 물고 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제인 에어』 소설을 읽는 것과 <제인 에어> 영화나 텔레비전 시리즈를 보는 건 다릅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없지요. 만약 여러분이 케네스 브래나(영국의 연극배우이자 연출자, 영화 <햄릿>에서 감독, 주연을 맡았다;편집자 주)의 <햄릿>을 극장에서 보았다면, 그건 웬만한 번역본을 읽는 것보다 훨씬 셰익스피어를 깊이 체험한 것입니다. 일단 브래나는 원작에서 대사 하나 빼지 않았으니 그 영화는 ‘정본’입니다. 게다가 관객들은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이 실제로 어떤 리듬을 타고 낭송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죠. 번역본 독서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셰익스피어 영화들이 브래나의 <햄릿>처럼 충실한 건 아닙니다만, ‘영화만 봐서는 모른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는 아닙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처럼 셰익스피어 원작과 줄거리만 간신히 공유하는 작품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은 원작의 언어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언어가 배우들의 입을 통해 관객들의 귀에 들려지기 위해 쓰였다는 걸 무시하는 건 아무래도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치중한 셰익스피어 읽기 역시 큰 설득력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셰익스피어를 읽기 위해서는 당시 교양 있는 사람들이 가졌던 약간의 지식은 필요합니다. 고대 신화도 그들 중 하나고요. 하지만 유일한 지식은 아닙니다. 역자의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알고 있으니 예상 못했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대 신화에서 셰익스피어로, 셰익스피어에서 현대 작가들로 이어지는 일직선의 강을 상정한 건 오해의 여지가 큽니다. 특히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특별히 대단한 인문 지식을 과시한 적이 없었던 셰익스피어의 경우에는요. 이 책에서 밝히는 고대 신화의 ‘압축지식’들은 모두 간단한 설명 몇 줄로 끝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셰익스피어 독자들에겐 몇몇 고유명사들의 어원을 설명하는 것보다 <안녕, 프란체스카>에 나오는 뱀파이어들처럼 외국인들로 변장한 당시 영국인들과 영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유익한 일일 수도 있겠죠. 이런 식으로 서구 문학에 숨은 고대 신화의 코드를 찾는 작업을 하고 싶다면 셰익스피어보다는 고전에 대한 지식이 더 밝고 그 전통에 더 충실한 다른 작가들을 찾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하긴 그렇게 작정한다면 ‘무례하고 무식한’ 영국 작가들보다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작가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게 더 생산적이겠지만요.

본문으로 들어간다면... 전 이 책이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불만입니다. 이 번역본은 대부분 산문입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운문이지요. 물론 시를 번역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언어로 넘어갈 때 셰익스피어보다 훨씬 많은 걸 잃는 테니슨이나 에드가 앨런 포우를 번역할 때에도 “울려 퍼져라 우렁찬 종소리, 거친 창공에, 저 흐르는 구름, 차가운 빛에 울려 퍼져라”로 몰아붙이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행과 연을 끊어주며 필요할 경우엔 원작의 음악성을 대체할만한 무언가를 넣을 겁니다. 전에 나온 신정옥 교수의 번역본은 무대에 올리기 위한 실용적인 책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읽히기 위한 책으로 의도된 이 번역본의 핑계는 뭐랍니까? 이런 식의 산문역은 대부분 원작의 가독성을 날려버립니다. 셰익스피어의 시어를 읊는 주인공들은 줄바꾸기도 없는 한 페이지짜리 대사들을 와르르 쏟아내는 수다쟁이들로 변하지요. 적어도 시의 논리는 남아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원어의 공연을 직접 감상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읽으면서 대사의 리듬은 따라갈 수 있어야죠.

그래도 전 번역자들이 자신이 ‘아마추어’임을 자랑스럽게 밝히는 부분에서 괜히 흥분합니다. 아마추어들은 프로들이 무의식적인 관습 속에 갇혀 못하는 걸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다음 번역 때엔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겠습니까? 『십이야』의 주인공 바이올라와 세바스찬은 쌍둥이 남매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번역본을 읽어보면 두 사람의 나이차가 한 20년은 된 것 같습니다. 이건 남매가 있다면 당연히 누이 쪽이 한참 손아래여야 한다는 이상한 한국 번역가의 논리에서 나온 것인데, 읽을 때마다 불편합니다. (이런 식의 무신경 때문에 전 전에 KBS에서 방영한 더빙판 <피너츠> 만화에서 루시가 라이너스를 오빠라고 부르는 걸 참고 견뎌야했던 것입니다.) 습관에 눌리지 않은 아마추어 번역가들이라면 이 굴레에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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