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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가 궁금하세요? - 『감독 不적격』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의 애니메이션 마니아에게도 충격을 안겨준 직후, 아는 후배가 안노 히데아키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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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의 애니메이션 마니아에게도 충격을 안겨준 직후, 아는 후배가 안노 히데아키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든 가이낙스가 오타쿠 집단이고 안노 히데아키는 오타쿠의 전형이란 평이 자자했던 지라, 인터뷰가 별 탈 없이 끝날지 사실 의심스러웠다. 무사히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후배의 후일담은 미묘했다. 반바지에 샌들 차림의 안노 히데아키는 소파에 앉은 채로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어떤 질문을 던져도 심드렁하고 무성의하게 답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사람이 오타쿠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몇 년 후, 그 후배는 다시 안노 히데아키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완벽하게 바뀌었다고 한다. 푸짐한 살이 빠진 것은 기본이고, 단정한 옷차림에 여유 있는 표정과 미소 그리고 친절하고도 상세한 설명까지 너무나도 성실한 자세로 인터뷰에 임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사람이 바뀔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추정해본 이유는 하나, 안노 히데아키의 결혼이었다. 안노 히데아키는 『해피 매니아』, 『젤리 빈즈』, 『러브 마스터 X』 등을 그린 만화가 안노 모요코와 결혼을 했고, 그 이후로 외모와 생활방식까지 바뀌었다는 말이 들렸다. 도대체 무엇이 오타쿠의 표본인 그 남자를 바꿔놓은 것일까. 만화가와 감독이 함께 살면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궁금했다.

안노 모요코의 『감독 不적격』이란 만화가 있다. 알고 싶었던 바로 그것, 안노 히데아키와 모요코 부부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만화다. 안노 모요코가 직접 그린 자신들의 신혼생활. 『감독 不적격』의 주인공은 애니메이션 감독인 ‘감독군’과 만화가인 ‘롬퍼스’다. 안노 모요코는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은 채 ‘만화적’으로 자신들의 사적인 생활을 공개하고 있다. 누가 봐도 그들의 이야기인 것이 당연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잘 몰라도 상관없다. 『감독 不적격』은 오타쿠와 함께 살게 된, 자신이 오타쿠임을 거부하려는 여자의 시선으로 그려낸 만화다. 결국은 자신도 오타쿠화되는, 그러면서도 오타쿠를 바깥으로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쓴 오타쿠 일기인 것이다.

감독군은 일본 오타쿠 사천왕으로 불리는 남자다. 그를 알기 위해서는, 오타쿠란 도대체 어떤 인간을 말하는지 알아야 한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푹 빠져 현실을 멀리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눈에 확 들어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안노 모요코가 보여주는 오타쿠의 실례는 너무나도 생생하다. 오타쿠는 의성어와 의태어, 즉 만화에 자주 나오는 효과음을 직접 입으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햇빛에 눈이 부실 때, 눈을 가리며 ‘번쩍’이라고 말하는 사람인 것이다. 오타쿠는 뭔가에 놀라거나, 새로운 사실을 알았을 때 일부러 말을 더듬는 사람이다. “그…그런….”, “그…그랬던 것인가….” 애니메이션에 늘 나오는, 무언가에 놀라는 장면에 전매특허로 나오는 대사를 따라하는 사람. 오타쿠는 수납장을 만들 때 단위로 cm가 아니라 kr을 쓴다. kr은 가면 라이더의 프라모델 크기로 38cm를 말한다. 혹은 건담 프라모델의 최저가격인 300엔을 통화기준으로 쓰기도 한다. 주변에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면, 그를 오타쿠라 불러도 좋다.

‘나 자신도 오타쿠였기 때문에 동업자나 오타쿠와 사귀는 것을 거부했지만’ 결국 오타쿠와 살게 된 롬퍼스는 새로운 현실과 부딪쳐야 한다. 혼자서 밀러맨 놀이를 하고, 애니메이션 주제가의 가사를 기억해내기 위해 고통스러워하고, 일상 대화 속에 끊임없이 애니메이션의 대사를 인용하는 감독군을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게다가 평화롭던 거실은 감독군의 LD와 피규어 컬렉션이 점령하고, 곳곳에 음식완구(과자에 장난감이 들어있는 것)의 박스가 널려 있는 것도 참아야 한다. 만약 거실이 넓기라도 했다면 당장에 N게이지(철도모형)가 깔려 날마다 기차가 움직이는 것을 함께 구경해야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대사 쓰는 것을 금지하는 등 저항도 해보지만, 결국은 ‘저항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순응하는 것이 편리하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함께 오타쿠의 길을 나아간다.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함께 부르면서.

안노 히데아키는 “지금의 일본은 오타쿠가 사방에 넘쳐날 만큼 경제적으로 포화상태이고 정보와 물질문명이 흘러넘치는 반면 정신은 가난하고 상상력은 궁핍하고 사회기반은 쇠약하다”라고 말한다. 오타쿠인 안노 히데아키는 오타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든 후 애니메이션 만화 팬과 업계의 지나친 폐쇄성에 염증을 느꼈다고 한다. 굉장한 자기혐오를 느끼면서 자포자기도 했고. 자신이 오타쿠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오타쿠로서 자기 안에 파묻히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것이 안노 히데아키가 실사영화로, 특수촬영물로 끊임없는 도전을 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아마도 거기에는 안노 모요코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감독 不적격』을 보면 알 수 있다. 30세의 여인인 자기 모습을 갓난아기의 형상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모요코는 자신과 남편을 매우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비웃는 게 아니라, 냉철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유치하면서도 진지한 유희와 일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끄집어낸다. 스스로 깨닫고 바깥으로 나갈 수 있도록 깨우쳐 준다.

“지금의 만화는 독자를 현실로부터 도피시키고 거기서 만족을 찾는 장치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마니악한 사람일수록 그쪽에 너무 파고들고 일체화되어 그 이외의 것을 인정하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아내의 만화는 만화를 읽고 현실에 돌아왔을 때 독자의 내부에 에너지가 남게 하는 만화이지요. 읽은 사람이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나가서 행동하고 싶어지는 그런 힘이 샘솟는 만화입니다. 현실에 대처해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 위한 만화인 겁니다.” 후기에 있는 안노 히데아키의 안노 모요코의 만화에 대한 평가는 예리하다. 그 평가는 『감독 不적격』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감독 不적격』은 단지 오타쿠의 희한한 점, 웃기는 요소들만을 열거한 게 아니다. 오타쿠의 일상을 과장하거나,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다. 안노 모요코는 오타쿠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 깊이 깨닫고 있고, 그럼에도 그 장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오타쿠의 전형인 안노 히데아키를 보면서, 모요코는 오타쿠의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낸다. 오타쿠란 자기의 세계에 빠지면서도, 타인과의 접점을 찾아내는 창조적인 인간이다. 오타쿠의 세계는 오타쿠만이 알 수 있지만, 오타쿠란 사람들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임을 『감독 不적격』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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