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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절정의 삼국지 - 고우영 『삼국지』

굳이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에게 『삼국지』는 곧 고우영의『삼국지』다. 중학교 때 처음 만난『삼국지』는 심심할 때마다 읽는 필독서가 되었다. 한 50번 이상씩은 보았을 것이다. 고우영의 다른 만화들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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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나에게 『삼국지』는 곧 고우영의『삼국지』다. 중학교 때 처음 만난『삼국지』는 심심할 때마다 읽는 필독서가 되었다. 한 50번 이상씩은 보았을 것이다. 고우영의 다른 만화들도 마찬가지다. 『임꺽정』『일지매』『수호지』『열국지』등 고우영이 그린 만화들을 보면서 나는, 만화의 즐거움을 느끼는 한편 중국의 역사까지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 덕에『삼국지』의 내용은 모두 고우영의 그림으로 기억난다. 동탁의 죽음을 떠올리면, 동탁의 부른 배에 꽂아놓은 촛불이 몇 달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그림이 생각난다. 조자룡의 이미지는 여전히 말 없고 성실한 미남자로 남아 있다. 가끔, 그래도 『삼국지』를 완역본으로 한번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늘 그냥 넘어간다.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고전을 대하는 가장 좋은 일은 물론 원서로 보는 것이다. 그게 힘들면 완역본으로 읽거나.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고우영의『삼국지』, 이학인의『창천항로』등으로 만족한다. 아예 안 보는 것보다는 그게 나으니까. 오래 전 모 대학 앞에서 밥을 먹다가, 학생들의 대화를 들었다. 삼국지 봤냐? 아니, 그게 누가 주인공이지? 글쎄? 혹시 유방인가? 아 맞다. 그래 유방이다. 이공대 학생들이긴 했지만, 그런 소리를 태연하게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좀 착잡했다. 고우영의『삼국지』라도 열심히 봤다면 그런 소리는 안 할 텐데.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한 번도 읽지 않는 것보다는, 만화로 보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학습 만화’로 급조한 싸구려들은 제외하고, 기왕이면 잘 만든 만화로. 『삼국지』도 마찬가지다. 완역본에 가깝게 옮긴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삼국지』도 좋고, 충실하면서도 작가의 개성이 물씬 드러난 고우영『삼국지』도 좋다. 아예 나관중의 『삼국지』를 뒤집어 조조를 희대의 영웅으로 그리고, 신과 인간의 어우러짐으로 만들어낸 『창천항로』도 좋고. 조조를 영웅으로 그린 것이 작가의 독창적인 해석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나관중의 『삼국지』 역시 역사를 기초로 한 허구의 산물이기는 마찬가지다. 다양한 관점과 시각으로 다듬어진 소설과 만화 등을 통해서 역사의 다면성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1978년에 처음 연재되기 시작한 고우영의『삼국지』는 외국의 어떤 작품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고전의 독창적인 해석은 물론 당대의 사회상을 역사에 빗대어 드러내는 방식도 탁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고우영의『삼국지』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내가 1980년대에 본 『삼국지』는 우석출판사에서 나온 10권짜리 단행본이었다. 그 단행본 곳곳에는 지워진 부분이 있었고, 아예 다른 그림이 들어가기도 했다. 작가의 말로는 “폭력과 선정성 등을 이유로 심의과정에서 100여 페이지가 삭제, 수정”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나온 『삼국지』는 초판본 10권을 기본으로 하되 삭제, 수정된 부분을 직접 복원한 '무삭제 완전판‘이다.

삭제되기는 했지만, 당시의 판본으로도 고우영의 천재성은 쉽게 드러났다. 인물 해석부터가 재미있다. 유비를 ‘쪼다’로 그리면서도, 자신을 슬쩍 빗댄다. 제갈공명과 관우를 라이벌로 대립시키고, 권력다툼에서 일체 관심이 없는 장비와 조자룡의 개성도 매끈하게 잡아낸다. 제갈공명이 관우를 사지로 몰아넣기 위해 벌이는 행적을 교묘하게 연결시키는가 하면, 장비의 ‘서민적인 순수함’을 부각시켜 더욱 빛나게 한다. 이학인의『창천항로』처럼 우리의 통념을 180도 뒤집는 경우는 없지만, 역사 속의 인물들에게 자신의 시선을 명확하게 부여하여 생생함을 더해준다. 그 결과 『삼국지』는 단순한 만화 각색이 아니라, 고우영의 ‘만화삼국지’로 완벽하게 재편되었다.

고우영의 장기 중 말재간은 특히 즐거움을 더한다. 고우영의 말재간은 단순한 말장난을 뛰어넘어 당대의 사회상을 적극적으로 끌어낸다. 초선의 미인계에 걸린 여포는 의부 동탁을 죽이면서 “크레오 훼드라”라고 외친다. 당시 유명했던 영화 <페드라>를 패러디한 것이다. 작가의 기본이기는 하지만,『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은 캐릭터에 따라 말투와 어휘가 달라진다. 장비의 대사와 관우의 대사는 거의 상극이고, 제갈량과 관우의 대화는 정중하면서도 총성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성인만화에만 나오는 ‘야한’ 장면들도 고우영 특유의 해학으로 전혀 부담 없이 책장을 넘기게 해준다.

고우영의『삼국지』는 만화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 작품의 하나다. 중학교 때 보았던『캔디 캔디』『루팡 3세』『코브라』 같은 일본만화와는 달리, 고우영의『삼국지』는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과 풍자를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삼국지』『일지매』와도 다르다. 고우영의 작품 중에서 개인적 취향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는다면 단연『일지매』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스토리를 만들어낼 때도 고우영은 여느 작가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고전이나 역사를 각색하여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국내만화가 중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원작의 향취를 느끼면서도, 전혀 새로운 작품인 것처럼 다가오는 것이 고우영의 만화다. 그리고 그 재능이 최고도로 발현된 작품이 바로 고우영의『삼국지』다. 비록 고우영의 최근작들이 지나치게 역사만화로 축소되기는 했지만,『삼국지』는 고우영의 재능이 절정으로 만개했을 때 어떤 작품이 나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고우영 삼국지』는 당시 금기시되었던 만화에서의 성적 에로티시즘이 유쾌하게 표현됨으로써 성인이 볼 수 있는 만화를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을 뿐 아니라,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의 시대상을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빗대어 시사하는 등 어떻게 1970년대에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로 수많은 파격과 천재성이 발견된다. 그의 모든 작품이 하루빨리 ‘완전판’으로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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